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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시인의 결혼

귀농일기 (12)

  • 입력 2017.03.24 06:49
  • 기자명 민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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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자윤

사내는 그곳 만수동의 아는 형님의 죽염 굽는 일을 돕고 있다고 했다. 아직 장가를 안간건지 못간건지 아무도 모르나 다만, 늙은(마흔의 나이) 총각으로 갈데없이 그곳에 눌러붙어있었던 것만큼은 확실했다.


무학을 자랑처럼 들이민 것도 나중에 실토한 걸 꿰맞춰보니, 가정 형편 때문에 어쩔 수없이 학창시절에 무지 가기 싫어했던 공고를 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때문에 구차스런 이력을 남들에게 내보이기 싫은 심사를 담아 역설적으로나마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사내의 적극적인 애정공세에 밀려 부득이하게 우정을 허락한 나는, 이후 내가 사는 야동으로 이 친구를 옮겨오도록 꼬드겼고, 그것으로 그의 야동시절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늙은 노총각의 처지에 남의 집에서 기숙하면서 죽염 굽는 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으니, 비록 장애를 가진 아는 형님의 일을 돕고 있다고는 하나, 그 하고 있는 일의 보람과는 별개로, 그의 인생은 늘 쓸쓸하였고 육체는 늘 고단함에 젖어있었다.


하여, 빈 시간 그가 하는 일이란 소주를 떡이 되도록 퍼마시거나, ‘시’를 쓰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그런 것들조차 지루할 즈음엔 누가 갖다놨는지 모를 야동 비디오를 뒤적거려가며 나머지 욕망의 어떤 틈새를 눅여들어갔을 터였다.

그날도 고단한 하루일과를 끝내고 누군가와 막걸린지 소준지 모를 술을 떡이 되도록 퍼부었더랬다. 그리고 곧장 긴한 잠에 빠져들었고, 그러던 그가 몽중에도 이상한 기미가 일자 혼곤한 가운데 어떤 달콤한 꿈이라도 꾸고 있겠거니 했다. 꿈속에 혹 묘령의 여인의 가슴이라도 더듬고 있었을까, 부지불식간에 자세를 바꾸어 몸을 옆으로 누이니 손에 닿는 감촉이 물컹했더란다.

아차, 이 뭐꼬, 하면서 평생 느껴본 적이 없었던 기묘한 감각에 시인의 본능에 가까운 촉수가 리얼한 가운데, 다른 한편으론 뭔지 모를 불길한 예감마저 들었고, 그리하여 프로이드가 설한 그 ‘수퍼에고’란 것이 작동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그의 혼연한 의식을 깨어들였다.  
눈을 번쩍 뜨니, 아차 이게 먼 사태람.
어디서 본 듯한 해끔한 여인의 얼굴이 바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상태로 제 바로 뽀짝 옆에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돌연한 사태에 잠이 싹 달아났다고 했다. 그리고 이 친구는 우리에게 그 후의 정황조차 나름 신이 난 채로 시키지도 않은 말을 계속해나갔다.


-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 일도 없었거든. 워낙 술을 많이 마신 통에 문고리를 잠그질 않고 잤던 모양이더라고, 이를테면, 정신이 약간 이상한 갸가 문을 잠그지 않은 틈을 타서 침입했던 거고, 그리고 말하자면 예전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더랬지, 그러니까, 음 뭐냐면, 어쩌다 낮잠을 자다 깨서 이상한 시선이 느껴져서 보면 창밖에서 누군가가 나를 훔쳐보고 있는 것 같은 거야, 이날도 내가 깨어나서 보니까, 내 옷은 아무 일없이 멀쩡하게 입고 있었던 그대로고, 아, 옷을 입고 있었다는 바로 그게 그 반증 아닌감....., 허어, 이 사람들이 왜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그래,
그러고 나서 내가 막 소리를 질렀더니, 걔는 바로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나가더라고, 아이고, 차암.

김 시인이 뭘 어쨌다는 짐작도 증거도 우리에겐 전혀 무의미했다. 다만 그 에피소드 이후로 우린 틈만 나면 그 일을 들쳐 내어 김 시인을 빠알간 궁지로 몰곤 하였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과 녹두장군 전봉준을 몹시도 흠모하고 존경하는 그의 별명을  이름하여 ‘다록’(두 역사적 위인의 이름자를 절묘하게 조합 한)이라 붙여주었고, 이후 ‘다록’은 그의 아호가 되었다.

노총각 다록이 장가를 가게 된 것도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었다.
죽염을 굽는 일은 신성한 일에 속하는 모양이다. 해서, 아홉 번 굽는 죽염이건 세 번 굽는 죽염이건 죽염 가마의 불을 사르는 일은 주인의 입장에선 매우 경건한 뜻이 담겨져 있었던 것 같다. 학식 형님의 죽염 가마 점화의 날에도 그랬다. 그중 나도 몇 번을 참석했었다.

그날도 예외 없이 일이십 명의 주인의 지인들이 운집했다. 가까이는 인근 마을과 면에서부터, 멀리는 광주와 심지어 충청도와 서울에서까지 오는 이들이 있었다.
운집한 좌중들 사이엔 아직 시집 장가를 가지 않은 미혼의 남녀들도 끼어있었다. 물론 다록도 그 미혼의 총각 중의 한 사람이었을 거다.

충청도가 고향인 아가씨들, 이 둘은 학식 형님과 직간접의 인연을 따라 왔다고 했다. 다록은 평소엔 과묵하고 다소 쓸쓸해 보이는 인상이나, 아가씨들이나 아줌마들 앞에선 제법 말솜씨를 발휘해서 주목을 끄는 재주가 있었다.

겉보기엔 남루한 행색에 꾸밈이란 게 전혀 없으니 여인들의 눈에 띄기란 쉽잖았을 것이나, 그날 멀리서 온 여인들 중에는 다록의 관심을 끄는 대목이 없잖았던 모양이다.

ⓒ 김자윤


숙기 없는 다록이 뭔가를 표현하고자 할 때는 늘 일단 술부터 들이마신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모처럼 노래방 같은 델 가면 이 친구는 정신없이 술부터 시키고 처음부터 거푸 마셔댔다. 왠 술을 그렇게 급하게 마셔대냐고 물었더니, 이 친구 하는 말, 맨 정신으론 쑥스러워서 노래를 못 부르겠단다.

그러게 그날도 멀리서 원정 내려온 아가씨들 앞에서 기회가 되니 일단 술을 붓기 시작했단다. 마치 사냥 나온 사자 한 마리가 눈에 띄지 않는 풀섶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뭔가 걸리기만 해보라는 심통이었을 까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취기가 거나하게 올라오면 이 친구 상대방에게 슬슬 시비를 붙이기 시작한다.

"대체 왠일로 그 먼 '멍청도'에서 '절라도' 골짜기까지 내려오셨냐"
"아가씨들이 부모들의 허락은 받고 외유를 하는 것이냐"
"니네들이 김수현의 그 유명한 시 한 편이라도 읽어보기는 했느냐"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렇게 이렇게 말했는데 니네들 머리에 이해라도 하는 것이냐" 등등.....


듣기에 따라서는 자존심을 팍팍 쑤셔대는 언사로 상대를 자극한다.
검정 고무신을 찍찍 끌고 다니며, 유행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낡은 추리닝 차림에다 헐렁한 반소매 런닝셔츠를 걸치고 있는 꽤재재한 몰골의 이 사내가 되지도 않는 소리로 도발해오니, 자존심 강하고 성깔 있는 도시 아가씨들이 가만있을 리가 없다.

- 참, 이상한 아저씨네, 뭘 잘못 드셔도 한참 잘못 드셨군요. 그러는 댁은 어느 시인의 시 한 줄이라도 외울 줄 아시유?

잘 걸렸다싶었다.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사내는 사자의 그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채, 무척 여유로운 말투로 뜸을 들인다.


- 사람이 짜잔하게 남의 시를 뭐할라고 외운다요, 자고로 시란 그냥 노래 부르듯 이렇게 당신이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듯 중얼거리면 그걸로 되는 거요, 아, 시가 별것이간디.


이쯤 되면 이미 그네들은 이 늙은 총각의 낚싯밥에 반은 걸려든 샘이다. 그렇다고 다록이 바람둥이 같은 사람이냐, 하면 그렇진 않았다. 다만 술김에 한번 툭툭 건드려보았을 뿐이었겠다. 걸려든 사람들이 문제였다.

ⓒ 김자윤


자세히 보니 하고 있는 몰골은 형편없으나 얼굴 하나는 준수하다. 그리고 사내 몸매도 이만하면 괜찮지 않은가. 남의집살이를 하느라 먹는 게 시원찮아서 그러겠거니 하고 위아래를 다시 한 번 찬찬히 뜯어본다. 잘 입히고 잘 멕여놓으면 훨씬 더 나을 거야. 속으로 주판알을 튕겨보았다.

김 시인은 노동운동을 해왔다고 했다. 입만 떼면 칼 맑스의 자본론이 어떻고 헤겔의 변증법이 어떻고 하니 그 앞에서 평범한 여인네들이 버틸 재간이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저 충청도 아가씨들은 이런 김 시인에게 일말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겉으로만 보면 완전 패가망신한 자의 행색에 불과하나, 자신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이론과 지식의 해박함이라니, 뭔가 반전의 사나이가 아닌가 하고.      

              
그렇게 충청도에서 원정 내려온 노처녀 임옥은 죽염공장에서 일을 도우면서 무상한 세월을 탓하던 노총각 김 시인의 낚싯줄에 걸려들고 말았으니.

이 둘의 연애는 오래 끌 이유가 없었다. 노총각 노처녀 처지에 부모의 허락이랄 것이 딱히 필요 없는지라, 양가의 우호적인 협력하에 급하게 결혼을 서둘렀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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