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김두봉 청년 6일간의 조계산 입산체험④

제6일 탈출

  • 입력 2018.08.06 19:55
  • 기자명 김배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날이 완전히 밝고 입산 6일째가 시작되었다.

보리밥 한 사발씩을 먹고 나서 국골 웃절터를 지나 장박골 등 능선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송광사 쪽에서 운구재를 향해 군인들 같은 토벌대들이 가물가물 개미들처럼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지금 오르고 있는 곳은 국골에서 멀지마는 그들이 어느 곳으로 싸고돌지 몰라 같이 올라간 사람들과 의논을 했다. 거기에는 학규와 아래배골 순용이 그리고 팔에 총을 맞아 싸매고 있는 덕동, 보근이 네 사람이 있었다.

“만약 저 아래 있다가 환자들이 악이나 써서 발각이 되면 독안에 든 쥐처럼 갇혀가지고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인데 무슨 수를 써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물어 보았다.

학규가 맞소, 하니까 옆에서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고 하기에 미리 마음먹고 있던대로 낮에는 다른 곳으로 피해 숨어 있다가 어두워질 때 다시 모이면 되지 않겠냐고 작전을 내놓자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실지로 환자 터 가까이 있다가는 잡혀 죽기 전에 정신부터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당시의 벌교토벌대 병력으로는 국골이나 홍골같은, 숲이 우거지고 험난한 중심에 있는 큰 골짜기는 대대적인 작전이 아니면 들어서는 것을 피하고 시야가 확보된 주능선을 따라 순찰을 하다가 장박골 쪽이나 비교적 안전한 골짜기를 하나씩 수색하여 내려가는 것이 일상의 작전이었다.

다시 국골(군당)로 내려가 우리는, 나 혼자서 지도자에게 다가가 날마다 군인들이 포위를 하여 올라오고 있으니 이대로 있다가는 환자들 소리에 언제 발각될지 모르므로 갇혀가지고 가도오도 못하고 전멸을 하게 생겼으니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하고 도리어 물었다. 그래서 의논을 한대로 성한 사람들만 몇 사람씩 조를 짜서 다른 골짜기로 가서 숨어 있다가 날이 어두워지고 토벌대가 모두 내려가고 나면 다시 모이자고 했더니 그렇게 하자고 하여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까 의논했던 네 사람이 한 조가 되어 굴맥이 방향으로 두 능선을 넘어와 천자암 뒤편 742고지가 잘 보이는 곳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토벌대 주능선. 우로부터 조계봉-742고지-효령봉(연산봉)

 

점심때가 지났을 때 한 무더기의 군인들이 올라왔는데 아까 보았던 수보다 적어 보였다.

군인들은 742고지에서 잠시 쉬고 나서 굴맥이(송광굴목재)를 향해 내려오더니 우리들이 있는 뒤쪽과 점점 가까워지면서 모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잔뜩 긴장이 되었으나 그동안 보고 들어서인지 함께 모여 있으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 혼자 보초를 서고 있을 터이니 각자 흩어져 숨어 있다가 신호를 하면 다시 이 자리로 모이자,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믿는 것은 우리들이 숨어 있는 위치가 토벌대들이 지나다니는 길과 멀지는 않아도 높은 효령봉으로 올라가는 국골 방향의 비탈이라 그쪽으로는 수색을 하여 내려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엎드려 있으니 굴맥이 쪽 피아골 뒤 봉우리 너머로 걸어서 효령봉(연산봉)을 향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장박골을 수색하려는가보다 짐작을 하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삼십분 가까이 엎드려있었으나 효령봉에 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낌새를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들어 살금살금 기어가 작은 능선 하나를 타고 올라 효령봉과 마른개울 안통(보리밥집 방향)이 보이는 곳에서 살펴보니 마른개울을 훑어서 내려갔는지 저 멀리 골짜기 아래서 소리가 들렸다.

해가 서쪽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맴산골 입구까지 내려갔다가 송광사로 다시 넘어가기에는 시간이 없어 보여 장안으로 내려 가겠구나하는 계산이 섰으므로 다시 보초 섰던 곳으로 내려와 모두를 불러 모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대장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해가 지기를 기다려 환자터로 돌아가야 할 차례였다.

그러나 사실은 아침에 장박골 등에 올라가면서 이런 꾀를 낼 때 미리 빠져나갈 궁리를 했었다. 그래서 세 사람에게 내 맘을 털어 놓았다.

“어이! 나 죽었으먼 죽었지 더 이상 산에 못 있겠네.”

“자네들은 어쩔란가?”

“나는 여그서 집으로 갈 텐께 알아서들 허소”

하고 똑 부러지게 말을 했더니 학규가 나서서,

“성님 나도 진작부터 그 생각을 하고 있었소”

하니 모두가 그러자고 하여 마음이 놓였다.

만약에 같이 못가겠다고 하면 혼자 망을 보러 올라가더니 기다려도 안와서 할 수 없이 우리끼리만 왔다고 그러라고 부탁을 하고 혼자라도 도망칠 각오를 하고 있었다.

 

토벌대 주능선. 우로부터 조계봉-742고지-효령봉(연산봉)

결정이 되었으므로 이 골짜기를 빨리 벗어나자고 하여 정신없이 산비탈을 타고 돌며 피아골로 내리 쏟았다. 굴맥이로 올라가는 길(현재의 등산로)로 나가니까 걸친바위 위가 나왔다.

이쪽저쪽 볼 것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너편 골짜기로 기다시피 해서 올라갔다.

건너오기 전에는 해가 보였는데 골짜기로 들어와 버리니 어둑해서 오히려 좋았다.

땀을 줄줄 흘리며 몬당으로 올라가니까 영친바구(얹힌 바위)가 나왔다.

이곳은 천자암 뒤 봉우리인 742고지에서 운구재로 뻗어 내린 줄기로서 여기서부터는 만날 나무하러 다니는 동네 뒷길이었다. 아는 곳에 도착해니 마음이 턱 놓였다.

그래도 혹시 사람들이 있지나 않은가 하여 귀를 세워 다시 한 번 들어보았다.

그것은 도망을 가는 중이라 군인이나 산사람 어느 쪽을 만나도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세 사람에게 만약에 토벌대한테 걸리면 자수를 하려고 도망가는 중이라 하고 반란군들을 만나면 저녁에 먹을 것을 털로 간다고 내가 말할 것이니 그렇다고만 하라 그렇게 말하고 마당재로 돌아 처음 들어 왔던 둔배로 마구 굴러가듯 뛰어 내려갔다.

둔배에 도착하니 해거름 판이 되었는데 여기서부터는 우리 동네나 마찬가지였다.

조심조심 목넘어로 돌아오니 개울가에 빨갛게 익은 뻘똥이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먹을 것을 보니 반가워서 일제히 달라붙어 높은 곳에 있는 것까지 가지를 휘어가며 모조리 훑어서 따먹고 나서 모개나무거리에 도착하니 완전히 어둑어둑해졌다.

그토록 집에 가고 싶어서 애를 태웠으나 막상 마을 뒤에 도착을 하고 보니 불안한 마음이 되어, 누구 보는 사람이 없는가 하고 네 사람 모두가 머뭇거리는 것이 확연하였다.

 

오륙일 사이에 나를 잡아들이라고 소문이 나서 우리 집 앞을 지키고 있을 것만 같기도 하고 어무니가 미리 귀띔을 해주려고 동네 밖 어디에 숨어 있을 것만 같기도 하고 다 와가지고 선뜻 발이 잘 떨어지지를 안았다.

그래도 그렇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서 힘을 내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앉아 있어 봐야 누가 모시러 올 사람도 없으니 각자 동네로 내려가세."

네 사람이 다 한집으로 갈 수도 없고 한꺼번에 우르르 내려가도 안 되니 덕동 사람은 아래 똠(동네)으로 붙든지 어디로 돌든지 알아서 하고 순용이는 바로 아래가 집이니까 그리 가면 될 것이고 나하고 학규 둘이는 알아서 갈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모른다고 하자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순용이와 보근이가 보이지 않자 둘이도 걸음을 옮겼다.

동네가 바로 아래지만 큰길로 내려오지 못하고 산비탈로 돌아 한림등을 내려오는데 말없이 따라오던 학규가 입을 열었다.

“성님 우리 저 대밭에 가서 굴을 파고 살지 않을라요?”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속을 뒤집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이~! 호랑이가 물어갈, 니 혼자 가서 살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라”.

하고 나도 몰래 순간적으로 내질러 버렸다.

사실은 나도 순사들이 두려워 도로 산으로 돌아가 버릴까하는 생각을 수 없이 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말을 듣자 왈칵 역정이 나면서 그래가지고 어쩔 건데 하는 생각과 함께 반사적으로 튀어 나온 말이었다.

 

살금살금 어둠속을 기듯이 골목까지 들어온 두 사람은 각자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아직 초저녁이었지만 불을 켜지 않아 밤중처럼 캄캄한 집안으로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들어가 뒷방으로 가서 그대로 누워 버렸다.

아무도 모르겠지, 하고 누워 있는데 잠시 후에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는데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가 있었다.

어머니가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 왔다.

“불 쓰(켜)지 마시오!”

그러나 초꼬지에 불을 붙이면서 지금은 괜찮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으나 어머니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밥이나 묵고 자그라.”

내가 올 것을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위아래로 한 그릇 담은 밥을 금방 가져왔다.

어머니는 허겁지겁 퍼넣고 있는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있더니 밥그릇과 반찬이 모두 비어버리자 개다리 상을 들고 나가 물을 한 보시기 떠들고 오더니 언제 보았는지 너덜너덜 감겨 있는 다리를 보고 코를 훌쩍거렸다.

“괜찮소! 자고나서 약이나 좀 보(바)를라요.”

어머니가 나가자마자 불을 끄고 언제 들었는지 모르게 잠이 들어 이틀간을 꼼짝없이 틀어박혀 있는 것으로 상이읍 마을의 김두봉 청년이 목숨을 놓고 지낸 10년보다 더 지긋지긋 했던 6일간의 조계산 입산 생활은 끝을 맺었다.

 

 

하산 3일째 여수로 피신

 

두문불출하고 처박혀 있은 지 3일째가 되던 날에 아버지가 문을 열고 아까징끼(머큐륨)를 손에 들고 들어 왔다. 이미 헝겊을 풀어 버린 발은 전체가 부어 있었다.

온 발에다 벌겋게 발라 주고서는, 너 여기 있어서는 안 되겠다 여수로 가서 살다가 괜찮다 싶어 연락하면 오니라, 하면서 내일이라도 당장 떠나라고 하였다.

여수 삼일면에 손아래 여동생이 살고 있었으므로 그리 피해 있으라는 것이었다.

아래 동네에 있는 지서에서 내가 산에 들어갔다는 것을 아직 모른다 해도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일 텐데 이러고 있다가 잡히는 날에는 살아남지 못할 것은 빤하므로 불안하게 숨어있지 말고 아예 미리서 피하라는 말이었다.

이때 출장소장이 정철모라는 경사였는데 빨갱이 하고 연관된 일이라면 물 한 방울만 튀어갔다 해도 따져볼 생각도 말고 줄줄이 죽었다고 생각을 해야 될 정도로 독한 사람이라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도 많아 모두가 벌벌 떨었으므로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여수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발도 아파서 혼자서는 찾아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몇 차례 다녀온 어머니 보고 좀 데려다 달라 그래가지고 다음날 아침 떠나기로 하였다.

그러잖아도 동네사람들 눈을 피해 일찍 떠나려고 하는데, 내일 아침에 송광사로 나무를 치러 간다고 집집마다 한사람씩 모이라고 이장이 웨고 다녔다.

보통 나무를 치러 가면 사람들이 일곱 시전에 나오므로 더 일찍 나가야 했다.

게다가 그때는 여수를 갈려면 이읍에서 벌교까지 50리 정도를 걸어가서 다시 기차를 타고 여수로 가던 시절이었다.

 

다음날 아침, 어둑어둑해서 어머니와 함께 동네골목을 빠져 나와 마구 뛰어서 감낭쟁이를 돌아 외서지서 앞을 지나가는데 보초를 서고 있던 순경이 불러 세우더니 어디를 가는 중이냐고 검문을 하였다.

그래서 이래저래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아픈 곳이 어디요? 하고 보여 달라고 하여 바지를 올리고 다비(양말)를 벗었더니 벌겋게 발라 놓은 것을 보고서는 금방 알아보았는지 산에 다니면서 그렇게 된 것이구만! 하고 가지 못하게 잡아 앉혀 놓았다.

하는 수 없이 가도오도 못하고 두 사람이 평상에 우두커니 앉아서 생각하니 에이~ 병신, 배가 아프다고 그랬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하고 자책을 하면서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이제는 꼼짝없이 걸렸구나, 하고 있으려니 보초가, 아침밥을 먹고 와서 데려 갈 테니 올 때까지 꼼짝 말고 앉아 있으라,고 하면서 사무실로 내려가 버렸다.

아침에 새벽같이 출발을 하였으므로 그제야 밥시간이 된 것이다.

낙담을 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자니 하늘이 노랗고 어머니가 불쌍해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때 보초교대를 하였는지 아까 그 순경이 아닌 다른 사람이 총을 메고 탈래탈래 올라 왔다. 그런데 보니 많이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일어서서 자세히 보니 벌교에서 한청훈련을 같이 받은 도롱굴 사람 백학선이었다. 어찌나 반가운지 달려가서 어찌 여기서 근무를 하냐고 두 손을 붙잡았다.

그 사람도 반가워하면서 웬일로 여기에 앉아 있냐고 도리어 물었다.

그래서 이래저래 병원에를 좀 가려고 나섰는데 못 가게 해서 앉아 있다고 그랬더니 누가? 그러면서 사무실로 되돌아가 전화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나와서 가소! 그러면서 어머니에게도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다시 악수를 하며 고맙다고 돌아서는데 그렇게 풀려나는 것이 더 이상 감격스러울 수가 없어 또다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역시 사람을 알고 봐야 되는구나 하면서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걷는데 하산 하고도 또 한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는가 싶으면서 제발 이것이 마지막이기를 바랐다.

이후 무사히 여수에 도착하여 힘들게 몇 달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엄니가 찾아와서, 산에 간 사람들 다 자수 해갖고 원만하게 되고 지서도 암시랑토 않으니 이젠 돌아가자고, 해서 다음날로 돌아왔더니 그 때가 6.25나기 직전이었다.   끝.

 

2010년 봄.

 

<이 이야기는 순천시 송광면 이읍리 상이읍 마을의 김영환(83세)옹으로부터 2007년부터 수차례에 걸쳐 부분적으로 들었던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청하여 2010년 3월 17일 15:00~17:00 두 시간에 걸쳐 상이읍 노인당에서 여순사건 후에 조계산으로 입산을 했던 자신의 경험담을 청취하여 정리한 것임>

 

 

저작권자 © 여수넷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