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가족들과 함께 인천 월미도에 위치한 한국 이민사박물관을 방문했다.
이곳은 2008년, 미주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사박물관이다. 선조들의 이민 여정과 해외에서의 개척자적인 삶을 기리고, 그들의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한 공간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전시물들이 눈길을 사로 잡았다.
특히 고려인의 이주 역사와 재외동포들의 귀국 여정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다가왔다. 이번 방문은 단순히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공감하는 시간이었다.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로
한국인의 러시아 이주는 1864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흉년과 대기근을 피해 두만강을 건넌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연해주, 러시아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인촌을 건설하여 생활하였다. 그 시기의 조선은 고종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섭정할 때이다.
김광훈과 신선욱이 16년간 두만강 일대를 돌아보고 지은 <아국여지도>에 의하면
살기를 꾀한 결과 지금의 마을을 이루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전전하다가 죽어서 골짜기를 메웠다. 지금에 이르도록 뼈가 사막에 노출되어 음산한 날씨와 비 오는 밤이면 아직도 흐느끼는 소리가 메아리 친다.
그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따랐다는 기록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 새겨진 그들의 고통과 인내는 단순한 이민 기록을 넘어 인류애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강제 이주와 고려인의 삶
1937년, 러시아 정부는 연해주에 살던 수십만 명의 조선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소설가 한진(1931~1993)의 소설 <공포>의 한 대목이다.
1937년 가을 소련 연해주의 조선 사람들은 한날한시에 모두 승객이 되었다. 수십만 명이 동시에 기차를 탔다. 살던 집과 살림살이를 그대로 두고 거의 알몸으로 쫒겨 나면서도 누구 하나 안 가겠다고 떼를 쓰는 사람이 없었다. (중략) 차에서 태어나는 애도 있었다. 그것들은 나서 인차(아무튼) 귀신들이 물어갔다. 출생신고도 사망신고도할 필요 없었다. (이하생략)
화물 객차에 실린 채 한 달 동안 끝없는 여정을 떠난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도착했다. 황량한 벌판에 정착해야 했던 그들의 삶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고단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고려인들은 집단농장(콜호스) 건설에 참여하며 생존의 터전을 마련했다.
1905년 조선에서 태어난 김병화는 1914년 러시아로 이주하였다. 1938년 민족주의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이후 북극성 콜호스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농장 안에 도서관, 학교, 마을회관, 사무실, 체육시설 등을 설치하여 주민 생활 편의를 도모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기에는 벼 생산량을 증대했다. 1948년과 1951년에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 같은 노력 영웅들의 이야기는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심은 이들의 용기를 보여준다. 그들이 남긴 말이 가슴에 맺힌다.
"이 땅에서 새로운 조국을 찾으려 했습니다."
1991년 이후 포스트소비에트, 소수민족과 재외동포 사이에서
소련 붕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신분과 처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독립 국가가 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은 자신들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되찾아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고려인들의 방패였던 소련 공민과 공용어 러시아어는 힘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중앙아시아 각 국가에서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과 배척이 심화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이 집단 이주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생활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조국에서의 차별과 배제가 없다고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했다.
재외동포 한인들의 귀향
1945년 해방 이후에도 4만여 명의 고려인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소련 땅에 남아야 했다. 수십 년간 잊힌 그들의 존재는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재조명되었고, 2007년부터 집단적 귀국이 이루어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고향을 떠난 슬픔과 다시 찾은 희망이 교차하고 있었다.
고려인의 작은 터전인 함박마을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인천 연수구 연수동에 위치한 함박마을을 방문했다. 러시아어 간판이 즐비한 독특한 풍경에 고려인의 삶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곳이다.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마을은 특별한 역사를 품고 있다. 한국으로 이주한 고려인들이 정착해 살아가는 곳으로 그들의 삶과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한국식과 중앙아시아식 건축 양식이 섞인 집들이 줄지어 있고 거의 러시아어로 대화를 해 알아들을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우즈베키스탄 제과점이었다. 그곳에서 전통 빵인 '리뾰시카'를 샀다. 쫄깃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옷 가게에 적힌 러시아어를 번역기로 돌려보니 "사랑을 나누세요!" "필요한 사람을 받는다"라고 쓰여 있었다. 환전소도 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외모가 우리와 달라 아주 생소했다. 더 많은 곳을 들러보고 싶었지만 말이 잘 통하지 않아 겁이 났다.
식료품 가게에 들렀다. 그곳에는 화려한 색감의 김치가 눈을 즐겁게 했다. 우즈베키스탄산 와인이 눈에 띄어 몇 병 구매했다. 잠시 가게 주인과 번역기를 이용해 간단한 대화를 나눴다. 한국 생활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일자리가 부족하고 세금과 보험료 부담이 커요."
"그래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아요."
"이 마을에 사는 남자들도 지금 일자리가 없어 안산, 평택, 김포로 일하러 가요."
한국 생활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일자리는 불안정하고 언어 장벽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 정부에 바라는게 있나요?"
"보험료, 임대료, 공과금, 부가세 등이 너무 부담돼요."
"일자리가 없어요, 대출이 어려워요."
"이곳의 거주 조건은 어떻게 되나요?"
"F4(재외동포비자)로 2년마다 계속 연장하면서 살고 있어요."
이런 현실 속에서도 고려인의 삶은 묵묵히 이어지고 있었다. 함박마을은 단지 고려인의 역사만을 담고 있지 않다. 한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다문화 사회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고려인들은 한국 사회에 스며들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들의 삶은 우리가 잊고 있던 연대와 공동체의 가치를 일깨운다.
재외동포의 애환과 조화의 필요성
한국 이민사박물관과 함박마을을 둘러보며, 우리 선조들이 이민자로서 겪었던 고난과 고려인 후손들의 애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다양한 문화와 정체성을 존중하며 조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국내 거주 고려인은 81,150명 정도이다. 인천광역시 남동구 952명, 인천광역시 연수구 7,831명, 안산시 단원구 10,244명, 안산시 상록구 5,249명, 광주광역시 광산구 3,815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함박마을을 비롯한 한국의 고려인 공동체는 다른 언어, 문화권에서 이주한 최초의 집단이다. 우리의 굴곡진 역사와 연결된 가족이다. 이들은 조선의 피와 혼을 이어받은 민족으로서 강제 이주와 소련 해체라는 격동의 역사를 견뎌내고 조국이라 믿었던 이 땅에 돌아왔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삶은 쉽지 않다. 소련 시절에 무조건 러시아어만 쓰게 했던 정책으로 인해 언어장벽과 문화적 격차가 심하다. 경제적 어려움은 여전히 높은 벽으로 남아 있다. 정부는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으로 그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저출산, 인구 감소, 지역 소멸, 노동 절벽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와 지역 사회는 이런 문제들을 함께 고민해야 할 때이다. 그들의 고난과 노력에 대한 존중은 곧 대한민국의 자긍심으로 이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