사연도 많았던 2025년 한 해도 ‘세상이 쉼 없이 흘러가며 끊임없이 변한다’는 변동불거(變動不居)라는 사자성어를 남기고 저물고 있다. 푸른 뱀의 해로 지혜와 유연성, 변화를 상징했던 을사년(乙巳年)에 이어, 다가오는 2026년 병오년(丙午年)은 육십갑자 중 43번째에 해당하는 말띠 해다.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열정과 강력한 에너지를 품은 ‘적토마’의 기운이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기원한다.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서 말은 단순한 가축 이상의 존재였다. 고대 신화에서 말은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한 매개자로 등장한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에 등장하는 ‘천마(天馬)’가 그러하며, 고구려 벽화의 기마상은 우리 민족의 거침없는 기상을 대변한다.
말은 예로부터 ‘도약’과 ‘전진’을 상징해 왔다. 벌판을 달리는 말의 근육질 몸매와 휘날리는 갈기는 멈추지 않는 생명력과 진취적인 정신을 상징한다. 특히 ‘오(午)’는 하루 중 태양이 가장 높이 뜨는 정오를 의미하며, 계절로는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는 한여름의 정점을 뜻한다. 여기에 불의 기운인 ‘병(丙)’이 더해졌으니,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인 성장과 활력이 기대되는 해라 할 수 있다.
여수는 예로부터 말과 관련된 일화가 많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지리적 요건과 기후가 알맞아 조선 초기부터 화양반도와 돌산도 등에 대규모 목장이 설치되었고, 이곳에서 국가에 필요한 군마와 역원의 말들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여수 지역의 말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다. 조선 초기 ‘백야곶’이라 불렸던 지금의 화양반도에는 백야곶목장이 설치되었으며, 돌산도·낭도·제도·개도·화태도·묘도 등지에도 사복시(司僕寺) 소속 목자들이 말을 키우던 목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특히 백야곶목장은 조선 중기 ‘곡화목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당시 화양면 지역과 돌산도 목장에서 각각 1,000여 마리가 넘는 말을 키웠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그래서인지 여수에는 말과 관련된 지명이 유독 많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화양(華陽)이다. 화양이라는 이름은 사서삼경 중 하나인 『서경(書經)』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주나라를 세운 주무왕(周武王)은 상(商)나라를 정벌한 뒤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말은 화산(華山)의 남쪽에 풀어놓고 소는 도림(桃林)의 숲에 풀어놓았다고 한다. 이를 “귀마우화산지양(歸馬于華山之陽), 방우우도림지야(放牛于桃林之野)”라 하는데, 여기서 ‘화양’이라는 지명이 인용된 것이다.
서울의 화양동(뚝섬 인근) 역시 같은 유래를 가진다. 그곳에는 조선 시대 국가의 말을 키우던 ‘살곶이 목장’이 있었고, 세종 대에 지어진 정자의 이름을 후에 ‘화양정’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진다. 이처럼 여수의 화양면은 평화를 사랑하는 성군들의 마음과 목장이었던 지역적 특성이 결합하여 탄생한 깊은 의미의 지명이다.
이 밖에도 화양면과 돌산읍에 있는 마상(馬上)마을과 마상포는 ‘몰산개’라는 순우리말 이름이 전해지는데, 이는 말을 잡기 위해 말몰이를 했던 지형에서 유래했다. 소라면의 마산(馬山)마을은 지세가 말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여수 곳곳의 산허리에서 볼 수 있는 ‘질마재’나 ‘질마등’은 산등성이가 짐을 실은 말의 등(질마)처럼 평평하고 넓은 모양새를 갖춘 데서 기인했다.
설화 또한 다채롭다. 화양면 이목리의 ‘백마골’에는 날개를 달고 태어난 비범한 아이의 날개를 자르자 백마가 울며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소라면 현천리, 돌산 평사리, 화양 안포리 등에 있는 ‘천마산’ 역시 하얀 백마가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이야기나 철마(鐵馬)를 모시던 마신당(馬神堂)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2026 세계섬박람회의 무대 중 하나인 개도(蓋島)에는 말을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복녀의 이야기가 담긴 ‘마녀목(馬女木)’ 전설이 내려온다.
‘붉은색’은 태양과 불, 그리고 열정과 사랑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병오’는 강한 양기(陽기)가 응집된 시기로, 정체된 상황을 돌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강력한 추진력을 상징한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불확실한 경제 상황 속에서 인내의 시간을 보내왔다. 하지만 2026년 병오년은 축적된 에너지를 바탕으로 힘차게 대지를 박차고 나가는 해가 되어야 한다. 붉은 말이 내뿜는 뜨거운 기운으로 사회 곳곳의 갈등을 녹이고 성장의 엔진을 다시 가동해야 할 때다.
말은 혼자 달릴 때보다 함께 달릴 때 더 멀리, 더 빠르게 갈 수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 또한 ‘함께하는 도약’이다. 특히 여수는 ‘2026 여수세계섬박람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해 또 한 번의 비상을 꿈꾸고 있다. 30만 시민의 역량이 집단지성으로 결집하여 세계로 뻗어가는 여수가 되기를 기원한다. 아울러 7전 8기의 노력으로 진상규명의 길을 걷고 있는 여순사건이 78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올해는 정부를 대표하여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희생자를 위로하고 사과함으로써, 아픈 역사를 딛고 화합과 상생으로 도약하는 원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이제 붉은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2026년의 희망을 향해 우리 모두 힘찬 첫발을 내딛자.
- 박종길 여수지역사회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