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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없었다면 윤동주도 없었다

광양 망덕의 정병욱 생가를 찾아서

  • 입력 2016.03.14 08:04
  • 수정 2016.03.25 21:11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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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덕포구 이정표 모습으로 전어, 강굴, 재첩 등의 먹거리가 풍부한 고장임을 알리고 있다.

ⓒ 오문수

 

영화 <귀향>과 <동주>가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나라 잃은 힘 없는 백성들이 온갖 고초를 겪다 스러져가는 모습이 우리를 분노케 하고 안타깝게 한다. 때마침 북한 김정은의 핵도발에 이은 주변 4강들의 틈바구니에 끼인 대한민국의 처량한 신세가 당시를 회상케 한다. 진정 대한민국은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주권국가인 걸까.

 

하여 내가 살고 있는 여수 가까이에서 동주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1시간 거리 떨어진 정병욱 생가를 지난 7일 방문했다. 정병욱 생가가 있는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는 섬진강과 바다가 만나는 포구다.

 

이곳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라 영양분이 풍부해서인지 수산물이 많이 잡힌다. 거리 이정표에는 전어, 강굴, 재첩거리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적혀 있다. 정병욱 생가를 물어보기 위해 횟집을 기웃거리다 어항에 놓인 어른 손바닥만큼 커다란 굴을 구경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주인아주머니가 "들어와서 차 한잔하세요"라며 망덕포구와 강굴의 유래를 설명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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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덕포구 이정표 모습으로 전어, 강굴, 재첩 등의 먹거리가 풍부한 고장임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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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양 망덕 포구 횟집 어항에 담긴 강굴(왼쪽)의 모습으로 어른 손바닥보다 크다. 바구니에 담긴 작은 굴은 바다에서 잡히는 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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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나는 굴은 원래 주먹보다 작지요. 그런데 이곳 망덕은 섬진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역이라 영양분이 풍부해 굴이 엄청 커요. 원래는 벚꽃 필 때 먹는다고 해서 벚굴이라고 했는데 섬진강에서 나온다고 해서 강굴로 이름을 바꿨어요. 다이버들이 물속에 들어가서 잡아요. 9월에 열리는 전어축제도 이곳에서 열리니 놀러오세요."

아주머니가 일러주는 곳으로 가니 과연 정병욱 생가라는 표지판이 붙어있고 윤동주와 정병욱이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붙어있다. 1925년에 전형적인 근대 상가 주택으로 지은 정병욱 생가는 1934년 광양군 진원면장을 역임했던 부친 정남섭이 매입했다. 하지만 정병욱이 서울대학교 교수가 돼 서울로 이사하자 박춘식(정병욱 외조카)씨의 아버지가 매입했고 현재는 박춘식씨 소유다.

민족과 문학의 앞날을 논하는 정신적 동지... 윤동주와 정병욱
 
 
 윤동주와 정병욱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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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에서 태어난 윤동주와 한반도 끝자락인 남해에서 태어난 정병욱,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진 곳은 연희전문이다. 1940년 정병욱이 연희전문 1학년에 입학해 기숙사에 기거할 때 나이로는 5년 연상이고 학년은 2년 위인 윤동주가 정병욱이 기거하는 기숙사로 찾아왔다. 정병욱이 쓴 <동주형의 편모>에 적힌 내용이다.

"1940년 4월 어느 날 이른 아침 연전 기숙사 3층, 내가 묵고 있는 다락방에 동주 형이 나를 찾아주었다. 아직도 기름 냄새가 가시지 않은 <조선일보> 한 장을 손에 쥐고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나와 같이 산보라도 나가실까요?' 신입생인 나를 3학년인 동주형이 그날 아침 <조선일보> 학생란에 실린 나의 하치도 않은 글을 먼저 보고 이렇게 찾아준 것이었다"

정병욱은 <잊지 못할 윤동주 형>에서 윤동주의 첫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오똑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 일(一)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 마디로 미남이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그는 멋쟁이였다. 그렇지만 그는 꾸며서 이루어지는 멋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천성에서 우러나는 멋을 지니고 있었다.

모자를 비스듬히 쓰는 일도 없었고, 교복단추를 기울어지게 다는 일도 없었다. 양복바지의 무릎이 앞으로 비스듬히 튀어나오는 일도 없었고 신발은 언제나 깨끗했다. 이처럼 그는 깔끔하고 결백했다. 거기에다, 그는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휘갈겨도 요동하지 않는 태산처럼 믿음직하고 씩씩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다."

시를 함께 읽고 평했던 글벗

창씨개명과 조선어말살 정책으로 엄혹한 세상이 되자 둘은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의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했다. 그러나 일경이 요시찰 인물로 지목한 김송씨 집이 불편해 북아현동으로 하숙집을 옮겼다.

둘이 김송씨 집에서 하숙하는 1년 동안 윤동주는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 등 주옥같은 시를 썼고, 정병욱은 언제나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는 최초의 독자였다.

윤동주와 정병욱이 나이 차이가 났지만 정신적 동료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은 정병욱의 <잊지 못할 윤동주 형>을 보면 알 수 있다. 윤동주의 명시 <별 헤는 밤>의 끝부분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라는 끝부분을 정병욱의 의견을 듣고 수정했다.

"첫 원고를 끝내고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에게 넌지시 '어쩐지 끝이 좀 허한 느낌이 드네요' 하고 느낀 바를 말했었다. 그 후, 현재의 시집 제1부에 해당하는 부분의 원고를 정리하여 <서시>까지 붙여 나에게 한 부를 주면서 '지난번 정 형이 <별 헤는 밤>의 끝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 하면서 마지막 넉 줄을 적어 넣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원고를 넘긴 때는 1941년 11월 20일 이후부터 1942년 2월의 일본유학 가려던 사이로 추정된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윤동주는 시집 세 권을 만들었다. 한 부는 당시 자선시집을 만들어 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계획을 "지금은 위험하다"며 말린 스승 이양하 교수에게, 한 부는 자신이 가지고 일본으로 가지고 갔고, 나머지 한 부는 정병욱에게 맡긴다.

윤동주가 정병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지 표지를 보면 왼쪽에 "정병욱 형(鄭炳昱 兄)"이라 적혀 있다. 5년이나 아래인 후배에게 '형'이라고 존대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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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준 시집이다. 첫머리에 <서시>가 나오고 맨 오른쪽에는 '정병욱 형'(鄭炳昱 兄)이라 적혀있고, 그 아래에는 '윤동주 정(尹東柱 呈)'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5년이나 후배인 정병욱에게 '형' 과 '정'이란 글을 써보낸 윤동주의 인품과 둘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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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유고시집을 보관했던 정병옥 가옥(1962년 촬영)으로 바로 앞에 바다물이 보인다. 지금은 매립해 자동차 도로가 생겼다. 바닷가 가까이 내려가는 어린이가 지금의 집 소유주인 박춘식씨 자신이라고 설명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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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같은 왼쪽 면에 "윤동주 정(尹東柱 呈)"이라고 씌어있다. '정(呈)은 감사나 공로 등에 대한 성의나 인사 표시로 어떤 대상에게 드리다'라는 뜻으로 윤동주의 인품을 알 수 있고 정병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1943년 여름 일본에서 윤동주는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돼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고 같은 해 정병욱도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됐다. 정병욱은 이 원고를 모친께 맡기며 '저나 윤동주 시인이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소중하게 간직해 주십시오'라고 부탁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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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덕포구에는 윤동주를 기리는 시를 전시한 전망대가 있다. 이곳은 광양일대에서 활동하던 황병학의병 일행이 어업권을 침탈하던 일인들을 처단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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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진강과 바다가 만나 해산물이 풍부하게 잡히는 망덕포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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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둘 다 살아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조국이 독립되면 이 원고를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 달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떠났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살아 돌아온 정병욱은 자신의 집 마루 아래 숨겨뒀던 윤동주의 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을 발간(1948년, 정음사)해 윤동주를 세상에 알렸다.

하버드대학과 파리7대학에서 객원교수로 강의를 했고, <시조문학사전>과 <한국의 판소리>를 출간해 한국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던 정병욱 교수가 평생 자랑했던 일은 윤동주를 세상에 알린 일이다.

"내가 평생 해 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오늘의 나에게 문학을 이해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인생의 참된 뜻을 아는 어떤 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동주가 심어 준 씨앗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이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보여주는 것은 끊임없는 자아성찰과 혐오, 연민, 후회 등이다. 이런 감정들이 교차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기도했던 그의 몸가짐을 생각하며 부끄럼으로 점철된 나를 돌아본다.

"정병욱 생가, 문화재답게 제대로 보존해야"

정병욱 교수가 서울로 이사간 뒤 정 교수의 생가에서 태어나 여태껏 살다 인근에서 횟집을 경영하는 정병욱 생가 소유주인 박춘식(61)씨는 집이 온전하게 보존된 연유를 말해줬다.

"정병욱 교수님이 살아계실 때 여름이면 20여 명의 제자들과 함께 오셔서 이 집을 없애지 말고 보존해달라고 말씀하셨어요. 정병욱 교수 동생도 자신이 죽을 때까지 꼭 보존해달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어머니는 부엌과 화장실이 불편해 현대식으로 고치자고 했지만 아버지 고집 때문에 그대로 살아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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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주인 박춘식(61)씨가 정병욱 교수의 모친이 윤동주시인의 유고를 항아리에 싸서 숨겨두었던 마루를 들어보이고 있다. 정병욱 교수가 서울로 이사가며 박춘식씨 아버지가 이 집을 옛모습 그대로 보존했다. 박춘식씨는 정병욱 교수의 외조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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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외조카인 박춘식씨가 소장한 윤동주 관련 책들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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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생가가 등록문화재(제341호)로 지정되자 2013년 광양시에서 집수리를 했지만, 제대로 하지 않아 양철지붕에 녹이 슬고 기둥이 썩어가고 있어요. 건축업자 얘기로는 한 번 손을 대면 다 무너질까 걱정돼 손을 댈 수가 없다는 거예요."

광양시에서는 정병욱 생가를 매입해 윤동주문학관을 지을 예정이다. 하지만 박춘식씨는 분개한다.

"2013년에 문화재청에서 전수조사 나왔을 당시 D급 판정을 받았어요. 수리하려면 제대로 해서 보존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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