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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엔 슬픈 한국 현대사가 담겨 있다

여순사건 68주기에 다시 듣는 <산동애가>... "피워보지 못한 열아홉 꽃봉오리"

  • 입력 2016.10.18 16:25
  • 수정 2016.10.20 02:44
  • 기자명 오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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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애가 시디 표지ⓒ 김상길


여순사건 68주기를 맞아 작년에 제작된 가수 이효정의 '산동애가'가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 <산동애가>는 원래 구전으로 전해져 온 노래다. 음반으로는 방송사 다큐멘터리에 삽입 제작된 곡이 있었다. 이를 중견 작사·작곡가 김상길(59)이 다시 다듬어서 작년에 선보였다.

1984년 설운도의 '나침반' 작사가로 가요계 대뷔한 김상길은 그동안 김용임의 '사랑의 밧줄'(작사), '열두 줄'(작사·작곡), 염수연의 '효도'(작곡), 김미성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작사·작곡), 유화의 '화살을 쏘고간 남자'(작사·작곡), '가슴이 콩콩콩'(작사·작곡) 등의 작품을 써왔다.
 

▲1984년에 발표한 '나침반' 수록 LP판ⓒ 김상길


특히 데뷔 작사곡 '나침반'은 쉽고 재미있는 가사로 연인을 찾는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어 사랑을 받고 있다. '나침반' 가사에는 종로, 명동, 청량리, 을지로, 미아리, 영등포 등 모두 6곳의 서울 지명이 등장한다. 2010년 청계천문화관에서 정리한 서울을 주제로 한 노랫말 중에서 '서울의 지명이 가장 많이 들어간 노랫말'로 선정되기도 했다.

"종로로 갈까요. 명동으로 갈까요. 차라리 청량리로 떠날까요. 많은 사람 오고가는 을지로에서 떠나버린 그 사람을 찾고 있어요. 아 이쪽 저쪽 사방팔방 둘러보아도 어쩌다 닮은 사람 한두명씩 오고갈 뿐. 아 내가 찾는 그 사람은 어디 있나요. 아무리 찾아봐도 그 사람은 간 곳이 없네. 미아리로 갈까요. 영등포로 갈까요. 을지로 길모퉁이에 나는 서 있네…." - '나침반' 가사 중에서

김상길은 2004년도에 시집 <차 한잔 어떠세요>를 펴낸 데 이어, 2012년도에는 <김상길의 노랫말 시집>을 출간했다.

"그때 처음 알았죠... '산동애가'의 내력을"

가요계의 중견 작사·작곡가인 김상길이 '산동애가'를 다시 쓴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2015년도 여름에 순천과 여수를 여행하다가 귀경길에 구례 산동에 들러 우연히 산동마을 공원에 있는 '산동애가' 노래비를 보게 된다. 노래비에 적힌 사연을 들어보니 애절하고 슬펐다.

1948년 여순사건이 배경인데다 당시 19세 여성이 그 주인공. 끌려가면서 스스로 지어서 불렀다는 '산동애가'의 주인공은 백부전(본명 백순례)으로 실제 인물이다. 전남 구례 출생으로 백씨집안의 5남매 중 막내딸이었다.

산동에서 김상길은 백순례의 조카 되는 한 할머니로부터 슬픈 사연도 듣게 된다.

"할머니가 그러는 겁니다. 당시 미혼이었던 아버지와 고모(백순례)가 군인에게 함께 끌려갈 처지였다고 합니다. 끌려가면 바로 죽음이었으니 얼마나 절박했겠습니까. 고모가 나서서 '제가 갈 테니 오빠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합니다.

집안의 대를 잇는 대신 자신을 희생한 것이죠. 고모가 아니었다면 '제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는 겁니다. 역사에 관심 갖는 분들이야 진즉에 '산동애가'의 내력을 알았겠지만 저는 그때 처음 알았죠. 여순사건도 그냥  여수 '반란사건'이라고 말하고 그랬었는데, 그 이후로 '여순사건'이라고 말하고 그럽니다."
 

▲산동애가 노래비 (사진 구례군 제공)ⓒ 구례군청


당시 나이 19세. 시골 여성에게 무슨 이념이 있었겠으며, 특별한 사상이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여성은 '산동애가'를 부르며 꽃다운 나이에 희생됐다. 참으로 가슴아팠다.

"그 여성의 죽음에 왜 이념이 개입돼야 합니까? 우리 역사에서 너무 슬픈 일입니다.무얼 알았겠어요 산골에서 순박한 여성이…. 그래서 그 곡이 어떤 곡인지 긍금했습니다."

김상길은 노래비에 적힌 역사적 사실을 알고는 서울로 와서 곧장 '산동애가'를 찾아서 들어봤다. 다큐멘터리도 봤다. 오빠 대신 자발적으로 끌려가야 하는 운명이 너무 애처롭게 다가왔다.

"이 노래를 그냥 묻어둬선 안 되겠다"
 

▲작사가 겸 작곡가 김상길(59)ⓒ 김상길


"당시 저는 이 노래를 그대로 묻어버리면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현대인들이 더 쉽게 부를 수 있게 하고, 또 대중가요로 만들어서 자주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한거죠. 그러면  불러질 때 마다 기억이 되고, 그럼으로써 역사적으로 그 사건이 조명이 될거고요. 그 당시의 기억을 되새겨볼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작업에 들어갔던 거죠."

그는 백부전의 노랫말을 발췌해 다듬고 곡을 붙였다. 그런 후 비디오 작업까지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가수와 함께 구례 산동 노래비 앞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도 촬영하고, 구례의 명소와 지리산을 더 다니면서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게 된다. 마침 영상제작사에 소속된 촬영감독의 고향이 구례 산동이어서 더 의미있게 작업했다고 한다.

이렇게 제작된 뮤직비디오 '산동애가'는 가수 이효정이 구례 현장에서 불러서인지 더 애처롭게 들린다.

여순사건은 여수주둔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항쟁 진압차 출동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데서 시작한 비극이다.
 

▲여순사건 희생자들의 모습ⓒ 오문수


'산동애가'의 주인공처럼 여순사건의 피해자는 광범위하고 그 숫자도 많다. 피해자가 지역적으로 여수·순천을 비롯하여 전라남도 동부지역과 전북·경남 일부등 지리산 지역에 걸쳐 있고, 시기적으로도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제14연대 봉기에서부터 진압되는 10월 26일까지 집중되고, 그 이후에도 한국전쟁 기간인 1950년 10월까지의 2년 여에 이른다.

1948년 10월 19일. 지창수를 비롯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병사들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제주도에서 일어난 항쟁을 진압 출동을 거부하면서 주둔지인 여수에서 봉기한 사건이 '여순사건'의 시작이다.

며칠 만에 여순사건은 광양, 구례, 보성(벌교) 등 전남 동부지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봉기군이 점령한 여수와 순천에서는 지방 좌익 세력과 청년 학생들이 대거 참여해 광범한 대중봉기로 발전했다. 이때는 우익의 피해가 컸다.

결국 경찰과 진압군이 나서서 봉기를 잠재운다. 순천과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과 경찰은 우익청년단원들과 지방 우익세력의 도움을 받아 봉기군 협력자 색출에 나서게 된다. 비상시국인 이때 혐의자들에게는 아무런 변호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우익세력의 '손가락질'에 지목되면 즉석에서 참수, 사형되거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이번엔 좌익이거나 우익의 '손가락질 대상'의 피해가 컸다.

봉기군들이 북으로 가지 못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됐다. 그들과의 '내통'을 이유로 지리산 자락에서도 피해가 많았다.

김상길이 제작한 '산동애가' 뮤직비디오에 등장한 마지막 자막은 아직도 유효하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이름없이 쓰러져간 넋들을 추모하며 이 노래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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