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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국전쟁과 이야포 피난선 학살②

  • 입력 2020.08.13 14:30
  • 수정 2021.06.30 09:08
  • 기자명 양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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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소개글

이 글이 학생들과 지역 기자들 그리고 곧 이야포를 방문할 여수시의원,공직자들에게 읽혀지길 바라면서 양영제 작가가 기고한 글입니다. 이 글은 신문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으며 글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논쟁과 책임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이 글은 분량 관계로 3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이번 글은 2회분입니다.  [특별기고] 한국전쟁과 이야포 피난선 학살① 기사 바로가기 >>>> 

한국전쟁에 뛰어든 미군에게는 수많은 피난민은 전쟁방해요소였습니다. 또한 대구와 부산은 각각 미8군 전방사령부와 제2 병참사령부가 설치되어 도시의 많은 공간을 필요 했습니다. 때문에 도시로 집중되는 피난민들을 분산시켜야 했습니다. 또 전선을 피해 남으로 이동하는 피난민 중에는 적이 잠입하여 정보를 수집하거나 선전선동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미군은 1950년 7 월 25일 일 대구에서 피난민 정책 회의를 합니다. 이 자리에는 미8군 헌병사령부 삭스(Sachs)대령, 첩보부 타키스톤(Tarkinston)대령, CIC 플래허티(Flahertty)소령, 인사부 맥거번(Mcgovem)소령, 그리고 한국에서는 김갑수 내무부 차관, 김태선 치안국장 등이 참석합니다. 이 자리에서 맥거번 소령이 피난민 통제와 이동에 관한 문제를 설명하고 아래 다음의 계획을 발표합니다. 발표된 내용은 이야포 피난선 학살과 밀접하게 연관되니 중요하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회의내용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강성현 교수의 논문에서 가져왔습니다.

 

< 발표내용>

1 도시나 마을의 주민들을 소개할 정책 삐라를 준비한다.

2 모든 피난민의 이동 및 흐름통제에 관해 한국경찰의 소규모 연락단이 미8군사령부와 각 사단 사령부에 배속된다.

3 피난민이 집단이나 개별로 이동은 권한을 가진 지위관의 허락 없이는 금지된다.

4. 피난민의 이동(도시에서 소개)은 미8군 사령관이나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실시된다. 이러한 이동은 다음과 같이 실시된다.

 

< 다음 >

- 한국경찰은 연락관실과 접촉하고 그 지역 사무실(경찰서)에 소개를 통보하며, 소개부대, 시기, 지역을 분명히 한다.

- 한국경찰 연락장교는 경찰채널을 통해 정보를 제공해 피난민의 이동을 원활하게 한다. 사전에 선택된 집결지로 향하는 도로상의 피난민을 통제하고 검문소도 설치한다.

- 사회부장관은 식수, 식량 및 편의품을 모든 피난민들에게 제공한다.

- 모든 피난민의 이동은 일출과 일몰 사이에 한다.

- 밤 시간 (저녁- 새벽)에는 모든 한국인의 이동을 중지한다.

- 소개(疏開). 숙소제공. 심문 및 격리 조사 등을 포함하여 피난민 통제에 대한 모든 책임은 한국에 귀속된다.

- 군사정보나 전복적인 요소를 소지한 각 개인은 심문을 위해 가장 가까운 헌병감이나 정보기관에서 바로 처리한다.

 

피난민 정책회의 내용에 의하면 피난민들 이동이 임의가 아닌 미8군에 명령에 의해 한국정부가 실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피난민들이 피난민수용소에 수용되어 배급을 받기 위해서는 피난민증이라는 것을 교부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잘 곳도 배급도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피난민증

그러므로 이야포 학살 마지막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 일가가 부산에서 통영 욕지도를 거쳐 어디론가 이동한 것이 임의적 피난행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산 동래구 초량초등학교 운동장에 수용되어 있는 서울지역 피난민들은 미군 병참기지 사용을 위해 운동장을 비워주어야 했습니다. 피난민들 중 호명된 가족은 부산 여수뱃머리에서 통영으로 이동되었고 다시 욕지도를 거쳐 피난선을 타고 거문도 방향으로 이동했던 것입니다. 이동 할 때 마다 피난민들에게는 일일 쌀 두 홉이 배급되었다고 합니다. 욕지도에서 거문도 방향으로 이동 할 때도 화물선 마련과 쌀 배급을 정부가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몇 가지 의문과 소문이 해소됩니다. 하나는 왜 피난선이 이야포 해상까지 왔는지에 대한 의문은 풀렸습니다. 또 하나는 피난선이 기관고장을 일으켜서 이야포로 들어왔다는 것인데, 만약 기관이 고장 났다면 선장이나 기관장이 기관을 고치려고 뚝딱거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1950년 8월 2 일 밤 그냥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8월 3일 오전 9시 경 폭격이 시작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 소문은 선장이 빨갱이였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정부가 빨갱이한테 배 항해를 맡겼다는 것이나 다름없어 집니다. 1950년 8월 3일 이 소문 때문에 안도 청년들이 슬픈 벅수(여수지역 마을 지키는 정승)가 되어 피난민들을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섭니다. 이 부분은 치유되어야 할 중요한 사항이므로 안도 특성과 함께 뒤에서 설명하겠습니다만, 오전까지 마을 사람들은 곡식을 걷고 주먹밥을 만들어 피난민들에게 제공까지 했고, 미군기 폭격으로 다친 피난민들을 집에 데려와 치료까지 해주었습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당시 11세로 이야포에서 살고 있었던 까닭에 폭격 현장을 고스란히 목격했고 현재도 이야포에서 살고 있는 000 할머니(이름을 밝힐 수 없다는 당부 때문에 사진만 올립니다.) 증언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증언의 일부를 옮겨봅니다.

안도 증언자 할머니

“여짝이 전부 집인디 여짝(이야포 쪽)은 좀 못살고 저짝(뱃머리 쪽)은 잘 살았어. 그디 여그에 (현 이야포 학살 안내판이 있는 일대) 피난민들이 개미떼처럼 자빠져 있었당께! 뱅기 총에 맞은 피난민들이 여그로 올라옴씨롱 자빠지는디! 어메어메 피가 철철 흘러가는디…!”

얼마나 큰 배였는지 물어봤습니다.

“긍께 일층 이층 삼층 해서 높이가 한 삼층은 되것드만잉. 엄청 큰 배드만잉. 배에 태극기가 달려 있었는디 고거시 젖어 있었갓고 뱅기가 태극기를 못 봤던 갑서. 긍께 뱅기가 배를 때려부렀지.”

폭격 당시 이야포에 피난선 한 척만 있었는지 물어봤습니다.

“아니제 여그가 멸치밭이여. 뜰망이 아홉 틀인가 있었제.”

뜰망은 불을 밝힌 배가 멸치를 이야포 안으로 유인해 들어오면 조그만 배 서너 척이 그물로 멸치를 감싸 들어 올려 뜰채로 퍼 담아 뭍으로 옮겨 아궁이 넣고 삶는 조업방식을 말 합니다. 그러니까 이야포에 뜰망이 아홉 틀이면 선단 3척씩만 붙어도 30 여척 이상 배들이 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도 미군기는 정확히 피난선에만 폭격을 가 했던 것입니다.

여러 증언들을 교차해 보면 피난선이 크기, 피난민 개략적 숫자, 당시 폭격상황 등은 그림이 확연히 그려집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꼭 알아야 할 한 가지,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미군기가 이야포에 나타나서 피난선만 정확히 폭격할 수 있었냐는 것입니다. 1950년 8월 3일 이전까지 미군기가 안도 상공에 나타난 적 없으며 정찰기도 나타난 적 없습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나는 당시 안도에 주둔해 있던 영암경찰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암경찰은 안도로 후퇴하면서 국민보도연맹원 20-30명을 영암 월출산 자락의 도갑산 골짜기 등지에 처형하고 내려온 경찰들입니다. 안도 주민들 증언에 의하면 후퇴해 온 영암경찰들은 이야포에 움막을 짓고 은신해 있었답니다. 움막은 마을 주민들을 시켜서 지었고 주민들이 영암경찰이 먹을 밥도 움막으로 날랐다고 합니다. 당시 안도에는 일본인 학교인 심상소학교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영암경찰이 학교건물을 주둔지로 삼지 않고 움막에 은신해 있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유추를 하게 만듭니다.

우선은 검문을 하기 위해 피난선을 불러들여 이야포에 정박하게 했다면 영암경찰은 배에 올라와서 여러 가지 조사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영암경찰은 배에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폭격 후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8월 9일 두룩여 학살 당일 어스름 무렵 살아남은 피난민들만 안도 서고지에서 연도(소리도)로 이동시킵니다. 이날 이때 영암경찰은 선장과 기관장을 시켜 뭍에 있는 시신마저 피난선에 넣고 불을 지릅니다.

당시 안도에는 뭍에 있는 피난민 시신을 다시 배에 실어 나르고 불을 지르게 할 정도로 명령에 위력을 갖고 있었던 사람은 영암경찰 밖에 없습니다. 살아남은 피난민들만 연도로 이동시킬 수 있고 연도로 가는 배를 동원할 수 있는 것도 영암경찰밖에 없습니다. 경찰의 지시에 의해 불이 붙은 피난선은 이야포 산등선 높이로 삼일 동안 타 올랐다고 합니다. 그럼 이 기간 동안에는 왜 미군폭격기가 불빛을 보고 나타나지 않았던가요.

한국경찰은 검문소를 설치하고 피난민 이동에 대해 미8군에 보고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살아남은 피난민들을 조직적으로 연도로 이동 시킨 것을 보면 한국경찰은 어디엔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통신을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이야포에 크고 좋은 것(당시 미군조종사들은 적이 은신할 만한 창고 배 등 목표물을 이렇게 불렀습니다.)이 있다고 누가 미군에게 연락을 했을까요? 선장이 빨갱이라는 소문은 누가 냈을까요? 왜 냈을까요?

참고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 전술도를 보겠습니다.

사진 전술도

전술도를 보면 연대급에도 전술 항공 통제반 (Tactical Air Control Party )이 있었습니다. 정찰기 모스키토 통제 없이도 지상부대가 폭격요청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생존자는 피난선에 흰옷과 태극기도 걸려 있었고 조종사가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일 정도로 폭격기가 낮게 날았는데 어떻게 폭격을 할 수 있냐고 육필증언을 남겼습니다. 여기에서 한국전쟁 당시 미군기 폭격으로 흰옷 입은 사람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사진 한 장을 보겠습니다.

미군기 폭격에 의해 허공으로 날아가는 철도 노무자. 사진출처 성공회대 강성현 교수 논문 중

영구전쟁국가인 미군에게 인도적 자비를 논하는 것이 부질없음은 베트남전이나 이라크 침공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군에게 흰옷 입은 피난민은 전쟁방해요소이기도 하지만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이기도 했습니다.

미군과 피난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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