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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진남관 기둥, "68개 아닌 원래 70개였다"

여태 육안으로 보이는 68개 진남관 기둥 그대로 통용
해체 과정에서 마루 밑에 2개 초석과 잘린 기둥 확인
잘린 기둥의 윗부분과 연결되는 큰 들보엔 연결 흔적 있어
2개 기둥의 변형 시기는 현재까지 기록으로 확인되진 않아
대대적인 보수공사 때나 일제 강점기 용도변경 때일 가능성

  • 입력 2020.11.29 08:53
  • 수정 2020.11.30 08:00
  • 기자명 오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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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관 보수하는 덧집 1층에는 기둥 밑둥 2개 포함해 해체시 나온 기둥 70개가 진열돼 있다. 공사 현장 책임자인 문화재기술자 천성열 소장(오른쪽)과 여수시 김지선 과장(왼쪽)이 새로 확인된 두 개의 기둥에 관해 얘길 나누고 있다. (거리두기 1.5단계 이전의 사진임) 

여수의 상징건물인 진남관은 지금까지 기둥이 68개로 알려졌다. 하지만 해체보수를 마치면 70개가 된다. 마루 밑에서 두 개의 초석과 그 위에 잘린 기둥 밑부분이 확인된 것이다. 임의적인 위치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고 건물 중앙을 기준으로 서로 대칭되는 위치에서 하나씩 발견되었다. 잘려진 기둥 2개가 복원된다.

보수중이어서 현재 진남관은 덧집 안에 들어 있다.

현재 국보 제 304호 여수 진남관은 해체보수작업 중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구조적 불안정성이 있다고 판단했고, 추가 훼손을 염려해서 문화재청은 지난 2014년에 보수작업을 위한 설계승인을 하고 2015년에 공사 착공에 들어가, 가설 덧집을 짓고 2018년 3월부터 1년 동안 해체작업을 진행했다. 지금은 기초 초석 공사부터 차근차근 복원작업에 들어간 상태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 2020.11.23. 진남관을 감싼 거대한 덧집,"그 안이 궁금하다"]

이번 해체 과정에서 획인된 밑둥만 남은 두 개의 기둥 모습. 이 기둥의 밑부분은 초석에 얹어졌고 위부분은 마루의 표면으로 그대로 마루에 노출되었다.

덧집 1층에는 해체한 기둥이 진열되어 있다. 여수시 문화예술과 김지선 과장으로부터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70개 기둥에 대한 얘기를 들어 보자.

“진남관 기둥 해체는 지난 2018년 12월에서 2019년 1월까지 이어졌는데, 그때 해체한 기둥이 이곳에 진열돼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정상적인 큰 기둥 68개가 있구요, 밑둥만 남은 기둥 두 개가 있습니다. 아주 짧게 두 개의 기둥도 건물 해체하면서 이렇게 나와서 70개 기둥이 여기 진열돼 있습니다. 진남관 기둥은 앞으로 70개로 복원될겁니다.”

이번 복원 설계도에도 70개의 기둥으로 복원이 된다. 두 개의 작은 기둥은 잘려진 것으로 판단해 다른 기둥과 같은 크기로 복원하게 된다.

여수 진남관 해체보수작업 설계도에 나타난 평면도. 기둥이 70개로 나타나 있다. 68번,69번 기둥 두 곳은 빨간 마름모 표시가 되어 있고 '복원고주 2개소 신설'로 기둥이 복원된다고 표기돼 있다. 자료 여수시 제공

 

위의 진남관 설계도 평면도를 쉽게 그림으로 표기한 모습 .  68번,69번 위치가 새로 복원될 기둥이다. 그래픽 ⓒ정원석

현장에서 만난 문화재보수기술자 천성열씨는 기둥의 윗부분과 대량(큰 들보)이 연결되는데, 잘렸다고 추정되는 기둥 68번과 69번이 마주한 대량에는기둥에 연결된 흔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전통건축물은 설계도면에 기둥 번호를 매기는데요, 복원 설계도에 (진남관 기둥번호는) 70번까지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 확인된 대칭된 곳의 두 군데 기둥은 도면상 68번, 69번입니다. 각 기둥의 초석도 확인되었습니다.

기둥을 보면 초석에 기둥 밑부분이 연결되고, 잘려나가 없어진것으로 여겨지는 기둥의 제일 윗 부분이 대량(큰 들보)과 연결이 되는데요, 해당되는 대량 밑에 기둥이 꽂혀졌던 흔적이 확인됐습니다. 그래서 이번 보수작업에 그 기둥을 다른 기둥과 같은 형태로 초석에서 큰 들보까지 연결되는 크기로 복원을 하게 될겁니다.”

69번 잘린 기둥의 윗 부분. 잘려진 형태 그대로 마루의 일부가 되었다. 마루에서부터 대량(큰 들보)으로 연결되는 부분의 기둥이 잘려진 셈이다.

발견된 두 개의 짧은 기둥은 초석에서부터 진남관 마루바닥의 높이만큼 잘려졌다. 잘린 윗 부분 표면이 마루 바닥의 일부가 되었다.

지금은 해체돼 확인할 길이 없지만 잘린 기둥의 윗 부분이 그대로 마루바닥임을 확인해 주는 사진이 한 장 있다.

국가기록원의 사진(여수진남관 거북선 전시. 1984년 공보처 홍보국)에는 잘린 기둥 윗 부분이 진남관 마루의 일부로 희미하게나마 나타나있다. 69번 기둥 윗부분을 국가기록원 사진에 추가해서 비교했다. 

80년대 진남관 내부 마루 위에 전시된 거북선이 놓인 사진에는 거북선 주변 일부 마루를 자세히 보면 잘린 기둥(69번)의 윗부분이 그대로 마루바닥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모든 기록에는 진남관 기둥을 68개라고 표기했을까?

여수시 홈페이지 ‘여수문화관광’소개에도 진난관은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돼 있는 것으로, ‘다음백과’를 비롯한 각종 안내에도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된 건물”로 표기돼 있다.

기금까지 각종 진남관 안내에는 죄다 "기둥이 68개"로 표기돼 있다. 다음백과에도 68개로 나타났다. 사진 다음백과 캡처 

지금까지 진남관 기둥을 68개라고 소개한 데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진남관의 기둥이 육안으로 일단 68개였기 때문이다. 원래 70개에서 2개가 변형돼 겉으로는 68개만 보였던 것이다.

이번 해체 과정에서 추가로 두개의 초석과 일부 기둥이 확인되었지만, 명확히 진남관 기둥이 70개라는 국가공인 기록은 확인하지 못했다.  기둥이 70개라는 사실 확인은 그 동안의 기록이나 보수 내역에서 유추할 수 밖에 없다. 누군가 확실한 역사적 기록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그렇다면 첫번째 가설로 애당초 건물을 지을 때부터 잘린 기둥으로 지었다는 사실이다. 그럴려면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유없이 굳이 두 군데 기둥만을 초석도 놓고 짧게 마루바닥에서 끝내는 기둥으로 설계했을 리가 없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잘린 기둥으로는 복원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우리 전통 건축의 가장 중요한 기록은 상량문이다. 지난 2019년 9월 11일에 진남관 해체 공사중에 3개의 상량문이 나왔다. 지금은 진남관 아래 '임란유물전시관'에 이 상량문들이 전시돼 있다.

진남관 바로 아래 '임란유물전시관'에 전시된 진남관 상량문 중 1899년판 종이 상량문.

창건 후 불에 타 재건한 해인 1718년의 목판 상량문과 1898년부터 1899년까지 보수한 기록이 적힌 1899년판 종이 상량문, 그리고 가장 최근인 1965년도 상량문, 이렇게 3개다.

첫 목판본 상량문에도 기둥 숫자를 확인할 수 없다. 1965년도 종이 상량문도 건물 연혁과 수리했다는 내용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짧은 내용이다. 기둥을 수리한 내용이 적혀있지 않다.

가장 상세한 내용이 적힌 것은 1899년 종이 상량문이다. 거기에는 1898년 7월 24일 보수를 시작하여 1899년 군수 최정익에 의하여 보수를 완료했다는 내용이 적혀있고, 하단에 중요한 공사 날자가 ‘조성택일(조성한 날자)’로 표기돼 차례로 적혀있다.

상량문 하단 성조택일(成造擇日)에 정초(定礎).수주(竪柱) 기해(1899년)  4월 27일로 적혀 있다. 수주 즉 기둥 다시 세우는 일을 당시 했단 기록이다. 진남관 1899년판 상량문 중에서

파옥(해체), 개기(기단을 보이게 한 공사), 정초, 수주, 상량 등이 이뤄진 날자가 적혀있다. 공사를 짐작할 정도의 단어만 적혀있다. 여기서 기둥을 세웠다는 ‘수주(竪柱)’라는 공사 명칭이다. 기둥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보수공사가 이뤄진 것을 뜻하기는 하나, 기둥의 무슨 보수공사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때 기둥 보수 작업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1899년 보수작업시에 두 군데 기둥의 변형이 있었을 가능성의 가설을 제기한다.

또 하나의 가설은 1911년부터 1961년까지 학교로 사용하면서 원형을 훼손했는데 그 때 두 개의 기둥이 변형되었을 가능성이다.

진남관이 학교로 사용되던 1930년 사진. 사진에 보면 건물 내부가 교사로 사용되면서 진남관 변형 흔적이 있다. 사진 출처: 1995년도 여수시에서 발간한 '사진으로보는 여수발전사'

이번 해체복원 과정에 여수시가 발간한 조사보고서의 ‘진남관의 보수이력’에는 진남관을 1911년 여수공립보통학교로 사용하면서 용도변경으로 원형이 훼손되었다는 내용이 언급돼 있다. 그 이후로도 1961년까지 학교로 사용되었다.

여수시 문화예술과 문화재 담당 강한빛 주무관은 보수과정이나 용도변경 과정에서 기둥의 변형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확실하게 ‘진남관 기둥이 70개였는데 도중에 두 곳이 변형됐다’는 기록을 찾기는 힘듭니다. 여러차례 보수를 했었는데 보수 내역에도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초석과 기둥 밑둥, 그 기둥과 연결되는 들보에 남은 기둥의 흔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문화재청에서 기둥을 70개로 복원하기로 결정을 한겁니다.

언제 기둥이 원형에서 훼손이 되었을까 추측을 해보면, 두 번 정도 개연성이 있는 공사가 있었습니다. 우선 보수 내용에 ‘수주’라는 표현이 있는 상량문으로 봐서 1899년 보수했을 때일 가능성이 있고요, 두번째는 일제 강점기 교사로 사용하면서 교실 공간등의 확보를 위해서 기둥 변형 가능성이 있었다고 봅니다. 기록이 없으니 '가능성'이라고 추론을 하는 것 뿐이죠.”

1930년 보통학교 12회 졸업생 사진. 배경이 되는 진남관 내부가 교실 등으로 사용된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사진 출처 : 1995년간, 여수시의 '사진으로보는 여수발전사'

그런가하면 초석(기둥)이 70개로 확인된 1969년의 논문이 한 편 존재한다.

1969년 12월호 ‘대한건축학회지’에 실린 “여수진남관 실보고”(저자 강봉진)에 수록된 진남관 평면도에는 기둥(초석)이 70개로 나타나 있다. 기둥과 초석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다. 이 논문은 진남관이 1963년도에 보물로 지정되고 난 후의 조사 보고서다.

결국 이번 진남관해체 보수과정에서 기둥과 초석이 70개라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닌 셈이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미 1960년대에 70개라고 확인은 된 상태였다.

보수 후에는 진남관을 소개하는 모든 안내문에는 ‘기둥 70개로 구성된 건물’이라고 수정이 될 것이다. 현존하는 지방관아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 크기의 건축물이 지닌 위용이 이제 더 명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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