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입한지 꽤 오래된 바지를 수선집에 맡기기로 했다. 디자인이 뒤처지고, 무릎이 좀 나와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편하기 때문이다. 머릿 속으로 수선 이후의 모양을 생각하면서 나름디자이너라도 된 듯 설레었다. 그런데 수선에 대한 나의 계획을 들은 수선집 사장님은 첫 반응은...
‘이런 바지를 그렇게 고치는게 어딨어요!’
누가 들으면 내가 크게 무언가를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거르지 않고 분출하고 있었다.
‘원하는 대로 다 해 줘도 나중에 딴소리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이 바지도 그렇게 수선해주면 또 늘어났네, 마음에 안 드네 할게 뻔 해!’
어디서 맞고 온 빰인지 모르겠지만 매섭기가 동짓달 한파보다 매섭다.
수선에 필요한 재료가 있었다면 내가 고쳤을텐데, 재료가 없는게 한이 될 정도였다.
마음에 안 들면 그것도 내 책임이니 그냥 고쳐주십사하고 부탁을 드리고 수선비를 물어보니 금액 또한 터무니 없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감정 소비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일터로 돌아와서 ‘그냥 찾아와버려! 이렇게까지 고쳐서 입어야할까?’ 몇 번이나 고민을 하는 나를 발견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근육 이완 훈련도 하면서 문제와 나를 구분하고, 내 문제와 타인의 문제를 구분하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드디어 옷을 찾으러 갔다.
어제의 역정은 없고, 친절하기 이를데 없는 사장님이 바지를 탁탁 털어 건네면서 ‘이렇게 고쳐도 이쁘네요’ 한다.
혼자 끌탕을 하며 옷을 찾을지 말지를 고민했던 방금 전까지의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 때문이 아님에도 나의 어떤 점이 사장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자책안에 갇혀있던 내 안의 작은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렇게 감정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기어이 탓을 할 누군가를 찾는 행위를 ‘투사’라고 한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할 힘이 없는 사람일수록 남 탓을 하는 경우가 많다.
정선씨 아버지는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세상 둘도 없는 한량이다. 집안에 쌀 떨어지는건 몰라도 친구 주머니에 돈 떨어진 건 기가막히게 알아채서 술도, 밥도, 빚도, 다 짊어지고 가족까지 힘들게 하는 아버지 때문에 정선씨 어머니는 하루도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었다.
세탁소로, 식당으로 가리지 않고 일을 해서 한 푼을 벌어놓으면 두 푼을 갖다쓰는 아버지 때문에 가정형편이 항상 어려웠다. 게다가 아버지는 밖에서는 호인이지만 집에서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에 권위주의적이어서 말도, 생각도, 행동도 거칠다 못 해 폭력적일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아버지를 본격적으로 미워한건 중학교때부터였다. 아버지가 물건을 집어던지면 같이 집어 던졌고, 아버지가 사치를 하면 같이 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아버지처럼 일 주일에 5일은 기본 술을 마시고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 술 기운을 빌어 아버지에게 ‘나가 죽으라’는 말도 거침없이 했다.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꿈꿨고, 잘 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지만 정선씨의 삶은 어느새 그 옛날의 아버지처럼 불편하고, 어렵고, 힘든 대상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그런 정신씨에 한 마디라도 할라치렴 불같이 화를 내면서 “다 아버지때문이야!!”라며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누군 때문이라는 ‘투사’ 방어기제는 누구를 막론하고 가장 어린시절부터 사용해왔고 어른이 된 지금도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아내 때문에 화를 내고, 자식 때문에 일이 꼬이고, 친구 때문에 힘들고...
그들의 말과 행동, 태도가 거칠고, 무례하고, 때로는 분노를 일으키게 하지만 그들의 감정은 그들의 것임을 인정해야한다. 원인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 수 없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장동료 때문에 화가 나서 술을 마시고 음주운전을 하면 원인은 직장동료이지만 결과적으로 음주운전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내 몫이 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가난한 부모를 만난건 내 책임이 아니지만 그 부모를 원망하면서 도박을 했다면 도박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 하든 가난했던 부모, 직장동료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그들의 행동과 태도에는 당사자조차 모르는 아픔과 상처, 초라함과 억울함, 분노와 서러움이 있다. 그것들은 지금의 ‘나’도 지금의 ‘타인’도 해결해 줄 수가 없다.
스스로 자존감이 낮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에서 배제되거나, 모임에 초대받지 못하거나, 성적이 낮거나,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죽고싶다고 표현한다. 자존감은 성과가 아니다. 자존감은 나의 존재자체에 대한 긍정적인 경험이다. 내 피부, 내 근육, 내 감정, 내 생각 이 모든 것의 주인이 ‘나’이며 그럼에도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 말해주는 것이 진정한 자존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