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도 방파제를 걸어 들어가면서 나는 예전에 종포(종화동 해양공원 일대) 뱃머리 싸구려 술집 작부 백화가 생각났다.
방석집이라고 부른 싸구려 술집 백화는 나무탁자와 찌그러진 막걸리 잔을 젓가락으로 번갈아 두들기며 오동동 타령을 불렀다. 군인을 속되게 일컫는 군바리 손님인 나를 앞에 두고 백화는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일병 계급장을 달고 첫 휴가를 나온 나도 젓가락을 두들기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백화가 부른 오동동 타령이 여수 오동도(梧桐島)인지 아니면 마산 오동동(午東同)인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동백이 필 무렵 여수 오동도에는 음주가무를 즐기는 흰옷 입은 어른들이 오동동 타령 노래를 부르던 기억만은 뚜렷했다. 장구를 둘러 멘 어른이 흥을 돋우면 막걸리를 마시던 중년남녀 무리가 일어나 덩실덩실 어깨춤을 쳤다.
동백이 필 무렵, 붉은 오동도에 목화솜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게 내 유년시절 여수 어른들의 대중유흥문화였다. 장구라는 한국 전통악기 장단에 일제 식민지시절 유입된 일본 연가 영향을 받은 뽕짝이 불리어지는 묘한 대중유흥문화 판이 벌어졌다. 그래서 오동도는 청소년 출입금지구역이었다.
국립공원으로 변한 오동도가 청소년출입금지구역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어느 정도 연배가 되신 분이다. 원래 오동도와 연결된 방파제가 없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식민지 여수 역사를 아는 사람이다.
일제는 호남평야에서 수탈한 쌀을 일본 시모노세키로 반출하고 중국대륙을 침탈할 군수물자를 실어 올 항구가 여수에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인 노무자들 동원하여 오동도까지 방파제를 건설했다. 일제 군국주의 폭력에 의해 건설된 오동도 방파제는 해방 후 오동도로 건너가는 다리가 되었다. 그리곤 오동도는 야외유흥지가 되었다.
오동도가 중년들의 카르페 디엠(enjoy the present) 무대였다면, 지금의 해양공원 일대는 선창가 어부들을 고객대상으로 특화된 홍등가이었다. 일명 '방석집'이라고 불리는 낡은 목조 술집들이 많았다. 그래서 청소년출입금지구역이었다. 그곳에는 기생 축에 끼지도 못한 나이든 술집작부들이 어부들을 상대로 뽕짝을 부르며 술을 팔았다. 오동동 타령을 부른 백화도 그 중 한명이었다.
그렇다고 여수에 대중유흥문화만 형성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문화시설도 있었다. 헤밍웨이 원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명작을 감상 할 수 있는 극장이었다.
극장에서 명작이 상영될 때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인솔해서 영화단체관람을 시켜주었다. 그 덕분에 청소년들은 결핍된 문화욕구를 일정정도 충족하기도 했다.
청춘들은 주로 중앙동 음악다방에서 문화욕구를 해소하였다. 뿌리 음악실, 가나다 다실 같은 곳은 미국 대중가요인 팝송을 듣고 따라 부를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이었다.
일제 식민지 여수를 거쳐 온 중년들은 식민지 유산인 뽕짝을 불렀다면, 청춘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팝송을 부르면서 대중유흥문화와 지적으로 차별화 시키고 분리하여 시대의 경계와 공간을 그었다. 그러나 둘 다 이 땅을 지배한 군국주의와 팍스아메리카 (PaxAmerica)에 의해 실려 와서 형성된 대중문화였다.
여기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문화의 이면에는 통시적 공시적 어떤 힘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수가 유별나게 문화에 있어 힘의 의지를 느끼게 하는 까닭은 자연과 시공간 지형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문화 향교와 민중 놀이문화인 소동패 놀이, 백초풍물, 돌산 풀들게 놀이 등 노동협동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문화가 토양을 이루던 여수는, 일제강점기 피지배 식민지를 거치면서 전통문화를 밀어내고 왜색문화, 윤락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서울에서도 보기 드문 대형 요정인 해월루, 영춘원 등은 여수에 어떤 힘이 폭력적으로 작동했는지 상징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많은 기생이 상주하면서 일본 관료나 친일 사업가들이 드나들던 요정문화의 중심에는 일제군국주의 폭력의 역사가 숨어 있는 것이고, 이런 야망의 역사가 지배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문화에는 지배와 피지배라는 폭력적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말 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한걸음 더 나아가 ‘문화는 야만의 역사가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지배자는 자기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피지배자에게 강요하고, 지배문화에 편입된 소수 선택받은 피지배 사람은 선망의 대상이 된다. 대중은 이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지배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친 후에도 여수 곳곳에 안방이라고 불리었던 한옥 요정과 서구식 사교클럽 살롱은 제국에 의한 폭력의 흔적이다. 니체는 이를 두고 문화는 거리의 파토스(pathos)이고 여기서 문화가 시작된다고 했다.
이렇듯 문화는 고급문화이든 대중문화이든 평등하지 않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주창된 에갈리떼( egalite 평등)는 자본주의를 거치면서 불평등으로 나타났다. 신흥 부르주아지들은 귀족들의 궁정문화를 매수하여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가들을 사육하다시피 하여 그들만의 고급 살롱문화를 누리고 발전시켰다.
문화예술인들은 창작과 먹고살기 위해 부르주아지들의 지배에 편입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급문화예술은 지배문화인 것이다. 그러나 지배문화는 단지 한 시대를 지배하고 추종의 대상이 될 뿐이지, 결코 하층민에게 전파되어 토양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대하여 칼 마르크스는 계몽을 외치는 그 소중한 인간의 평등과 자유외침으로 중세로부터 상당히 많은 해방을 얻은 것은 인정하지만, 그 혁명이 하층민까지 내려가서 토양을 이루는 노동자에게 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문화는 평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와 다르다는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나는 너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댄디즘(dandyism)으로 발현된다. 대형할인마켓과 차별화되는 명품백화점 쇼핑문화, 서민아파트와 변별되는 타워벨리스 아파트 문화, 서열화 된 대학문화가 그 증표인 것이다. 이것을 니체, 푸코 식으로 말하면 문화의 이면에는 힘(권력, 돈, 서열화 된 대학 등)의 의지가 폭력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란 무엇인지 되짚을 필요가 있다. 문화란, 한 시대의 토양과 관계되는 존재론적 것이다. 건축물 같은 유형문화와 도덕, 윤리, 철학, 예술 등 무형문화는 인간이 정신을 가지고 유무형으로 경작해 놓은 모든 것을 말한다.
문화(culture)의 어원 자체가 '경작하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특정한 인간집단 또는 지역에서 나타나는 생활양식인 것이다. 인간정신을 가지고 경작된 생활양식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일종의 세계관 혹은 사유구조를 형성하다 쇠퇴하는데, 이를 그리스어로 에피스테메(episteme)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문화는 세대와 지역에 따라 한 시대의 토양이고 이는 폭력적 힘에 의해 공시성과 통시적으로 발달하다 사라지는 것을 여수의 문화변천을 통해서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그 폭력적 힘이 여수에 요정을 생겨나게 하고, 요정을 추종하는 대중이 방석집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요정과 방석집은 엄연히 질적으로 차별화된 경계선 있다. 오동도의 뽕작과 중앙동 음악다실의 팝송은 시대에 따라 지배의 주체가 바뀌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오동동 타령을 부른 술집 작부 백화에게도 팝송가사를 한글발음으로 써 놓은 노래책이 있었다.
세월은 흘렀다. 이제 고급문화 불모지였던 여수가 문화 르네상스를 맞이한 것 같다. 여수 지역신문들에는 빠짐없이 공연이나 전시행사 기사가 실린다. 여수에 문화계몽주의 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다.
적어도 물리적으로 본다면 여수는 손색없는 고급문화도시 같다. 대자본이 운영하는 멀티복합 영화관이 들어서고, 대기업이 세운 예술 공연전시장인 GS칼텍스 예울마루와 많은 자본이 투입되어 만들어진 돌산 예술랜드 등을 보면 그렇다.
더구나 개별 문화예술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갤러리 같은 전시 공간 등도 곳곳에 포진해 있으니, 이 정도면 여수는 충분히 문화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여기에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대도시에 비해 임대료가 싸다는 장점 때문에 문화예술가들이 정착해가면서 여수를 문화도시로 장식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여수는 그토록 갈망하는 문화도시가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관광객이 여수를 문화도시로 인식할까. 정말 여수는 문화도시이고 여수시민은 문화의 주인공인가.
내가 바라보기로는 비관적이다. 왜냐면 서울 홍대 기찻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서울 홍대 옆을 지나가는 기찻길을 따라 늘어서 있던 낡은 목조 건물들에는 저렴한 임대료 때문에 가난한 예술가들은 몰려들었다. 이들이 만들어낸 문화예술을 따라 관광객이 몰려들자 자본이 뒤따라 들어와 재개발을 하면서 세련된 카페거리가 생겨났고 임대료는 치솟았다.
가난한 문화예술가들은 치솟는 임대료를 낼 수 없자 홍대 기찻길을 떠났다. 그 자리에는 술집들이 늘어서 지금의 유흥가 홍대거리로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을 빈민가의 고급 주택지화를 뜻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이라고 한다.
여수 종포 싸구려 술집 대신 세련된 카페가 들어서도록 만든 것은 관료들의 행정력이 아니다. 거리 뮤지션 등 가난한 예술가의 미학이다. 문화예술을 찾아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공간문화가치가 상승하면 자본을 지닌 개발자들이 들어와 이윤을 창출하는 자본문화공간으로 바꾸어버린다. 문화에 대해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 행정관료들은 개발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허가서에 도장을 찍어 준다.
이로써 문화와 미학이 강화된 공간은 지대가격이 상승하게 되고 이것은 관광객을 불러들였던 가난한 문화예술가들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들어버린다. 산업사회 유물인 창고나 공장 공터 등 가난한 예술가들이 활동하던 곳은 부유층의 ‘힙합’ 공간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것은 자본이라는 폭력적 힘과 이에 발전이라는 타이틀로 부응하는 관료들의 합작품이다. 미국 뉴욕이 뒷골목이 그랬고 서울의 홍대거리가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문화가 토양을 이루지 못하고 계급문화, 차별문화, 그들만의 문화만 남게 된다. 일제 식민지 문화, 팍스아메리카 문화와 또 다른 자본이라는 폭력에 의한 문화가 번창하게 되고, 여수는 문화가 토양을 이루는 도시가 아니라 자본의 힘에 지배받는 계급화 된 문화 도시가 되어 갈 수밖에 없다.
예울마루에서 교향곡이 울려 퍼진들, 중앙동 상가거리에서 오페라가 공연이 펼쳐진들, 주체와 소비가 분리되고 신흥귀족과 대중이 분리되는 계급 쌍곡선만 크게 그려질 뿐이다. 그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그어지며 그 틈을 채우는 것은 문화로 창출되는 이윤이다.
종포 싸구려 술집 작부 백화는 어디로 갔을까. 아직도 문화가 발달하지 못한 어느 섬 술집으로 갔을까. 다음으로 여수를 문화거리로 이끄는 가난한 예술가들은 언제쯤 어디로 떠나게 될까. 여수가 갈망하는 문화가 어떤 것인지 행정관청은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한다.
문화의 주인이 누구이고 숨은 그림자를 들여다봐야 하며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무비판적으로 남용되는 자본의 힘은 여수문화발전에 어떤 식으로 사용되어야 하는지 따져 봐야 한다. 무비판적으로 문화전시공연 소식만을 전하는 지역신문들도 여수가 갈망하는 문화욕망에 대해서 재사유를 해봐야 한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