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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③

(3) 북상길에 오른 봉기군

14연대에 출동명령 하달은 ‘우체국 전보’ 방식?
우체국 전보, 지역의 남로당 지령과 연결시키기에 안성맞춤
봉기군 6시경에 여수역 도착, 최소 3회 걸쳐 순천으로 1천여명 이동
여수역 못지 않게 미평역도 중요하고 의미있는 장소

  • 입력 2020.10.22 11:13
  • 수정 2020.10.22 22:02
  • 기자명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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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일 신항에 정박중인 해군 LST함. 자료 주철희 제공

제14연대 제주도 출병 병사를 싣고 가긴 위한 해군 LST함(전차양륙정, 전차와 보병을 실어나르는 함정)이 10월 19일 여수 신항에 정박하고 있었다. 당시 군인들은 대체로 오동도라고 말한다. 위 사진은 LST함 형태를 보여 준다.

10월 19일 밤 9시경, 제14연대 병사위원회는 궐기했다. 당시 제주도 출동시간은 밤 10시였다. 제14연대 연대장과 부연대장은 밤 12시로 출동시간을 늦췄다고 한다. 출동명령은 국방부와 상급부대 제5여단에서 내려온 것이고, 무엇보다도 해군 LST함을 타고 가는데 임의로 변경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원래 출동시간 1시간 전에 병사위원회는 행동을 개시했다.

여순항쟁 72주년 특집 "1948,그때 그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연재 순서
(1) 봉기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진 14연대
(2) 봉기군, 여수역으로 향하다
(3) 북상길에 오른 봉기군
(4) 함성으로 가득한 여수 시내
(5) 바다로 들어오는 토벌부대
(6) 굽이친 길에서 만난 전투
(7) 포격으로 불타는 여수시내
(8) 남녀노소 학교로 모여들다
(9) 손가락총에 피로 물든 여수
(10) 만성리 형제묘의 진실

출동명령은 과연 어떤 경로? 어떤 방식? 

여순항쟁의 논란 중의 하나가 출동명령이 어떤 방식으로 제14연대에 전달되었느냐는 것이다. 여러 기록에 ‘여수우체국 전보’를 통해 출동명령이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부연대장 이희권이 1964년 증언에서 밝힌 내용이다. 군의 중요한 작전을 일반 전보로 전달했다는 것이 타당할까?

그렇지만 연대장 이하 여러 장교의 증언은 다르다. 제14연대와 상급부대인 제5여단(광주 주둔)은 통신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부대 통신망을 통해 ‘명령이 하달’됐다고 통신장교 전용인 소위 등은 증언한다. 박승훈 연대장도 통신망을 통해 하달받았다고 했다. ‘통신망’이 일반인이 이용한 우체국을 말하는 것인지 군대 내부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군인이 표현한 통신망이라는 단어는 군대 내부의 통신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런데 여전히 대부분 기록에는 ‘여수우체국 전보’를 통해서 출동명령이 전달됐다고 주장한다. 우익단체나 국방부에서 발간된 책자에는 더욱이 그러하다. 국방부는 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두 가지이다. 우선 책임 전가를 위함이고 둘째는 ‘반란’이 남로당 지령으로 발발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서다.

군인에 의해 계획된 것이 아니라 지역의 좌익(남로당) 세포가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제14연대 남로당 병사에게 지령하면서 남로당이 계획적으로 반란을 기획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다분히 의도가 있는 주장이다. 군인의 책임을 민간인에게 전가를 위해서는 민간인이 ‘반란’을 계획하고 지휘했다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인보다 민간인(지방좌익)이 먼저 출동명령을 입수했어야 하고, 그 방법으로 출동명령을 ‘여수우체국 전보’로 전달했다는 것이 '반란'에 더 타당성을  부여한다. 다분히 의도된 조작이지만,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고 사실로 받아들이고 인용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주장은 유효하다.

출동준비에 분주한 여수 신항

당시 제주도 출병을 준비중인 해군 LST함이 정박했던 여수신항 현재 모습. 지금은 엑스포장 앞바다가 되었다. ⓒ박성태 2020

출동명령을 받은 제14연대는 19일 아침부터 분주했다. 제주도로 무기와 병사를 실어나른 해군 LST함이 여수 신항에 정박했고, 제5여단 참모장 오덕준 중령과 제14연대 연대장 박승훈, 미 군사고문단 지휘아래 무기 선적 등 출동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제주도로 출항할 LST에는 미군이 지원한 신무기가 가득했다. 

박승훈 연대장 등이 부대 내에서 ‘봉기’의 소식을 접한 시간은 11시경이다. 군기대(헌병) 보고를 받은 연대장 박승훈과 부연대장 이희권은 수습에 나서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피신한다. 여수 신항에서 LST에 대기하고 있던 김현빈 소위는 봉기군이 여수역으로 밀려오는 것을 보고 LST를 부산항으로 대피시킨다. 김현빈 소위는 봉기를 진압한 국군에 의해 군사재판에 회부되고 파면처분을 받아 전역한다.

국군의 ‘반란’의 책임으로 물러난 사람은 김현빈 소위와 부연대장 이희권 두 사람이다. 이희권은 1949년 바로 복권되어 군인의 길을 계속 걷는다. 당시 연대장이었던 박승훈은 10월 24일 목선을 타고 목포로 피신한다. 그리고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한다.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반란’의 주모자가 여수여중학교 교장 송욱이라고 지명한다. 여하튼 박승훈은 제14연대 최고 지휘자였지만, 징계 등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았다.

철도를 이용해 북상 길에 오르다

당시 여수역의 모습으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다. 2012년 세계박람회 개최로 인하여, 여수엑스포역으로 개칭됐고, 위치도 북쪽으로 옮겨졌다. 자료 주철희 제공

봉기군은 새벽 6시경 여수역에 도착한다. 
여수역에는 철도경찰과 여수경찰서에서 응원 나온 병력이 방어망을 구축하고 봉기군과 교전을 벌인다. 철도경찰과 응원부대는 사상자가 발생하고 도저히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피신한다.

여수역을 장악한 봉기군은 북상하기 위해 기차를 수소문한다. 당시 순천과 여수를 오가는 통근 기차는 6시부터 운행했고, 여수역을 출발하여 미평역-쌍봉역-덕양역-신풍역-율촌역-성산역을 경유하여 순천역에 도착하는 코스다. 여수역에서 순천역까지는 통근 기차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당시 유일한 교통수단이 철도였기에 모든 간이역에서 정차했고, 석탄 증기기관차였기에 지금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대다수 기록에는 봉기군이 한 차례만 북상 기차를 탄 것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당시 기록과 제14연대 군인 및 순천 철도청에 근무했던 사람의 증언은 다르다.

여수역을 봉기군이 접수한 시간은 6시 30분 경이며, 곧바로 기차를 수소문하여 아침 7시가 되기 전 객차 6량에 봉기군이 타고 순천으로 이동한다. 봉기군을 태운 첫 기차가 순천에 도착한 시간은 8시가 되기 전이었다고 순천 철도청에 근무한 김용익은 증언했다. 그리고 곧바로 무개차(석탄차)에 봉기군이 타고 순천으로 향한다. 첫차와 시간 간격은 30분 이내였다. 다시 9시경 수하물 한 량을 단 임시기차를 봉기군이 타고 순천으로 향한다. 봉기군은 최소한 세 차례에 걸쳐 800명~1,000명 정도가 북상 길에 오른다.

전라선 폐선부지 공원이 된 미평역사. 역으로 역할은 못하고 현재 비어있다. ⓒ박성태 2020

여수역 출발한 봉기군이 북상 길에 오르면서 첫 번째 맞이한 역이 미평역이다. 미평역이 있던 곳은 2011년 전라선 이동으로 현재는 비어있다. 미평역은 당시 오림동, 문수동, 여서동, 미평동, 둔덕동, 상암동 등 여수읍 북쪽 사람들이 애용하는 역이다. 제14연대 군인 중에 이곳 출신도 적지 않았다. 미평역은 신월리 제14연대에서 시내로 나가지 않고 한재(대치마을)를 넘어 이곳에 와서 기차를 타고 북상한다. 제14연대 군인 중 유일하게 연락이 되신 김○○ 어르신도 미평역에서 무개차를 타고 북상하여 지리산으로 입산한다.

미평역은 토벌군에게도 중요한 위치였다. (미평역 관련 상세한 내용은 6편  '굽이친 길에서 만난 전투' 에서 다시 언급) 

주철희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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