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인터뷰] 출판기념회 갖는 로버트 김

우리사회, “배려없고, 지나치게 이기주의 만연... 걱정돼”

  • 입력 2016.09.27 23:02
  • 수정 2016.09.29 17:40
  • 기자명 오병종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로버트 김의 편지> ... 한국에 대한 노파심 표현
메일로 조국을 향해 425회 편지 보내, 그중 80여편 묶어
조국을 위해 스스로 한 일, 조국 원망 안해
한.미간의 문제 아닌  남북분단이 가져다 준 부산물
동생과 함께 아버지(김상영)의  ‘선공후사’ 가르침 받아 
이제 8명 손주의 할아버지... 건강하게 사람답게 살고파

‘로버트 김 스파이 사건’의 주인공인 재미동포 로버트 김(왼쪽·76·한국명 김채곤)씨가 부인 장명희씨와 지난 9일 한국을 방문했다.

출판기념회차 지난 9일 귀국한 ‘로버트 김’이 여수에 왔다. 28일(수) 오후 4시 여수 문수동 성결교회에서 ‘로버트 김의 편지’ 출판 기념회를 갖는다. 서울에서 지난 21일 출판기념회를 갖는데 이어 고향 여수에서 갖는 기념식이다.

로버트 김 저서 <로버트 김의 편지> 출판기념회
28일(수) 오후 4시.  여수성결교회(문수동). 
참석자에게 책을 무료로 증정한다.
로버트 김 저서 <로버트 김의 편지>. 28일 여수 성결교회에서 오후 4시에 출판기념회 개최

고향을 찾은 로버트김에게 기자는 인터뷰를 이메일로 요청했다. 그는 이번에 펴낸 책과 이른바 ‘스파이 사건’에 대해서도 자세히 들려 주었다.  27일 보내온 이메일 인터뷰 답변에서 그는 이국땅에서 보고 느낀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도 가감없는 의견을 말해 주었다. 그의 인터뷰를 싣는다.

 

문 ; 이번 귀국은 주목적이 책 출판 때문인가요?

로버트 김 ; 그렇습니다. 지난 8년간 매주 <로버트 김의 편지>라는 글을 한국에 있는 저의 싸이트에 연재했는데 독자들로부터 많은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 편지가 그냥 없어지는 글이 되기보다는 책으로 기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번에 출간하게 된 것입니다.

 

문 ; 책 내용이 궁금합니다. 또 메일을 쓰게 된 동기와 책으로 펴내게 된 사정들도 듣고 싶습니다.

로버트 김 ; 책 내용은 다양한 장르였습니다. 동기는 저를 도와주신 후원 회장이셨던 이웅진 대표가 출소 후 저의 무료를 달랠겸 글을 써보라고 하면서 그분 회사의 컴퓨터와 직원을 후원 해 주셨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한국의 신문, TV를 보면서 한국을 더 알게 되었는데 모국인 한국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에 부적절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 국민들에게 조언을 해야 겠다고 마음 먹고 글을 계속 쓰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쓴 회수가 425회였는데 이 중에 80여편을 골라 이번 책으로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작년에 출간하려고 했으나 기왕이면 로버트 김 사건이 일어 난 20주년을 기해서 하려고 마음을 정하고 후원자를 물색했는데 금년 한화그룹의 김승연회장님이 저의 소식을 듣고 기꺼히 후원하시겠다고 해서 책이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문 ; 서울에서 21일 출판기념회 잘끝났죠? 특별한 분들이 왔었나요?

로버트 김 ; 서울에서 지난 주(9/21)에 열렸는데 많은 분들이 참석 해 주셨습니다. 저의 학교 동기들 그리고 저의 지인들, 동생인 김성곤 전의원의 학교동기들과 정치지인들께서 참석 해 주셨습니다. 책을 그분들에게도 드렸는데 200권 넘게 배부되었습니다. 물론 백동일 전 대령님께서도 참석하셨는데 저와 그분간의 교감이 남 달랐습니다.

문 ; 백 대령은 이른바 ‘스파이 사건’의 해당자죠? 백 대령 얘길 하면 자연스럽게 사건얘기가 나오겠는데요, 백 대령 얘길 좀 해주시겠어요?

로버트 김 ; 네, 백대령은 로버트 김의 사건(1996년)이 있기 전까지 주미대사관의 해군 무관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 때 한국에서 오신 해군 정보작전사령관 일행이 저가 일하는 곳으로 ‘한미 해군 정보교환 연례행사’를 하기 위해서 오시게 되었는데 그 때 처음 백 대령을 만났습니다.

그 때 저는 이 행사를 위해 도와달라는 저의 상관의 부탁으로 이 회의에 참석 했는데요, 그 때 저가 알고 있는 ‘북한에 관한 이러 저러한 정보를 알고 있느냐’하고 일행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이 알아야할 정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한, 그리고 특급비밀이 아닌 것을 저의 컴퓨터에서 골라 우편으로 백 대령에게 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미국의 ‘국방기밀 누설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그는  미국 해군정보국(ONI)에서 정보분석가로 근무중이었다. )

그리하여 저는 1996년 9월 24일에 체포되어 바로 구치소에 갇힌 후 1년 후, 유죄판결을 받고 9년 수감형과 3년의 보호관찰형을 선고 받고 교도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교도소 생활을 아무 사고 없이 했다고 15%를 감형받아 7년 10개월의 교도소 생활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3년의 ‘보호관찰’이라는 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미국사법책을 가까이 하면서 보호관찰기간을 줄일 수 있는 것을 발견하고 변호사 없이 이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보호관찰 1년을 살고 난 후 바로 준비한 보호관찰 단축 상소를 했는데, 법원에서 이를 받아들여 보호관찰기간을 1년으로 단축 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형을 살면서 승소한 유일한 승리였습니다.

로버트 김 (김채곤, 76)

문 ; 긴 세월 감옥에서. 또 보호관찰까지... 미국서 살면서 미국인들이 당시 사건에 대해 물으면, 선생님은 어떻게 답해 주나요?

로버트 김 : 미국의 저의 이웃들도 저가 이렇게 놀라운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 놀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살던 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문 ; 실형 이후 미국사회에서 생활이 어려웠으리라고 봅니다. 특히 연금도 감액되고, 조국을 위하려다 그렇게 희생했다는 점에서 한국 사람으로서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로버트 김 ; 저는 저의 연금이 완전히 박탈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명예퇴직을 했었다면 매우 풍족한 저의 미래가 보장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저와 같은 시기에 일하던 사람들이 지금 퇴직을 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거든요. 그동안 저희들은 그저 숨만 쉬고 산 셈입니다. 제가 받는 연금으로는 고국방문도 어렵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저 때문에 미안해 할 것은 없습니다. 당시의 일은 국가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제가 자발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미간의 희생양이 아니고, 남북한의 희생양입니다.  우리나라가 분단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한반도 분단의 부산물입니다.

 

문;  안타깝습니다. 한 개인의 인생까지, 남북분단이 깊숙이 관여한 셈이 되었군요. 미국에서 요사이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로버트 김 ;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제가 따로 즐길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건강을 위해서 걷는 운동을 하고 매주 교회에 나가 좋은 말씀을 듣고 위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텃밭도 가꾸고 정원 가꾸기와 집수리등 바쁘게 지냅니다. 저는 1남2녀의 자녀를 두고 있는데 막내가 42살입니다. 이 세 아이들로부터 8명의 손주를 본 행복한 아버지이면서 할아버지입니다.

문 : 앞으로 계획을 물어봐도 될까요?

로버트 김 ; 앞으로 저의 계획은 건강하게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모두 미국에서 낳고 자랐고 미국에서 가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한국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저와 집사람도 노후에 아이들과 함께는 살지 못해도 가까운 미국내에서 사는 것이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한국은 물가가 너무 비싸기 때문에 저희는 한국으로의 귀화를 꿈도 못 꿉니다.

문 ; 그렇군요. 고향 여수얘기를 해볼까요? 자주 오고가시는데 고향 여수에 오시면 달라진 점이나 특별히 느낀 점이 있으신가요 ?

로버트 김 ; 여수는 작년에도 다녀 갔습니다. 달라진 점은 여수가 겉으로는 많이 발전 한 것 같으나 내면적으로 후퇴되고 있다는 느낌이 옵니다. 시민들이 남을 위한 배려가 보이지 않고 자기만 아는 즉 ‘이기주의’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꼭 여수만의 문제가 아니고 대한민국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는 선진국으로의 진입은 요원해 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이런 노파심이 이번에 출간된 책 <로버트 김의 편지>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문 ; 걱정입니다. 겉으로 발전했으나, "내면적으론 후퇴다"는 말이 와 닿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향분들께 인사 한마디 해주십시오.

로버트 김 ; 여수는 저희 선조들이 가정을 이룬 지역입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여수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저의 아버지 김상영 옹은 8대 9대 국회의원으로서 일하시면서 1960년대 70년대에 여수에 여천산업단지, 비행장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고 들었습니다. 또 그 때 돌산대교가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전기가 들어가지 않던 여수의 많은 낙후 도서에 전기가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 후 저의 동생이 16년 동안 여수의 국회의원으로 일 하면서 엑스포가 여수에서 열렸고 그때 KTX가 들어오면서 여수 시민들이 서울을 하루에 다녀 올 수 있는 생활환경의 길을 열었습니다. 또 이순신 대교 건설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선공후사’의 철학 때문에 이런 것을 자랑하지 않고 묵묵히 일했습니다. 이러한 가족력이 있는 저 로버트 김은 국가를 위해 했던 일로 여러 해 동안 수모를 당했어도 국가를 원망하지 않고 내 자신이 참고 견디고 있습니다.

저의 가족들은 진심으로 여수를 사랑하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이러한 여수를 우리는 영원히 잊지 않고 사랑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여수넷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