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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여수’ 연극 공연을 보고 나서

그 역사를 기억하기를 원한다. 여순항쟁!
우리는 같은 동포를 죽일 수 없다.
1시간 30분 동안에 여순사건을 잘 이해할 수 있어

  • 입력 2020.10.27 09:50
  • 수정 2020.10.28 12:18
  • 기자명 공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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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포스터

지난 24일-25일까지 여수시민회관에서 여순항쟁을 다룬 ‘1948 여수’ 연극 공연이 3회 열렸다. 강기호(극단 파도소리 대표) 작·연출 ‘1948 여수’는 26명의 배우와, 17명의 스탭이 동원된 대작이었다.

강기호 연출가는 이번 연극은 “과거 1948년 여수 시민들의 삶의 모습, 여수의 상황을 그린 작품으로, 여수 시민들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중략-) 연극의 키워드는 ‘기억’이며, 기억이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관통한다” 고 했다.

또한 “이 연극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용서하고 화해해서 서로 상생했으면 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1948 여수’를 기억하고자 합니다” 라고 했다.

1시간 30분 동안의 짧은 시간에 여순항쟁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 1948년에 정부 수립이 되기까지의 시대 상황, 여순사건이 일어나게 된 동기, 제14연대에 군인들이 지원하게 된 동기, 재판도 없이 무참히 시민들을 학살하는 장면들을 잘 알 수 있었다.

시대 상황을 논의하다

여수 시민들은 "미군은 물러가라, 단선 단정 반대" 등을 외치고, 대한청년단은 시민들의 자주 독립을 위한 행동을 방해했다.

해방이 되고 나서 친일세력의 득세 등으로, 시민들은 일제 강점기보다 살기가 더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위한 다짐

여수시 신월동에 진지를 둔 제14연대는, 광주에 주둔한 제4연대가 1948년 4월부터 전남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해남·무안 등 전남 곳곳에서 병사를 모병했다. 지원하게 된 동기는 생활이 어려워서 지원한다고 했다. 먹여주고 재워주니까. 일부 군인들은 ‘자주민족국가의 간성(干城, 나라를 지키는 군대나 인물)이 되기 위해서’ 라고 했다.

1948년 4월 3일에 제주 4·3 사건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은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여수 주둔 제14연대 1개 대대 출병을 명령한다.

여순항쟁은 동포 학살이라는 제주도 출병 명령이 갑작스럽게 하달된 상황에서 돌발적으로 발발했다. 1948년 10월 19일 제14연대 ‘병사위원회’는 동포의 학살은 국군의 사명에 부합하지 않은 명령이라면서 ‘동족 상잔 결사 반대, 미군 즉시 철퇴’를 요구하며 총궐기했다.

제14연대 제주도 출병 병사를 싣고 가기 위한 해군 LST함 (전차양륙함, 전차와 보병을 실어 나르는 함정)이 10월 19일 여수 신항에 정박하고 있었다.

10월 19일 밤 9시경에 제14연대 병사위원회는 궐기했다. 당시 제주도 출동 시간은 밤 10시였다. 제14연대 연대장과 부연대장은 밤 12시로 출동 시간을 늦췄다고 한다. 출동 1시간 전에 병사위원회는 행동을 개시했다.

19일 밤 9시경에 시작한 봉기는 다음날(20일) 새벽 1시경에 부대를 장악한다. ‘자주민족국가의 간성(干城, 나라를 지키는 군대나 인물)이 되고자 군인이 되었는데, 동포의 학살이라는 제주도 출병에 반발한 것이다.

10월 20일 오후 3시에 시민 3천∼5천 명이 운집한 가운데 ‘여수군 인민대회’가 진남관 앞에서 열렸다.

10월 22일 계엄령이 선포된다. 야간 통행금지, 옥내외 집회금지, 웬만한 일에는 사형한다고 겁을 주고, 반란군을 잡는다고 여수 시내의 집들에 불을 지른다. 반란군에게 밥을 주었다고 죽이고, 손에 기름때가 묻어 있으면 죽인다. 총검술을 연습하고 온 것으로 보고.

연대장의 진압 명령

일부 군인들은 총으로 쏴 죽이려고 할 때,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쏴 죽인다. 일반 시민들을 죄를 확증할 수 없는 데도 총으로 마구 쏴 죽인다. 총 맞아 죽은 어머니를 어린 아이는 죽은 지도 모르고 얼른 일어나라고 계속 재촉한다.

흰옷 입은 어머니가 높은 데서 시민들이 학살당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역사가 증언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연극 ‘1948 여수’ 출연자 단체사진

출연자들은 마지막에 영정 사진을 들고 나와서 외친다. “우리들은 모두 1948년 10월 오동도에 갇혀 있다”, “오동도에 갇혀 있는 붉은 설움을 우리가 풀어 주어야 한다”고.

그때 배경에는 ‘칼 마이던스’가 찍은 학교 운동장 등에 많은 시체가 널려 있는 사진이 계속 나타난다. 당시의 참혹한 현장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다. 여순항쟁이 일어난 지 72년이 되었다. 이제는 진실을 밝혀서 억울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 주고,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 참고 자료 : 여수넷통뉴스, "여순항쟁 72주년 특집 “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글 주철희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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