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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국전쟁과 이야포 피난선 학살③

  • 입력 2020.08.16 20:15
  • 수정 2021.06.30 09:08
  • 기자명 양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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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소개글

이 글이 학생들과 지역 기자들 그리고 곧 이야포를 방문할 여수시의원,공직자들에게 읽혀지길 바라면서 양영제 작가가 기고한 글입니다. 이 글은 신문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으며 글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논쟁과 책임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이 글은 분량 관계로 3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이번 글은 3회 마지막입니다.

여수시 부속섬 안도에는 비행기 소리만 나면 맨발로 뛰쳐나와 고개를 쉼 없이 가로 젓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황 씨 아들을 두었던 할머니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도회지에서 학교를 다니다 방학 동안 안도 집에 와서 멸치잡이에 손을 보태고 있었습니다. 금쪽같은 장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 진압군 김종원 대위가 안도에 상륙하여 한밤중에 마을 청년들은 죄다 나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자고 있던 아들을 깨어서 내 보냈습니다. 그리고 김종원 대위가 명령을 내린 진압군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죽었습니다.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학교운동장에 무릎 꿇린 아들을 향해 부하가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자 살인기계 김종원 대위는 일본도 칼집으로 부하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그리고 직접 M1 무거운 소총을 한손으로 잡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아직도 여수사람들에게는 치가 떨리는 일본 황군 하사관 출신 살인기계 김종원 대위는 말장화를 신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안도 주민들이 학살당했습니다. 그 때가 1948년 10월이었습니다.

안도 명예회복비

그 때는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 된 후 남북 각 분단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할 때 이었습니다. 국가 권력이 공고히 구축되기 이전 빈 권력공간에서는 좌우익 갈등이 민간에게 전이되어 좌우익 간에 보복적 폭력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국가폭력의 민간화라고 합니다.

민간폭력은 한민족 공동체 정서를 파괴하여 한 마을이 밤골 감골로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친족 형제간 혈연유대관계도 균열이 생겼습니다. 집안의 재산을 털어 일본 유학을 보낸 형은 좌익이 되고 소나 키우던 동생은 집안을 보호해야 하는 까닭에 극우익이 되어 낫과 곡괭이를 들고 빨갱이 사냥을 나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안도는 전혀 폭력의 민간화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마을공동체가 권력으로부터 사적 오염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오염을 그 무엇이 막아냈다고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내륙지역과 달리 무엇이 권력과  국가폭력으로부터 완충역할을 했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나는 그 무엇을 안도의 인륜의식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주민관계가 사돈에 팔촌 범위 안 친족공동체이고 자연에 대해 이기적 정복의식 보다 달래고 어리어 공동체를 보존하려는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국가폭력이 집단적으로 일어난 이런 곳은 대체적으로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방어기제가 무의식적으로 동원되어 형성화 됩니다. 기존의 정서와 가치신념을 지키려다 희생을 당하게 되면 기존 가치신념과 반대되는 반동형성화(反動形成化 reaction formation)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요. 그날, 미군기가 안도 이야포에 정박해 있는 피난선을 폭격한 후 오후부터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피난선 선장이 빨갱이이었다는 소문입니다. 그러자 마을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이야포 해변과 마을사이를 가로 막습니다. 청년들은 살아남은 유족들이 시신을 산에 묻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마을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아섭니다. 아침나절까지만 해도 피난민들에게 곡식을 걷어 주먹밥을 해 주었던 안도주민들이었습니다. 몽둥이를 들고 마을을 지킨 청년들은 다름 아닌 안도의 슬픈 벅수들이었습니다.

여수 연등동 벅수 화정려 ⓒ엄길수

여수에는 예로부터 마을 어귀마다 마을을 지키는 벅수라는 정승이 서 있었습니다. 안도 청년들은 1948년 10월 학살이 또다시 마을에서 재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벅수가 된 것입니다. 미군기가 빨갱이 선장이 몰고 온 빨갱이 선박을 사냥 했는데 그 배에 탄 피난민들이 마을에 들어오게 되면 또다시 국군이나 경찰이 마을에 들이닥쳐 피난민들에게 도움을 준 마을을 해칠 것을 염려한 안도 청년들입니다. 생각하면 참 슬픈 벅수들입니다.

누가 피난선 선장이 빨갱이라고 헛소문을 냈을까요? 그런 헛소문에 권위를 실려 퍼트릴 만 한 위치에 있던 자들은 누구일까요? 나는 총을 지니고 무력적 권위를 갖고 있는 자들이 아니고서는 달리 추정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빨갱이라는 헛소문을 낸 자들이 미군에게 이야포에 빨갱이로 의심되는 배를 붙잡아 놓고 있다고 알렸다고 유추하면 나의 망상적 상상력일까요? 
  
하여간 안도 슬픈 벅수들은 빨갱이 소문이 나자 피난민들에게 마을로 들어오지 말고 빨리 산으로 도망치라고 유도했답니다. 그래야 피난민도 살고 마을도 산다는 것을 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남은 피난민들은 연도로 이동할 때 까지 산 속에서 일주일 동안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아직까지도 안도 주민들이 더 이상 피난민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 미안함으로 여기고 있고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 일입니다. 피를 흘리며 마을로 들어와 주민들에게 치료를 받던 피난민 생존자들은 안도 벅수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도는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조건을 잃지 않았습니다.  

안도는 자그마한 섬이라 더욱더 반동형성이 집단적으로 심하게 일어날 수 있었던 공간입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 일부가 절대반공 군사독재시절 있긴 있었습니다. 이야포를 찾아 온 피난선 생존 유족을 간첩으로 여겨 경찰에 신고하는 사례도 있게 됩니다. 반동형성이 권력기제에 적응하면서 반(半) 자의적으로 지배체계에 가담한 결과 미셀 푸코가 벤담의 파놉티콘(원형 교도소) 장치를 끌어와 설명한 감시와 처벌의 절대반공 감시탑 역할을 수행 했던 것입니다. 

그 후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안도는 원래 지니고 있던 인륜가치를  회복시킵니다. 어쩌면 안도는 인륜보다 더 높은 경지인 천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 형제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무려 열 명이 넘는 안도 주민들이 증인으로 나선 것입니다. 당시 군사정권 잔영이 시들어지지 않는 시기에 학살 증인으로 나서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없으면 가능하지 않는 일입니다. 나는 역사학자나 사회학자가 아니지만 이런 부분에 큰 관심을 가지고 몇 년 간 안도 주민들을 취재 해 왔습니다. 1948년 10월 이승만 진압군의 학살과 1950년 미군기의 피난선 학살이 안도주민들에게 어떤 외상(外傷 Trauma)을 주었는지 몹시 궁금했던 것입니다.

외상은 깊고 오래 남아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안도 어르신들을 만나 이야포 학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려면 회피하는 현상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느껴야 했습니다. 안도주민들에게는 아직도 무의식적 공포가 어려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치유해야 합니다. 역사는 기록이나 서류 또는 물리적 흔적을 발굴하여 역사로 기록하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외상은 역사가 되지 못하는 까닭에 놓쳐 버릴 수 있습니다.

두룩여 사건 생존자 박영근 씨가 3일 이야포 해변서 열린 추모식에서 당시의 참상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올해 8월 3일 이야포 위령제에 참석한 분들은 외상이 얼마나 깊었는지 목격했을 것입니다. 증인으로 나선 안도 어르신과 두룩여 학살 생존자의 분노는 지난 세월 동안 반공감시와 안보처벌이라는 억압에 의해 억눌렸던 인륜이 분출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리 전쟁 중이고 인종이 다르다 해도 인간이 인간을 그다지도 쉽게 살육할 수 있냐는 분노표출은 이념과 인종차별과 국가이익은 그 어떤 명분이 되었든 인륜을 초월할 수 없다는 외침이었습니다.   

또한 나는 안도가 이렇게 인륜회복 기운을 상실하지 않은 채 여전히 공동체 정신을 지니고 있는 것에 놀라움을 가지게 됩니다. 사회가 분업화 개별화 되고 공동체 사회에서 이익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파괴되어 가는 인륜의 노스텔지어 깃발이 나부끼는 환영을 맛보게 됩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가 남았습니다. 만약 해양환경인명구조단 여수구조대 대원들이 이야포 수중에서 발견한 물체를 인양하여 피난선 일부인 것이 전문가의 감정을 거쳐 확인 된다면, 학자들이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가 공식적으로 발족되어야 합니다. 위원회는 미국국립기록관리청(NARA)에 보관되어 있을 1950년 8월 3일자 미공군 작전보고서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확보되면 이야포 학살을 저지를 미군기 기종도 명확히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생존자와 목격자 피난선과 더불어 학살의 실체가 오롯이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아래 사진은 폭격임무를 맡은 기종이 기록된 1950년 7월  20일 작전보고서입니다.   

1950년 7월 20일 미공군 작전보고서. 비행기 기종이 F-80 슈팅스타로 기재되어 있다

학살 진상을 밝혀 억울하고 불명예스럽게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고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과 앞으로 살아갈 이 땅의 사람들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존엄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킬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권이고 인권이 지속 될 때 대한민국 평화도 지속될 수 있을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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