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 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ㅡ 김수영, 「풀」ㅡ
바람에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풀처럼, 수많은 이름 없는 민초들이 오늘도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간다. 그들은 약자였고, 피해자였으며, 침묵을 강요당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이상하다. 분명 상처받은 쪽은 피해자인데, 도리어 가해자가 더 큰소리친다.
억울한 이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세상은 그들에게 묻는다.
“왜 이제 와서 말하느냐?”
“그때는 왜 침묵했느냐?”
그러나 누구도 묻지 않는다. 왜 그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진실보다 소리의 크기를 듣기 시작했다. 뻔뻔한 얼굴과 단호한 말투가 마치 ‘정의’인 양 착각하고, 조심스럽고 떨리는 고백은 ‘의심’이라는 틀에 가둬버렸다. 그렇게 피해자는 다시 피해자가 되고, 가해자는 다시 세상의 중심에 선다.
정의는 원래 약자의 편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정의는 눈치를 보고, 권력과 여론에 휘둘리며 방향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가 고개를 돌리는 사이, 가해자는 얼굴을 바꾸고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든다. 피해자는 상처를 품은 채 조용히 사라진다.
“세상은 공정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과연 우리는 진실의 무게를 제대로 헤아리고 있는가? 침묵 속에 묻힌 외침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김수영의 시 속 풀처럼 민초들은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선다. 그러나 매번 다시 일어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는 그들의 이야기에 세상이 정말로 귀 기울여야 할 때다.
진실은 크지 않다. 다만, 진심으로 들으려는 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 순간부터, 비로소 세상은 제대로 숨 쉬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진정한 자유란 정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라고 말한 알베르 카뮈의 금언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의 없는 자유는 방종이고, 침묵을 강요받는 진실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거꾸로 선 정의를 바로 세우고, 침묵당한 진실에게 생명을 돌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국민에게 평온한 일상을 돌려주는 것이며, 국민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처방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