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 작부 백화를 기차 태워 보낸 대합실에서 장 씨와 영달한테 어디 노인이 어디 일들 가냐고 묻는다.
감옥에서 출소한 장 씨는 고향 삼포로 간다고 대답한다. 노인은 삼포가 관광호텔 짓는다고 복잡하고 변했다고 전해 준다. 막노동꾼 영달은 잘됐다며 일자리 찾아 장 씨를 따라가겠다고 한다. 장 씨는 노인에게 묻고 노인이 답한다.
“그럼 나룻배두 없어졌겠네요.”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는데, 나룻배는 뭐에 쓰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 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벼르다가 고향을 찾아가는 장 씨는 발걸음이 내키지 않는다. 기차는 어둠 속에 차디차고 시린 눈발을 헤치며 고향 삼포를 향해 달린다.
나는 서울에서 고향 여수를 갈 때마다 왜 그런지 황석영 소설 ‘삼포 가는 길’이 떠오른다. 소설처럼 고향 여수 돌산에 다리가 놓여졌다. 화려한 야경을 뽐내는 다리와 해상케이블카가 불을 번쩍이며 오간다. 대신 지금의 해양공원인 종포에서 사람들을 싣고 돌산을 오가던 통통배는 없어졌다. 종포 뱃머리에서 고기를 손질하던 아낙들도 사라졌다.
여수에서 사라진 것은 연등천 백모가지(뱃머리를 백모가지로 불렀다) 술집 작부 백화만 아니다. 개발을 하면서 휘날려 사라진 먼지처럼 여수만의 살가운 정서도 개발 붐을 타고 먼지처럼 사라졌다. 여수역 옆 판자촌 귀환정도 사라졌다. 여수를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사라지게 했다.
일제강점기에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 해방과 함께 귀환한 동포들이 정착했던 곳이다. 그 자리에 여수 엑스포장이 들어서 있다. 신월동 산동네에서 살던 주민들도 방위산업업체가 들어서면서 어디론가 사라져야 했다. 모두 여수를 발전시키고 국가를 위해 사라져야 했다. 사라진 것은 그리움을 자아낸다.
그렇다고 내가 발전에 뒤처져 낙후되었던 옛 여수가 좋았다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성과 끊임없는 변화 속에 발전한다는 역사주의(historicism)를 거부하는 박물관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정신작용은 다양한 자연재료들이 서로 반대되는 것이 짝을 이루고 구조(structure)되어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가 결합되어 파생되는 지금의 여수 정서가 살가웠던 옛 정서에 비해 좋지 못하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게 사라진 것만은 아니다. 재래시장은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내 어릴 적, 그리고 지금까지 서시장은 그대로 있다. 내가 여수에 가면 반드시 들렀다 오는 곳이다. 본디 여수에서 태어나 자랐던 터라 각인된 맛은 잊지 못하는데 그중 말린 서대를 사기 위함이다. 고기장사 아낙과 흥정하면서 나누는 대화도 나에겐 큰 쾌락이다. 심연 저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향수를 민감하게 건드리기 때문이다. 내가 소쿠리에 얹혀있는 민어 두 마리나 비닐봉투에 넣어버리자 고기장사 아낙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린다.
“음마! 글지 마랑께.”
“아따 두 마리만 써비스로 주씨요.”
“오메!오메!! 요거시 을매나 비싼디.”
아…저 낯빛, 어릴 적부터 많이 봐 왔던 불안 공포가 버물려진 낯빛, 서시장에서 좌판 생선 장사하던 친구 엄마가 아들이 내민 육성회비 봉투를 받아들고 짓던 표정. 세월이 먼 발치 너머로 흘러버린 지금도 가난했던 친구 엄마 표정을 보게 된다. 대한민국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고 여수도 몰라보게 발전했는데 왜 아직도 서시장에서 옛날 표정을 보게 되는 것일까.
나는 민어 한 마리만 다시 꺼낸다. 그때서야 서시장 고기장사 아낙의 어두운 표정이도 풀린다. 사투리가 여수 토박이일 것 같아 내가 묻는다.
“저어그 해상케이블카 타 봤소?”
“호강에 겨워 자빠졌다고 비싼 거를 어찌 탄타요.”
“그믄 집이 어디요?”
“종화동인 왜 그런 거를 물어쌌소?”
“종화동 개발 안 됐지라?”
“암씨롱 그요.”
종화동도 언젠가 개발되어 웅천처럼 고층에 고가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다. 그러면 고기장사 아낙은 어디론가 변두리로 밀려 날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여수에 건설되는 아파트 값이 서울 아파트 뺨을 왕복으로 칠 정도인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리 경치가 수려한 여수이지만 떴다방 부동산들이 활개를 치고 경찰이 단속하는 것도 참으로 의문이다.
고층고가 여수 신축 아파트에 여수사람들이 들어가 사는 비율은 얼마나 되는 것인지, 아니 아파트는 그러려니 하더라도 해상케이블카로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여수시민들이 얼마나 혜택을 받고 있는지 그것이 더 의문이다. 그래서 도시별 지니계수를 조사해 봤다.
지니계수란 로렌츠 곡선을 토대로 소득불평등 정도를 지수로 나타낸다. 인구와 소득의 누적 점유율 사이 상관관계 즉 불평등 지수를 가리킨다. 0에 가까우면 평등지수가 높고 멀어지면 불평등 지수가 높은 것이다. 이를 통해서 국가별 불평등 차이를 잴 수 있다.
참고로 불평등 지니계수는 2018년 기준을 살펴보면 한국은 OECD 국가 평균치 보다 훨씬 낮은 곳에 위치한다. 양극화가 심화되어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그래서 ‘헬조선’ ‘흙수저’ ‘금수저’ 같은 신조어가 생겨나는 것이다.
검색해 보니 국내 도시별 지니계수 통계는 없다. 그냥 느낌으로 여수의 불평등지수는 국내 도시 중 하위에 위치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여수의 불평등은 내가 어려서도 심각했다. 도시락에 고구마조차 싸오지 못해 점심을 굶는 학생과 계란부침에 햄이 담긴 도시락을 싸오는 학생들로 나뉘어졌다. 여천공단이 들어서고 나서는 일제 보온도시락과 노란 양은 국산 도시락으로 다시 분리되었다.
이런 양극화는 사회를 긴장시킨다. 그래서 중국 시진핑이 부의 양극화를 줄여 사회긴장 완화를 위해 공동부유(共同富有) 정책을 내세우는 것도 등소평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로 이룬 경제성장으로 불평등 양극화가 심화되자 이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이다.
현 한국 정부가 긴급재난지원금을 국민에게 나눠주는 것도 같이 살자는 작은 한 방편일 뿐이다. 그 돈은 정부에서 국민에게 적선해 주는 것이 아니다. 국민들이 일을 해서 벌어들인 돈을 국가가 다시 국민에게 분배하는 당연한 정책일 뿐이다. 작년인가, 여수에서 시 재난지원금 십만원인지 얼마인지를 시민들에게 분배하는 것을 미루면서도 시청건물 신축을 밀어붙여 논란이 일어나는 것을 신문을 통해 접했다.
도대체 여수를 개발해서 얻은 수익이 누구에게 들어가서 재분배되지 않고 시민에게 나눠줄 재난지원금은 부족하고 아까웠을까. 이번에 분배되는 4차 국가재난지원금, 그것은 적선이 아니고 지니계수를 줄이는 공정한 분배인 것이다. 여수시 행정당국도 차제에 상기하기 바라고, 여수개발로 얻는 수익이 소수에게 집중되지 않고 여수시민에게 재분배되기 바란다.
다음에는 여수시에 들어서 있고 펼쳐지는 각종 문화시설과 예술공연 혜택을 여수시민은 얼마나 받고 있는지 여수 문화지니계수를 알아보기 위해 여수사람을 만나 볼 참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