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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국전쟁과 이야포 피난선 학살①

  • 입력 2020.08.12 18:25
  • 수정 2021.06.30 09:09
  • 기자명 양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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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소개글

이 글이 학생들과 지역 기자들 그리고 곧 이야포를 방문할 여수시의원,공직자들에게 읽혀지길 바라면서 양영제 작가가 기고한 글입니다. 이 글은 신문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으며 글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논쟁과 책임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이 글은 분량 관계로 3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들어가는 말

2020년 8월 3일 여수 부속섬 안도 이야포에서 지역신문사 여수넷통 주최로 위령제가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3일 미군기에 의한 이야포 피난선 학살 위령제입니다.

그 며칠 전 7월 29일에는 해양환경인명구조단 여수 구조대가 이야포에서 피난선 일부로 추정되는 물체를 발견하였습니다. 발견된 수중물체를 인양하여 전문가 확인을 거쳐야 하겠지만 만약 피난선 일부로 확인되면 이는 한국전쟁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큰 계기가 됩니다.

이야포 피난선 학살 사건은 전쟁 와중에 일어날 수 있는 부수적 피해가 결코 아니고, 논에 피 뽑으려다 나락 뽑힌 비극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충북 영동 노근리 피난민 학살 사건과 더불어 미국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는지 재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야포 학살 사건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는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미군기가 피난선을 폭격하여 많은 피난민 사상자를 냈다는 물리적 학살을 증명하는데 노력했다면, 이제는 그와 동시에 세계 도처에서 학살을 자행한 영구전쟁국가 미국과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전쟁을 이해하는 것은 지금의 한미관계나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노근리 학살을 통해 수많은 자료를 찾아내어 미국에게 한국전쟁이 무엇이었는지 밝혀 왔습니다. 이제는 이야포 피난선 학살 사건에 학자들의 연구가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살 사건에 대한 외연과 내연을 동시에 살펴야 합니다. 외연이란 당시 국제정세와 미국경제 바탕 하에 미국의 전쟁 구도를 말합니다. 내연이란 한국전쟁에서 실제 전투를 치룬 미군의 군사정책입니다. 이야포에 한정한다면 미군의 피난민 군사정책입니다.

여기에 더불어 여수 안도라는 아주 특별한 공간특성을 함께 살펴야만 이 사건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면을 가지고 이야포 학살 사건 성격과 치유방향을 더듬어볼까 합니다.

 

1. 한국전쟁의 외연

한국전쟁은 일제가 한반도에서 물러간 후 국가권력 공백 상태에서 북한 김일성 정권과 남한 이승만 정권의 한반도 통합 권력 장악을 위한 내전입니다.

급진적 민족주의 북한 세력과 반공 민족주의 남한 세력 간에 무력을 통한 민족자주통일이든, 자유민주수호이든, 무어라고 불러도 한국전쟁의 형태는 내전입니다. 한반도 내전이 전지구화 된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은 ‘극동의 그리스’라 말 했습니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좌익과 영국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익 사이에 발생한 그리스 내전을 한국에 투영시켜 한 말입니다.

그리스는 독일 나치가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나치가 그리스에서 물러나자 권력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이를 두고 공산주의 계열 민족해방전선인민해방군과 왕정복귀를 지지하는 민족민주군 두 게릴라 세력 사이에 치열한 내전이 발생합니다. 연합국 영국군대는 그리스 공산주의자들을 힘겹게 진압합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1946년 전면적 게릴라전을 재개하자 힘에 부친 영국 대신에 미국이 개입하게 됩니다.

그리스 공산주의 게릴라.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빨치산들이다

미국은 2차 대전 참전으로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키운 상태였으나 소련의 공산주의 확장에 위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확장되는 소련의 영향력을 저지하고자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즉각적인 경제 군사 원조 지원을 선언한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게 됩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우파는 마침내 승리하여 왕정을 복귀시켰습니다.

그리스 내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은 전 지구적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지중해 연안에 확고한 자신들의 블록을 쌓게 됩니다. 이것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UN군의 모태입니다.

신생국가에 불과했던 미국이 이처럼 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 1차 대전부터입니다. 전쟁물자와 식량을 전쟁시장에 내다 판 미국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젊은이들이 흥청망청 미쳐 돌아갈 정도여서 금주령을 내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1차 대전이 끝나자 경제부흥도 끝나게 됩니다. 마침내 블랙 먼데인 1929년 10월 24일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에 증권이 폭락합니다.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미국은 끔찍한 대공황에 빠지게 됩니다.

1930년대 대공황 당시 미국 구직자 모습. '나는 3 개국어를 할 줄 알고 3년간 참전했으며 3명의 자식이 있어 구직을 간절히 원하다'는 글이 적힌 팻말을 걸었다.

이를 타개하려고 국가주도 경제부흥을 일으킨 것이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한 케인즈적 경제정책입니다. 대표적인 경제정책이 뉴딜입니다.

미국식 사회주의 계획경제이라고 불리는 루스벨트 경제정책이란 고전자본주의 교과서인 아담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만으로는 불황을 타개할 수 없고 국가가 나서 유효수요를 인위적으로 창출하고 공급을 늘려 고용율을 높이고 경제 활성화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유효수효이론을 달리 표현하면 밭에 빈병을 파묻고 정부가 돈을 쏟아 부어 경제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런 경제이론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함께 세계 3대 경제이론인 케인즈 일반이론에 따른 것입니다.

케인즈의 일반이론 중 핵심은 경제에서의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 것입니다. 즉 개인이 소비하지 않고 저축만 하면 유효수요가 감소하여 오히려 전체 국민소득이 감소하고 불황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부가 주도하여 공공투자를 증가시키면 총수요가 확대되어 국민소득 및 고용이 증가하여 불황을 해소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있어 국가주도 공공투자란 다름 아닌 전쟁입니다. 물론 미국이 입고 나오는 전쟁 외피는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수호입니다.

미국은 1937년부터 또다시 경제 불황 늪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타개한 것이 바로 일본의 진주만 습격입니다.

2차 대전을 관망하고 있던 미국으로 하여금 전쟁에 뛰어들 명분을 주게 되면서 또다시 군수물자생산으로 경제 불황 늪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세계 2차 대전 기간 동안 미국은 완전고용이라는 신세계를 맛보게 됩니다. 더불어 세계 군사 강대국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미국은 2 차 대전에 쏟아 부은 전쟁 재정이 엄청난 경제성장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후에도 세계적 규모 전쟁에서 동일한 효과를 가져 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미국은 군수물자생산과 이를 소비하는 전쟁이 있음으로써 경제가 활성화 되는 구조라 미국경제를 민간군수경제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미국을 영구전쟁국가라고 합니다.

이런 미국경제 형태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즉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전쟁물자 소비가 위축되면 미국경제가 불황에 직면하게 됨으로 지구 어디선가 전쟁이 일어나주기 바라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떤 구실을 만들어서도 직접 전쟁을 만들어 왔습니다. 다시 말해 미국에서 생산하는 잉여군수물자를 소비할 소비처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야만 미국은 민간군수경제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주유소 습격사건이라 일컫는 이라크 침공입니다.

미국의 이러한 경제특질을 바탕으로 다시 1950년 한국전쟁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미국은 독일 나치와 일본 군국주의를 패망시켜 군사강대국이 되었지만 군수물자를 생산 유통 소비시킬 전쟁이 없자 미국 경기는 하강곡선을 내리 달리게 됩니다.

이럴 때 미국은 새로운 것을 발명합니다. 바로 ‘냉전의 발명’입니다. 경기를 다시 부흥시킬 수 있는 기회로 냉전을 만들어냅니다. 발명된 반공 냉전은 침체된 미국 경제를 일으킬 기회를 찾게 되고 기회는 찾아 왔습니다. 바로 한국전쟁입니다.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세계적 헤게모니의 출범을 알리는 계기이자 시험대였고 상징이었습니다. 미국은 개전 즉시 케인즈에게 군복을 입혀 참전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팽창을 우려스럽게 지켜보면서도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에치슨이 오히려 대만 한국 인도차이나(베트남)을 미 동남아 방어선에서 제외시키는 에치슨 라인을 발표하게 됩니다.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1953년 7월 8일 프리스턴 대학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그 유명한 발언인 “한국이 나타나 우리를 구원했다( Korea came along and saved US) 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한국 근현대사 석학인 미국 역사학자 부르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제기한 북한의 남침유도설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세계 콤뮤니즘을 실현시키려는 소련을 안심시켰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소련도 1949년 8월에 핵폭탄 실험을 완성한 상태였습니다. 소련으로 하여금 김일성 북한정권이 전쟁을 통한 한반도 통일을 승인하고 무기를 지원할 만 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남침 유도설은 말 그대로 오독에 불과한 설에 불과 했고 부르스 커밍스도 자신도 남침 유도설을 제기한 적 없다고 발을 뺐지만, 어이되었든 미국은 유엔의 집단안보를 동원한 한국전쟁을 치루면서 국방력과 경제력이 다시 한 번 비약적으로 도약하게 됩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학살만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민간구원활동도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민간원조 활동을 전담하는 곳은 민간기구가 아닌 미8군 소속 민사지원부 UNCACK(,Unite Nation Civil Assistance Command Korea)이었습니다. 즉 군사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자유시장 자본주의 경제를 심고 미국에 우호적이면서 보수적인 정부를 유지시키는 미국의 냉전적 세계전략입니다. 파괴가 잔혹할수록 구원의 향기는 더 진했습니다.

미군과 한국전쟁 고아들

구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런 사진들은 미국의 전쟁 프로파간다(propaganda)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곡식 배급, 천막수용소, 고아원, 학교 등 인도주의적 활동을 일부러 폄하할 필요는 없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군사작전과 갈등하지 않는 제한된 범위 안 이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이 파괴와 구원을 통해 미국에 길들여지는 국민 만들기 (nation- making) 결과가 지금 서울 광화문 보수 집회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게 만든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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