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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이 여수 머물던 때보다 더 후퇴한" 대한민국 이주민 정책

10년전, 그때 그곳이 '세월호' 였다.

  • 입력 2017.02.11 10:08
  • 수정 2017.02.13 07:02
  • 기자명 오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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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 화재가 발생한 바로 304호실 당시의 현장에서 추모객들이 여수출입국관리소 직원들과 묵념을 하고 있다.ⓒ 오병종
 
10년 전 여수외국인 보호소에서 화재로 숨진 희생자에 대한 추모식이 화재가 났던 바로 그 자리에서 10일 치러졌다.
 
10일 영하의 날씨에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10주기를 맞아 추모식과 기자회견을 오전 11시에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앞 길거리에서 개최하고 있다.ⓒ 오병종
 
여수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와 여수진보연대는 10일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10주기를 맞아 추모식과 기자회견을 오전 11시에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앞에서 가진데 이어 12시에는 화재가 났던 당시 304호 보호실 그 자리에서 헌화하고 추모했다.
 
화재 현장인 당시 304호 보호실. 지금은 리모델링되어 수용자들의 도서관 및 한글교실등 '다용도실'로 사용하고 있다.ⓒ 오병종
 
리모델링 한 직후에 여수출입국관리소가 자체적으로 이 자리에서 추모식을 가진바 있고, 현장에서 시민들과 여수출입국 관리소 관계자들이 함께 추모식을 갖기는 첨이다. 이영일 연대회의 대표가 헌화하고 있다.ⓒ 오병종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현장인 304호실 등 3층의 보호실은 참사 후 수습과정에서 그해 12월 리모델링되어 지금은 도서관과 한글교실등으로 사용하는 '다용도실'  되었다.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사건은 지난 2007년 2월 11일 03시 55분경 여수출입국관리소 외국인보호소 보호실에서 화재가 나 당시 구금된 55명의 외국인 가운데 10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 당한 사고였다.
 
여수민사회연대회의 이영일 대표가 추모사를 하고 있다.ⓒ 오병종
 
여수시민단체연대회의 이영일 대표는 추모사에서 "현재 이주노동자 200만 명은 대한민국 근로현장의 열악한 하층부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경제에 대체하기 어려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했다.  또한 "차별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자"고 역설하며 당시 희생자 10명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불러주고 이들이 추모했다.  

민주노총 신성남 여수지부장이 시집 <눈물도 때로는 희망>(2016년 9월, '푸른사상' 출간)에 수록된 조선남 시인의 '죽음의 바다'를 추모사 대신 낭독할 때, 40여명의 추모객들은 숙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노총 여수시지부 신성남 지부장이 추모시 '죽은의 바다'를 낭송하고 있다.ⓒ 오병종
 
 
죽음의 바다
   - 여수 외국인 보호소 화재 참사를 추모하며
                                  조  선  남

남쪽에서 올라오는 매캐한 연기
살이 타는 냄새
비명과 아우성 죽음의 순간
다급하게 쇠창살을 흔드는
쇳소리가 새벽을 울린다

가난한 조국을 떠나
돈 벌어 오마 하던 그 약속,
눈물로 적셨던 이별의 가슴을 안고
일을 찾아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

인종차별과 멸시를 가난한 운명 탓으로 돌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 산재의 위험에도
일밖에 몰랐던 노동자

철근을 세우며 새벽이 밝았고
임금을 떼여도 참아야 했던
한국말이 서툴던,
언젠가 한 번 같이 일을 했을, 김씨가 아니었을까

그 착하고 순한 눈빛이
죽음의 순간 얼마나 두려웠을까

매질과 학대
인간 사냥과 강제 추방으로
꿈속까지 쫓기던 짐승의 울부짖음이
새벽을 울린다

2007년 2월 여수의 바다는 죽음의 바다였다. (전문)
 
추모객들은 기자회견장에서 강제추방 반대와 폭력단속 규탄을 주장했다.ⓒ 오병종
 
당시 공동대책위원이었던 '아시아의 친구들' 김대권 대표는 현장 발언으로 희생자들을 다시 추모객들 앞으로 호명했다.

"고향에 있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머나먼 타국 한국에 와서 한국인들이 하려고 하지 않았던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감수하면서 노동을 했던 분들이었습니다. 건설현장에서, 인근 바다 양식장에서, 제조업체 공장에서 일하다 거기서 체불된 임금이 해결이 안 돼 예상기간보다 훨씬 오랜 기간 이곳에 있다가 비명횡사했던 것입니다"  
 
 
 
그는 당시 병원에서 만났던 부상자들도 회고하며 외국이주민을 상대하는 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옮겨졌을 때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병원 침대에 수갑을 채우는 법무부의 행태였습니다. 당시 많은 희생의 원인도 범죄자 취급하느라 도망가지 못하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도, 부상자 역시 범죄자처럼 침대에 수갑으로 묶어놓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경미한 부상자로 처리되어 청주 보호소롤 이송되었던 많은 생존자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도 했고, 사고 원인을 밝혀줄 중요한 증인임에도 바로 귀국조치를 취했습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자행된 겁니다." 
 
해마다 이맘 때 여수에서 조촐하게 이곳에 와서 추모 행사를 몇 차례 가져온 여수 솔샘교회 정병진 목사는 추모 현장에서 "하멜 일행이 360년 전 제주와 여수에 머물 때, 선조들은 잘 맞아주었는데 우리 역사는 후퇴하고 있다"며 "보호소 수용자들도 본국으로 돌아갈 때 인간적인 예우를 받고 돌아가도록 제도적인 보완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의 19개 출입국관리사무소 크건 작건 내부에 보호소가 있다. 하지만 여수 보호소처럼 많게는 160명까지 혹 그 이상의 대규모 인원의 보호소는 남부 지방을 맡는 여수와 중부 지방을 맡는 청주, 그리고 대전 이북의 이주민을 보호하는 화성 이렇게 세 군데가 있다.
 
 
외국인 이주민 노동조합 박진우 사무처장은 전국의 상황이 유사하다며 여수참사 이후에도 끊이지 않은 사고 사례를 들며 변하지 않은 외국인 이주민 정책을 질타했다.

 
"화성에서 몽골인 이주노동자는 알콜중독자여서 징벌방에 가둬놓았는데 간질병이 있음에도 독방에 방치해 사망한 사고가 있었고,
인천 공항으로 호송하는 과정에서 이주노동자가 버스 안에서 사망하기도 했으며,
작년에 우즈베키스탄 노동자는 실명 위기 속에서도 일을 해오다 화성 보호소에 보호받게 되었는데 기자회견 한다는 말에 강제 추방시키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는 무슬림이어서 위험하다며 단속하는 과정에서 2층에서 추락해 크게 부상하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대구에서도 이주노동자 단속 과정에서 심하게 다뤄 실명 사례도 있었습니다.실인적인 단속강화 방침 변경되어야하고, 미등록 노동자는 합법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봅니다."
  
홍보용 차량을 이용해 만든 간이 헌화대에 추모객들이 국화 한송이씩 헌화하고 묵념을 올리고 있다.ⓒ 오병종
 
발언에 이어 추모객들은 임시로 만든 헌화대에 국화 한송이씩 바치고 묵념하며 추모의식을 거행했다.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입구 문창살에 추모의 띠를 달기도 했다. 이런 열련의 추모행사는 영하의 날씨 속 여수출입국관리소 정문 앞 길거리에서 가졌다.
 
여수출입국관리소 정문에 추모 띠를 달고 있는 추모 참가 시민  ⓒ 오병종
 
화재 참사를 통해서 대한민국에 '외국인보호소'라는 명칭이 대중들에게 알려졌고, 이른바 '불법체류자'라는 '미등록 이주민'들의 현실에 대해서 인식하게 계기가 되었던 참사였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어떤가?  아직 추모객들은 요구가 많다.
 
이날 추모식에서는 '한국사회는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도 함께 진행되었다.
 
사회자인 여수진보연대 이광민 부장이 말한다.
"그때 10년전에 바로 이곳이 '세월호'였습니다"
 
기자회견을 통해 주최측은 지난 10년 동안 한국사회는 이주민 200만 명 시대를 맞았음에도 "정부의 인종차별적인 출입국외국인정책은 크게 나아진 점이 없고, 미등록이주민들의 인권개선 역시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고 지적헀다. 
 
간이 헌화대의 인용 문구들 "월급도 주지 않아 나와버렸습니다" "경비 직원이 도망가 버렸습니다" 10년전에도 '세월호'는 있었다.ⓒ 오병종
 
이들은 또한 외국인 보호소의 무기한 구금을 허용하는 현행 출입국관리법 개정과 미등록이주민을 양산하는 외국인력도입 제도의 개선을 주장했다. 아울러 '인종차별을 조장하는 출입국 외국인정책'을 전면 수정하고, 전혀 '보호'가 이뤄지지 않는 '외국인보호소의 폐쇄'와 미등록 이주민들에 대한 합법화를 요구했다.

한편, 여수참사 10주기인 11일 연극으로도 여수보호소 화재사건을 다시 만난다.

서울의 영등포 문래창작촌에 위치한 샐러드극단은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10주기 추모 연극 "P.S. 진실아 미안해!"를 관객없이 인터넷 생중계 공연을 한다.

극단 샐러드 박경주 대표는 10년 전 참사 때 한 달 가까이 여수에서 다큐멘터리 작가로서 동영상을 쵤영하면서 사고 이주민들의 뒷 수습을 돕기도 했었다.
당시 영상을 편집하여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를 다큐멘터리와 실험극 형식으로 2010년에  "여수 처음 중간 끝"(극본/ 연출: 박경주)을 무대에 올린 바 있다.
 
11일 오후 3시 인터넷 생중계되는 '화재참사' 연극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10주기 추모 연극 "P.S. 진실아 미안해!" 포스터. 사진 샐러드 극단 제공
 
이번 "P.S. 진실아 미안해!" 무대는 당시 사건을 직접 취재한 연출자 박경주의 경험을 허구적으로 구성한 창작물이다. 초연된 2010년 작품 일부가 영상미디어로 재구성되기도 한다.

"참사"라는 사회적 주제를 예술적 실험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샐러드의 도전은 11일 오후 3시부터 100분간 유튜브 샐러드 채널(생중계 채널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Mesm8NKjU30)로 관객을 만난다..

외부 지원없이 순수 샐러드 자체 제작으로 이뤄지는 이번 공연에서는 샐러드 소속 이주민 예술가 로나 드 마테오, 오로나 울란치메크, 어니마싱이 참여하며 미디어 아티스트 석성석이 미디어 감독으로 참여한다. (사회적 기업 샐러드'salad' 홈페이지 www.salad.or.kr  문의전화 02-2254-0517 )
 
2007년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사건 개요


○ 2007년 2월 11일 03시 55분경 여수출입국관리소 외국인보호소 3층 304호 보호실에서 화재 발생함. 이 화재로 인해 구금되어 있던 55명의 외국인 가운데 10명 사망. (손관충, 진선희, 이태복, 김광석, 에르킨, 장지궈, 양보가, 리샤우춘, 김성남, 황해파) 17명 부상.

○ 화재 당시 근무자는 직원 4명, 용역경비원 5명 등 총 9명. 근무일지상에는 감시실에 직원이 근무하게 되어 있으나 용역경비만 근무하고 있었음. 경비를 담당하던 직원들은 연기와 불길에 휩싸인 상황에서 외국인들의 구조 호소를 외면하고, 도주를 우려하여 이중 잠금장치를 여는데 시간을 오래 지체하였음.

○ 그 결과 10명이 우레탄 매트리스가 타면서 발생한 유독가스와 연기에 질식해 숨졌고 다수의 생존자들도 부상과 후유증을 얻었음. 화재당시 스프링클러는 설치돼 있지 않았고, 화재경보기 등 소방시설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음.

○ 이후 하급 공무원들과 경비 등이 처벌받았지만 제대로  지휘책임자들은 처벌되지 않았음. 또한 시설폐쇄와 인권공간으로의 재편 요구에도 불구하고, 여수외국인보호소는 약간의 시설 개선 이후 다시 구금시설로 운영되고 있음.

○ 국가인권위원회는 2007년 2월 27일 직권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조사에 착수하였음. 조사 결과, 화재 당시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보호실 3층에는 경비용역 2명만 근무를 서고 있었으며, 보호실의 구조와 운영은 구금시설과 다름 없었으며 출입문은 이중 장치로 시건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음.

○ 화재 사고 피해자중 최장기 보호외국인의 보호 기간은 1년 3개월로 대부분 임금체불이 이었음.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는 구금 외국인들에 대한 권리구제 절차 안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음.

○ 사고 후 수습과정에서도 화재사고 직후 일부사고 피해자들에 대하여 수갑을 채운 채로 병원 치료를 받게 하였으며, 사고피해자들을 출국시키는 과정에서도 권리구제 절차에 대해 충분히 안내하지 않고 정신과적 진료도 없이 강제 출국시킨 것으로 드러났음. 부상자들은 추후 후유증 치료 과정에서 국가로부터 제대로 된 지원과 보상을 받지 못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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