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만난 청년회관, '여수청년의 힘' 상징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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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만난 청년회관, '여수청년의 힘' 상징 공간
  • 양영제 작가
  • 승인 2020.10.18 0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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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맞돕회' 결성해 시민성금으로 건립
청년들이 어린 학생 가르치는 학원역할도 하던 곳
독립민족운동가 윤형숙 열사도 여수청년회 출신
여순항쟁 기간 청년들의 '정신적 저항 공간'으로 기능
지금은 보존하는 빈 공간인 '여수청년회관'모습. 여수시 관문서5길 7.
지금은 보존하는 빈 공간인 '여수청년회관'모습. 여수시 관문서5길 7.

돌덩이로 지은 여수고등학교 건물은 웅장했다. 꼬맹이었던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운동장도 무지 넓어 자전거 페달을 신나게 밟아도 끝이 닿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여수고등학교를 다니는 큰 형님에게 도시락을 전해 주고 교문을 나와 내리막길을 마구 내달렸다. 그러다가 자전거와 함께 나뒹굴었다.

“오메! 내 새끼야!”

길가에 앉아 있던 할머니 한분이 허둥지둥 달려와서 나를 안았다. 우리 동네 할머니가 아니었다. 그래도 여수 할머니들에게는 누구 집 자식이든 자신의 새끼이었다.

나의 유년의 뜰에 각인된 장면 중 또 다른 할머니가 있다. 무슨 연유인지 손자와 단 둘이 움막 같은 초가집에서 살았다. 매년마다 동네 사람들은 거동 불편한 할머니 대신 공동으로 초가 이엉을 새 볏짚으로 깔았다. 또 동네사람들은 상을 당 한 집이 있으면 죄다 상 치르는데 달라붙었다. 그렇게 나는 여수의 공동체 문화를 보면서 자랐다.

공동체 나눔 중에 신발짝 던지기라는 것이 있다. 지금도 여수 부속 섬에는 남아 있는 미역 나누는 방법이다. 바다에서 공동 노동을 하여 채취한 자연 미역을 듬성듬성 쌓아놓고 노동에 참여한 주민들이 자기 신발을 휙 던지는 것이다. 손으로 던지는 것이 아니라 신발을 신은 채 발로 차서 던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신발짝에 가까운 미역더미를 몫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미역더미가 저울로 재서 쌓아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덜도 있고 더도 있겠지만 불만없이 가져간다. 그리고 부득이 노동에 참여하지 못한 집 몫은 남겨 놓고 가져간다.

소설가 양영제씨가 현장 취재 중 '여수청년회관' 앞에서 셀카를 찍고 있다.

내 유년의 기억에 여수 공동체 문화는 노동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돌아가신 내 큰 형님은 방학 기간에는 도시락을 싸들고 청년회관으로 갔다. 여수에서 중고교를 다녔던 어르신들 중에는 청년회관에서 공부하신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학원이라는 것이 없어 광주나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선배들이 공부를 가르쳐주던 공간이 청년회관이다.

내 형님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 한 후 방학 때 내려오면 청년회관에서 후배들 공부를 지도해 줬다. 그게 여수의 청년학생 선후배 전통이었다. 청년회관은 공부뿐만 아니라, 선후배의 대화와 토론을 통해 자연스럽게 넓은 세상에 대한 정보도 얻고, 자연스럽게 암울한 군사독재 정치에 대해 토로하면서 정치적 인식도 넓힐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런 사적영역 관계의 장에서 사회적인 공론이 형성되는 것을 사회소통이론의 대학자 위르겐 하머마스는 사적 영역을 넘어선 사회적 공론장이라고 부른다.

여수청년회관 안내판
여수청년회관 안내판. '맞돕회' 소개글도 보인다.

여수 청년회관은 일제강점기에 건립되었다. 여수 청년회 구심인 맞돕회(감성돔 같은 회 이름이 아니다. 맞잡고 돕는다는 뜻이다.) 쌀을 한 홉 두 홉 모아 건립기금을 마련했다. 당시 청년회장 정재완은 전답까지 팔아 건립되었다.

청년회관은 관문동 여수경찰서 건너편, 우리은행 뒤편에 가려져 있어 학생들의 발길이 자주 닿지 않는 곳에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무단정치를 하던 시기 일본 헌병대(지금의 여수경찰서 바로 뒤편) 건너편, 일제가 지은 건물(현 우리은행)뒤에 보란 듯이 청년회관을 세웠다. 중학생들 표현을 빌려 표현하자면 여수 청년들은 일제에 굴하지 않고 민족정신으로 ‘맞짱’ 뜨겠다는 것이다.

여수청년회는 1920년 향교에서 여수지방청년회라는 명칭으로 조직된 것으로 전해진다. 전국에서 두 번째로 창립된 계몽단체다. 여수의 유관순이라는 윤형숙 열사가 이 단체 여성회원이다. 청년회 구심점 맞돕회는 독립운동으로 서울 등지에서 퇴학 당 한 유학생들이 고향 여수로 돌아와 야학, 신분타파, 여성교육,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건물이 여수 청년회관이다.

등록문화재 제31호 '여수구청년회관' 문화재청이 지지정한 군대문화유산이다.
등록문화재 제31호 '여수구청년회관' 문화재청이 지지정한 군대문화유산이다.

여수 향교가 유교 제례형식을 통한 전통교육장이라면, 청년회관은 교육과 여론이 형성되는 공론장인 것이다. 일제식민지 하에서 피지배 여수청년들이 청년회관에서 무엇을 토론하고 어떤 공론이 형성되었겠는가. 다름 아닌 민족저항의식이다. 민족저항의식을 바탕으로 공론에 보태진 것은 노동의식이다.

여수는 일제강점기에 수탈구조 지역 거점이었다. 식산은행을 통한 금융착취, 수산공장, 군사철도건설, 부둣가 군수물자 하역 등 조선인 노동 착취가 극심하여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에 노동의식이 중층적으로 심어졌던 것이다. 이는 당시 유럽의 당대 공론 의식과 부합한다.

유럽에서 산업혁명 이후 신흥자본가 부르조아지들은 자신들에게 부족한 귀족예술문화를 충족시키기 위해 프랑스의 살롱, 영국의 커피하우스, 독일의 다과회 등의 공간을 만들었다. 이런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은 여론을 형성하게 되고 정제된 여론의 귀착점은 정치였다. 공론장은 프랑스 대혁명 등 사회변혁을 추동하는 인식 생산 기지였다.

구 여수청년회관 골목길 맞은 편은 우리은행 여수지점이다.
구 여수청년회관 골목길 맞은 편은 우리은행 여수지점이다.

반면 여수 청년회관은 일제식민지라는 억압된 구조적 공간에서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공론장인 청년회관을 세운 것이다. 청년회관 건립은 교육과 토론을 통해 자각되는 여수 청년들을 배출하여 축적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년회관에서는 여성 계몽에도 중점을 뒀는데 이에 의해 자각된 여성 조직이 생겨난다. 그게 여수 여성동맹이다. 해방과 함께 몽양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여수인민위원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여수 여성 단체다. 대표적 여성이 1948년 10월 20일 여수 중앙동 광장에서 열린 인민대회 연단에 올라 14연대 민족봉기군 환영인사를 했던 정기순이다.

여수는 이렇게 고양된 진보적 민족의식이 형성되어 있었기에, 1948년 10월 19일 14연대 민족군사봉기에 촉발된 여수시민 민족항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군사민족봉기가 시민민족항쟁으로 연결되는 정신 구조적 바탕에는 청년회관을 축으로 축적된 공론이 크지 않을 수 없다.

향교의 인륜과 청년회관의 각성된 계급민족의식으로 무장된 여수청년학생들에게는 이승만이 분단을 고착하여 민족공동체를 파괴하고, 친일파를 기용하여 민족자치행정인 인민위원회를 말살하며, 3.1독립운동기념식에 참석한 어린아이를 일본 순사출신 기마경찰이 말발굽으로 밟아 죽여 들고 일어난 제주도민을 토벌하라는 명령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반민족적 범죄 명령이고 반인륜 행위였던 것이다.

하여, 여수 수산학교(지금의 전남대 여수캠퍼스), 여수 중학교(지금의 여수고등학교), 여수 여중(지금의 여수 여고)등 청년학생들은 이승만의 반민족행위에 동맹휴업으로 저항했고, 10월 19일 여순항쟁이 시작되자 해방된 여수치안을 맡았으며, 미군의 지휘를 받는 이승만 진압군에 맞서 총을 들었던 것이다. 이렇듯 14연대 민족군사봉기가 순식간에 여수시민 민족항쟁으로 확산된 근간에는 여수 청년들의 공론장이었던 청년회관이 있었다. 여순항쟁 72주년을 맞아 시민항쟁과 진압군에 의한 학살이 일어난 물리적 공간과 더불어 정신적 저항 공간인 청년회관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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