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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 9대로 시작, 여수의 '엘 시스테마'

여수에서 13년째 아이들에게 악기 가르쳐 탄생한 '열린챔버 오케스트라' 이야기

  • 입력 2016.02.17 16:57
  • 수정 2016.03.03 14:56
  • 기자명 오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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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안토니오 아브레우가 선정됐다. 안토니오 아브레우는 베네수엘라의 음악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사람이다. 그는 '엘 시스테마'라는 재단을 만들어 오케스트라를 조직하고 가난한 청소년들이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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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0년 국내 개봉한 영화 <기적의 오케스트라 - 엘 시스테마> 스틸컷.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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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준으로 연인원 120만 명에 음악 교육을 제공했고, 베네수엘라 전역에서 37만 명의 청소년들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도와준 공로를 인정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총과 마약에 노출된 아이들에게 '엘 시스테마'가 외친 구호는 "총 대신 바이올린을! 마약 대신 클라리넷을!"이었다.

당시 성과는 대단했고, 악기를 통해 빈민 청소년들에게 바른 심성을 심어주는 세계적인 교육 모델로 오늘날도 칭송받고 있다. 서울평화상 수상 강연에서 아브레우는 '엘 시스테마'의 목적을 이렇게 말했다.

"빈곤은 '나누지 못해서' 발생한다. 예술을 누리는 것은 모두의 권리다. 공정한 사회와 공정한 문화는 함께 가야 한다. 음악 교육을 통해서 현실 그 이상의 꿈을 꿀 수 있다. 이는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이다. '확산되지 못하는 좋은 일'은 아무 소용이 없다."

여수의 '달동네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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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시 광무동 <열린지역아동센터> 교회이기도 한 이 건물은 1층은 지역아동센터를 겸한 악기별 연습실이고, 2층은 예배당을 겸한 전체 합주단 연습실이다. 비탈진 언덕 골목에 있어 자동차로는 바로 갈 수가 없다. 이곳 주변의 상당수 집들도 마찬가지다.
ⓒ 오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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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달동네'인 광무동의 목사 한 분이 '엘 시스테마'와 유사한 악기를 통한 새로운 방식의 동네 교육을 한창 적용 중이다. 광무동 비탈진 언덕에 자리한 '열린교회' 정한수(59) 목사.

이 동네에서는 그를 '여수의 아브레우'라고 부른다. 아브레우가 했던 것처럼 13년 전부터 달동네 골목의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쳐 왔다. 아이들은 이제 어엿한 오케스트라로 성장해서 제11회 정기 연주회를 앞두고 있다.

"이 동네에 좀 어려운 가정이 많아요. 1991년도에 제가 목회하러 일부러 여기로 들어왔습니다.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이 학원에도 못 가고 약간의 욕설로, 또 약간의 폭력으로, 골목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죠.

그래서 그 아이들에게 공부도 가르쳐주는 무료 공부방을 처음에 열었습니다. '지역아동센터' 제도가 생겨나면서 자연스럽게 센터로 전환됐습니다. 그러면서 악기 공부는 2003년도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는 '엘 시스테마'도 몰랐고, 나중에 다큐멘터리나 책을 보고 알게 됐죠." 

악기 수업에는 우선 만만찮은 비용이 들어간다. 악기 구입에, 가르치려면 전문가의 지도 또한 필수다. 초창기에 이를 실천에 옮기기가 결코 쉬운 건 아니었다. 열린지역아동센터 센터장을 맡은 정 목사의 부인 이인애씨 얘기다.

"지역아동센터는 체험학습을 하게 됩니다. 40명이었는데 1회 참가하면 만 원씩 총 40만 원, 10회에 400만 원. 쌓이니까 적은 예산이 아닌 거예요. 더 효율적인 방법이 없을까? 고민 중에 제가 피아노 학원과 큰 교회 성가대 지휘 경험이 있었어요. 또 주변에 '크리스천 앙상블'이란 클래식 악단이 있었는데 그분들 만나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센터에서 꾸준히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시스템을 갖추자고 해서 시작한 겁니다."

악기 부족으로 교대로 연주 배우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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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첼리스트 정한수 목사 정한수 목사는 전혀 모르던 첼로를 새로 배워야 했다. 이젠 가르치기도 한다. 어려운 점이 있다. 자신이 보는 악보를 일반 악보보다 10배 정도 크게 다시 그려야 한다는 점이다. 악보도 본인이 그린다고 한다. 연주 중에는 여러 장의 악보를 자주 넘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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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바이올린 5대, 첼로 2대, 비올라 2대를 구입해서 그 악기를 아이들이 교대로 사용하면서 수업을 받게 했다. 그런데 초빙 강사에게 충분하지 못한 대우는 항상 걸림돌이었다. 선생님들을 수소문하여 부탁해서 가르쳤는데, 지속해서 교육하기는 어려웠다. 거기다 악기 숫자가 적어 일부만 수업을 받는 것도 한계였다.

그래서 구체적인 계획서를 작성하여 도울 수 있는 재단 관계자를 만나고 여기저기 제안서를 냈다. 다행히 이를 알아주는 기업의 재단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어, 선생님도 더 초빙하고 악기 수도 늘렸다. 아울러 정 목사 부부도 함께 배우기로 했다. 정 목사는 첼로를, 이인애 센터장은 비올라를 배웠다. 악기가 탐나고, 취미가 고상할 것 같아서 배운 것은 아니다.

배워두면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또 하나 배울 때 솔선수범하는 모습이었다. 문제는 지속가능한 교육시스템이었다. 정 목사는 수업 전에 미리 와서 보면대를 펼쳐놓고 튜닝을 하면서 수업 준비 분위기를 잡아 나갔다. 교육은 직접 보여주는 게 최고라지 않던가? 효과 만점이었다. 

"일단 저는 첼로라는 악기를 처음 만져봤습니다. 현악기 자체를 전혀 모릅니다. 죽기 살기로 배웠죠. 만약 제가 배우지 않았으면, 잘하라고 아이들을 닦달했을 겁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이들을 많이 그만두게 만들었을 겁니다. 다행히 제가 어려운 줄 아니까 어르고 달래면서 아이들이 도중에 포기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였죠."

'이가 없을 땐 잇몸으로' 움직인 합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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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당에서 연습하는 합주단 여수챔버오케스트라(지휘자 박건욱)는 전국의 5천여 개 지역아동센터 조직인 '전국지역아동센터 협의회 중앙지원단'의 2016~2017년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 오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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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별로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합주단이 조직되었다. '열린 합주단'이 창설돼 정 목사가 단장을, 이 센터장이 단무장을 맡았다. '열린챔버 오케스트라'가 중심이 되고, 초·중등생들 초보자 위주의 '키즈 오케스트라'를 꾸렸다. 그리고 교사와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위드어즈 앙상블'을 조직했다.

자리를 잡아가면서 지휘자가 필요했다. 선생님도 더 필요하게 되었다. 결국 더 많은 도움을 요청해야만 했다. 모든 게 순조로울 수는 없었다. 어렵게 초빙한 지휘자 선생님이 오케스트라를 새로 창단한 다른 학교의 지휘자로 옮기면 또 공백이 생기고, 누군가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악기를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공백기가 생기기 일쑤였다. 비올라를 배우던 이 센터장은 보조자로서 지휘를 익혔다. 이가 없을 때는 잇몸으로 합주단이 움직였다.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둔 대비가 빛을 발했다. 지휘자 공백기에 오히려 장점도 있었다. 수시로 보조 지휘자로서 합주단을 이끌었던 이인애 단무장은 무모함이 오히려 발전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제가 임시 지휘를 맡을 때는 아마추어니까 어디든 초청하면 응했습니다. 지휘자 선생님들은 프로다 보니까 통상 초청은 마다했거든요. 아이들 수준도 높지 않으니까요. 근데 저는 지휘자 공백기 때 제가 무모하게 여기저기 다 응한 거예요. 사회단체 모임, 노인시설, 복지기관, 기업체, 관공서 초청... 시간 되면 다 나갔어요.

전 목적이 있었죠. 우선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악기 공부를 한다는 걸 홍보하고자 했고요. 아이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겁니다. 연주 실력도 늘고, 무대 경험도 쌓고, 굉장히 도움이 됐죠. '무식해서 용감했던 사례'라고 봅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별" 마침내 대학 졸업생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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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에토벤 현악 4중주 작품번호 1번을 연습중인 선배 단원들. 왼쪽부터 바이올린1 박지수(대학 졸업반), 바이올린2 정새하늘(대학 졸업반), 비올라 조우리(대학 재학 중), 첼로 황주영(대학 입학 예정)의 모습.
ⓒ 오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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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곳 출신 4명이 여기서 배운 악기를 대학에서 전공하고 있다. 이들은 주말마다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오는 19일 여수 예울마루에서 열릴 '열린챔버 오케스트라' 제11회 정기 연주회(지휘 박건욱, 피아노 김혜진)에도 전공학생들이 출연한다. 두 명은 첫 졸업생이 된다. 정 목사는 앞으로도 그렇고, 시작할 때도 기본 방향은 '꿈과 희망'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 정기 연주회 주제를 '별, 훨훨 날다'로 정했다.

"누구 자식이건, 어디 살건, 중요한 건 꿈과 희망을 품는 겁니다. 우리 합주단 아이들은 누구나 스타(별)입니다. 꿈을 가진 별들이죠. 가정은 부유하진 않지만 열정으로 살아왔거든요. 얼굴들이 다 밝아요. 악기가 매개가 된 거죠. 처음 시작했던 아이들이 올해 처음으로 대학을 졸업하게 됩니다. 그들이 사회에 나와서 훨훨 날아갔으면 하는 의미를 담아 이번 연주회 주제를 '별, 훨훨 날다'로 정한 겁니다."

그런가 하면 이번에 첼로를 연주하는 황주영(여천고 졸업)군은 한국해양대학교에 입학한다. '목표가 있어서' 특별히 선택한 학교다. 첼로 전공은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꿈을 접었지만, 첼로 연주는 계속하려고 한다. 황군은 뜻한 바가 있어 '해양행정가'라는 확실한 목표를 정했다.

"매번 방학 때마다 2박 3일간 밥 먹고 연주만 하는 음악캠프가 있었거든요. 그 추억이 커요. 친구들하고 여기서 악기와 씨름하던 기억도 있고요. 여기 아니면 첼로를 배울 수 없었겠죠. 무료로 배우니까 열심히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습니다. 첼로라는 특별한 악기를 연주한다는 점, 또 무대에 서는 데서 오는 자부심도 크죠.

그런 걸 나중에 여기 후배들한테 되돌려 주려고 해요. 제가 혜택을 입었잖아요? 여수에 해양수산 관련 기관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한국해양대학교 간 겁니다. 그러면 졸업 후 그런 기관이 있는 여수에서 직장생활 하면서 재능기부로 이곳 아이들에게 첼로를 가르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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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챔버오케스트라 제 11회 정기연주회 티켓 2005년부터 매년 정기연주회를 갖는다. 각급 학교 학생들이 모여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2월 일정이 최적이라고 한다. 정기연주회는 2월 19일(금) 오후 7시, 여수 예울마루 소극장에서 열린다. 무료 입장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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