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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①

(1)봉기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진 14연대

일제 강점기말 여수항공기지(해군202부대)를 신월리 앞바다에
광복하자 90%공사로 형태 갖춘 빈막사 남기고 일본군 철수
바로 그 위치 신월리에 1946년 국군 14연대 창설
정부수립 이전인 1948년 4월 제주4.3항쟁 발발
제주경비사령부, 14연대 1개 대대에 제주출병 명령
14연대 ‘병사위원회’ 동족상잔 결사반대하며 궐기
신월리에서 여수역으로 가려면 시내 관통해야만

  • 입력 2020.10.18 23:52
  • 수정 2020.10.27 10:06
  • 기자명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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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소개글

본지는 여수뉴스타임즈와 공동으로 여순항쟁 특집 “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를 연재합니다. 여순항쟁의 시발지인 여수에서는 당시 어떤 지점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상세한 정보를 각 주요 장소별로 정리하는 의미 있는 시도를 하려고 합니다.

책임감수와 글은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가 맡았고, 언론인 출신 박성태 사진작가가 현장촬영으로 참여합니다. 양사 곽준호, 오병종 기자도 취재에 협조하게 됩니다여순항쟁의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1948년의 그때 그 자리는 아래 제목의 순서대로 19일 제1편을 시작으로 10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1) 봉기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진 14연대 
(2) 봉기군, 여수역으로 향하다
(3) 북상길에 오른 봉기군
(4) 함성으로 가득한 여수 시내
(5) 바다로 들어오는 토벌부대
(6) 굽이친 길에서 만난 전투
(7) 포격으로 불타는 여수시내
(8) 남녀노소 학교로 모여들다
(9)
 손가락총에 피로 물든 여수
(10) 만성리 형제묘의 진실

 제14연대 주둔지는 여수군 여수읍 신월리이다. 일제강점기 1942년 8월경 가막만 앞바다가 ㄷ자형으로 천연요새 형태의 신월리 지형을 이용해 여수항공기지(해군 202부대)를 건설된다. 단순 해군기지가 아니었다. 태평양전쟁의 군수품을 만들어 일본과 동남아시아 전쟁터로 가져가기 위해 군사시설이었다. 일제는 군수품을 이동하기 위해 미평역까지 철도(신월리)로 건설했다. 그 흔적은 여수 곳곳에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신월동 한화여수공장의 한가운데 있는 굴뚝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굴뚝  ⓒ 주철희

이곳에 부대와 군수품 공장을 만들기 위한 공사는 일본토목회사가 맡았다. 이곳에 동원된 노동자는 형무소 재소자를 비롯하여 전남동부지역 6군 그리고 광주에서까지 동원된 근로보국대(중학교 학생)가 2개월씩 교대로 강제노역이었다. 순천중학교(현 순천고등학교)의 기념관에는 이곳에 와서 근로보국대로 활동을 했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해방 무렵에는 거의 90% 가까운 공정을 보였으며, 일본이 종전선언(일반적으로 항복으로 표기)으로 빈 막사로 남았다.

 

14연대 신월리에 창설하다

14연대 주둔지 현재의 모습과 칼마이던스 사진과 비교하며 촬영했다. 책자의 칼마이던스 사진은 제 14연대본부에서 부대 막사를 촬영한 모습니다.  두 사진의 가막만,소호동,화양면 산자락 모습이 일치한다.  ⓒ 박성태 2020

1946년 1월부터 도청 소재지 별로 9개 연대의 국방경비대가 창설된다. 전라남도의 경우 1946년 2월 제4연대가 광주에서 창설되면서 모병이 시작되었고, 1948년 1월 부대 편성을 완료했다. 1948년 5․10총선거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되면 미군이 철수하기로 되어 있었다. 미군 철수로 인한 국방력 약화를 방지하기 위해 6개 연대(제10연대~제15연대)를 창설하면서, 5개 여단에 15개 연대가 된다. 1948년 9월 5일 국방경비대는 육군, 해안경비대는 해군으로 전환하면서 국군이 탄생한다.

당시 1개 연대는 3개 대대, 12개 중대, 48개 소대와 192개 분대로 구성됐다. 이외에도 연대에는 본부중대, 군기대, 의무대, 통신대 등이 있었다. 당시 연대의 편제상 병력은 2,781명이었으나, 대부분 연대는 병력을 채우지 못했다. 제14연대 병력은 대략 2,200명~2,500명 정도였다. 부대 환경이 매우 열악했기에, 병사들의 부침이 심했다.

제 5여단 14연대 깃발을 미군이 들고 있다. 칼마이던스 사진

제14연대는 광주에 주둔한 제4연대 안영길 대위 등 기간 병력 1개 대대가 1948년 4월부터 신월리에 내려와 창설 준비와 전남동부지역을 중심으로 병사를 모병했다. 1948년 5월 4일 창설한 제14연대의 초대 연대장은 이영순 소령이다. 이윽고 제주 제9연대장을 역임한 김익렬 중령, 오동기 소령을 거쳐 1948년 10월 초순 박승훈 중령이 연대장으로 부임한다.

대한민국 수립 이전에 발생한 제주4․3항쟁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승만 정권에게도 부담이었다.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를 인정받는 데 걸림돌이었으며, 통치능력을 시험받는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은 강경 초토화 작전을 결정한다.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 제5여단 여단장)를 설치하고 여수 주둔 제14연대 1개 대대 출병을 명령한다. 제주경비사령관에게는 ‘숙청 행동간 고등군법회의의 관할 권할’도 부여했다.

1948년 10월 19일 제14연대 병사위원회는 동포의 학살은 국군의 사명에 부합하지 않은 명령이라면서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퇴’를 요구하며 총궐기했다.

14연대 봉기 주도 병사들의 애국인민에 호소하는 호소문. '동족상잔 결사반대','미군측시철퇴'를 요구했다.

봉기의 주도는 김지회 중위, 홍순석 중위, 이기종 중위 등 국방경비사관학교 3기의 중위그룹이 주축이었으며, 부대원을 선동하는 역할은 지창수 특무상사가 맡았다. 즉 지창수가 부대 연병장 연단에서 연설을 했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남로당 지령으로 ‘반란’이 발발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지창수를 등장시켰으며, 인민해방군 연대장이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고 있다.

19일 밤 9시경 시작한 봉기는 다음날(20일) 1시경에 부대를 장악한다. 병사위원회는 지리산에서 유격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여수역으로 향했다. 병사위원회의 봉기는 철저한 계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주 민족국가의 간성(干城, 나라를 지키는 군대나 인물)이 되고자 군인이 되었는데, 동포의 학살이라는 제주도 출병 명령이 갑작스럽게 하달된 상황에서 돌발적으로 발발했다. 봉기의 주도세력(병사위원회)은 제주도 출병 명령의 부당함에 봉기했지만, 대부분 병사는 군과 경찰의 충돌로 궐기한 것으로 상황을 인식했다.

 

반헌법적인 부당한 명령에 궐기하다

1947년 4월 순천, 7월 영암, 1948년 5월 곡성, 7월 목포, 9월 구례 등 여러 차례 군과 경찰이 충돌했다. 군과 경찰의 충돌에 항상 군인이 사망하거나 피해를 당했다. 하지만, 경찰에게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았기에 불만이 가득했다. 병사위원회에서는 이러한 병사들의 감정을 적절하게 선동했다. 대부분 병사는 북상, 즉 전남의 수도였던 광주로 향하여 전남 경찰에게 앙갚음 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기에 궐기에 거부감이 없었고, 여수역으로 향하는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봉기 이후 제14연대 병사들의 행동은 세 가지로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봉기의 주도세력과 함께 북상한 세력이다. 대략 800명~1,000명 정도이다. 둘째, 부대 또는 여수에 남아있다가 토벌군이 여수를 점령 후에 체포된 병사들이다. 이들은 대전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았다. 대략 700여 명이다. 셋째, 고향으로 피신한 병사들이다. 당시 제14연대 군인은 여수․순천 등 전남동부지역뿐만 아니라 해남․무안 등 전남 곳곳에서 모병했다. 이들은 조사를 받아 혐의가 나타나면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군에 재입대했다.

20일 새벽 1시경 부대 장악에 성공한 병사위원회는 신월리 제14연대에서 여수역으로 이동하여 북상을 시작했다. 당시 제14연대는 여수읍의 서쪽에 끝에 있었고, 여수역은 동쪽 끝에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으로 제14연대가 여수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여수 시내 중심지를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즉 제14연대가 처음부터 여수 시내를 장악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글  주철희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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