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박시백 화백에게서 듣는 일제강점기 '35년'

쌍봉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마지막 강의
국내외 전개된 독립운동 양상부터 임시정부 수립 과정까지 소상히 설명

  • 입력 2019.11.03 15:29
  • 수정 2019.11.05 15:14
  • 기자명 전시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체육부 공모사업 ‘길 위의 인문학’ 마지막 강연이 2일 쌍봉도서관에서 열렸다.

이번 강의는 ‘조선왕조실록(전 20권)’과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35년’의 저자 박시백 화백이 강사로 나섰다.

올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인만큼 박 화백은 이번 강의에서 강제병합부터 3.1운동이 전개되기까지의 과정을 훑어보고 그 결과물로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어떻게 수립되는지를 설명했다.

 

의병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호남...  피폐해진 삶이 3.1운동으로 터져나와

박 화백은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무기를 들고 싸우는 ‘무장투쟁’과 ‘계몽운동’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중 의병운동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진 곳은 호남인데 1910년부터 5년간 일제의 대토벌로 의병은 거의 일망타진됐다. 그러나 검거되는 와중에도 의명들은 누구 하나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토벌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2,30명씩 모이는 소규모 의병운동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해외의병투쟁도 활발했다. 1910년 이전부터 진행된 국내 인사들의 망명은 해외에 독립군 근거지를 구축한다는 목적으로 진행됐고 그 예로 신민회의 이회영이 형제 6명과 망명을 떠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회영은 조카가 일본에 전달한 정보때문에 결국 잡히고 만다. 안창호 역시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를 구성했다.

한편 일본인들에게 비옥한 조선의 토지는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에 총독부는 토지국유화 정책으로 조선 전체 토지의 10%를 총독부와 일본 소유로 변모시켰고 헌병경찰 통치의 상징인 태형을 조선인에게만 실시하여 공포정치를 강화했다. 태형은 정식 재판이 불필요한 간단한 경범죄를 저지른 조선인에게 회초리 같은 얇은 막대기로 이틀에 걸쳐 최소 30대에서 최대 60대까지 벌을 가하는 형벌이다.

1차세계대전 시기 국내 독립운동이 약화되자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일본이 신식 상품과 기계를 전시하는 ‘조선물산공진회’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는 150만명이 다녀갈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일본은 조선을 완전히 정복했다고 여기게 됐다.

그러나 당시 조선농민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했다.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에서 지주의 영향이 커지고 조선인들은 땅을 파고 그 위에 거적때기를 덮은 ‘토막’형태의 집에 거주해야 했다. 조선인들은 발전은커녕 오히려 열악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종전의 핵심 주축인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했다. 이는 미국 내에서는 물론 주변 국가들의 큰 반발을 샀지만 상해에 있던 여운형은 민족자결주의가 큰 의미가 있다고 여겼다. 3.1운동의 주축인 학생들은 이광수에게 ‘2.8독립선언문’ 작성을 요구하고 다음달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3.1만세운동 당일, 거리마다 붙은 전단지와 벽보로 아침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2시가 가까워오니 사람들은 하나둘 파고다공원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2시가 넘어도 민족대표들은 모이지 않았고 공원에 모인 시민들만이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본경찰은 당황했고 이후 일본의 무력진압이 본격화되며 잡혀온 시민만 1천여명이나 됐다.

그렇다명 당일 민족대표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들은 비밀리에 태화관에 모이기로 약속을 변경하고 그곳에서 한용운이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 독립선언서는 당시의 시대상황과 잘 어울린 명문이지만 한문투가 지나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일본이 3.1운동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은 그들의 진압방식에서 알아볼 수 있다. 만세시위 주도자들이 모두 체포되면서 결국 국민들 스스로 만세운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주동자가 없는 만세시위는 지역에 따라 적극적 항거나 평화시위라는 서로 다른 양상을 띠는데 중요한 점은 이 잔혹한 진압에도 조선인들 누구 하나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화학당을 다니던 유관순 열사의 아우내장터 만세시위 현장에서는 잔혹한 진압으로 유관순 열사의 가족들도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후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 1년 뒤 옥중 만세시위로 죽음을 맞는다.

대표적인 ‘제암리 학살 사건’은 제암리교회를 만세시위의 출발지라 여긴 일본인이 이 교회에 조선인들을 모아 놓고 불을 지른 일제의 만행이다. 심지어 일본인은 교회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마저 총을 쏴서 죽였다. 이 사건은 선교사들에 의해 전세계에 알려지며 일본의 잔인함이 폭로됐다.

조선인들이 3.1운동에서 쉽게 물러서지 않은 이유는 3.1운동을 통해 반드시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담았기 때문이다. 3.1운동으로 사망한 사람은 7천명이 넘고 재판을 받은 사람도 1만명이 넘었다.

‘3.1운동’을 통해 조선인들은 후에 독립하면 ‘공화정’국가를 택해야 함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이전까지 신민으로 살던 조선인들이 국민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아우내장터 3.1운동 외에도 다양한 곳에서 3.1운동이 진행됐다. 간도와 연해주,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등 국외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도 활발했다.

1919년 3.1운동은 친일파들 사이에서 “이러다 정말로 조선이 독립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의 대규모 운동이었고 그 기세도 어마어마했다.

비록 3.1운동은 실패했지만 이후 다가온 문화통치시기에 다양한 단체와 조직 결사가 허용되는 성과도 있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이시기에 설립된다. 3.1운동으로 성장한 국민들은 노동운동과 청년운동도 활발히 실시했다.

 

김구의 지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승만 국무총리 선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초대 대통령으로 이동녕, 안창호 등이 거론됐다. 당시 미국 내 독립운동 대표자로는 안창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고 이승만과 박용만은 그 다음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이 이승만을 지지하면서 이승만이 국무총리로 선출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고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며 반대했을 정도로 이승만은 위험한 인물이었지만 외교교섭에 대한 기대감과 김구의 영향으로 결국 이승만이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승만을 위시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첫 번째 문제는 연해주의 대한독립의회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북간도와 연해주 세력들도 자체 임시정부를 수립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양자간의 통합논의가 모색됐다.

논의 과정에서 임시정부군관을 어디에 둘 것인지로 의견이 갈려 대립되었다. 결국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가 통합논의를 주도하면서 “상해와 연해주 모두 해체하고 새롭게 제안하자”고 제안하면서 안창호와 이동휘가 통합임시정부를 1920년 1월에 출범시키게 된다. 이로써 이승만 대통령, 이동휘 국무총리 휘하의 통합임시정부가 본격 출범하게 되었다.

두 시간 가량의 짧은 시간에 진행된 박 화백의 일제강점기와 임시정부수립 역사 강의는 여기서 마무리됐다. 한국 독립운동사 공부에 필수 도서로 자리잡을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35년’은 현재 5권이 출판됐고 내년 8월에 완간될 예정이다.

이날 강의에 참가한 중학교 1학년 강채호 학생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조선왕조실록도 다 봤다"며 "학교 수업보다는 내용이 어려웠지만 일제시대 선조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둔덕동에서 온 한 시민은 "KBS역사저널 '그날'에서 박 화백의 저서 '조선왕조 50년'을 자주 인용하며 흥미가 생겼다"며 "다른 역사책과 달리 명쾌한 설명에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35년이 완간될 때까지 꾸준히 읽을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박 화백의 저서를 챙겨온 학생

광주에서 온 김재영 씨는 "어릴 적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며 직접 구입한 박 작가의 저서 '조선왕조실록'을 들고 와 사인을 받았다.

한편 쌍봉도서관에서 열리는 문화체육부 공모사업 ‘길 위의 인문학-대한민국 오디세이 100년’은 인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올해 5월부터 강연과 탐방을 병행하고 있다.

총 12회로 구성된 '길 위의 인문학'은 9회 강연과 3회 탐방으로 상반기 이육사 시인의 딸인 이옥비 여사의 특별강연을 시작으로 박시백 작가 강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오는 11월 9일에는 '길 위의 인문학' 참여자들이 모두 모여 도서관에서 다큐멘터리를 감상할 예정이다.

저작권자 © 여수넷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