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날,
비밀스러움이 들어있는 작품집의 첫 장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B작가와의 첫 만남은 시인인 그녀의 남편과의 인연으로 장도에서 이루어졌다.
다부진 입술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그녀의 첫인상과 오랜 외국생활에서 묻어져 나오는 자연스러움은 강하지만 굳어있지 않고 유연하지만 절제된 차분함이 그녀의 눈빛과 표정 속에 어우러져 그녀만의 매력을 충분히 뿜어내고 있었다.
장도의 문화프로그램으로 진행하고 있는 ‘예감(Artistic Feeling)’에서 그녀의 남편인 시인과 함께 토크콘서트를 마치고 술 한잔 나누는 자리에 함께 하였지만 난 그녀의 작품을 직접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와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고 일상적인 이야기로 그녀의 눈을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시인과 화가 부부는 지난 달 파리로 들어가기 전에 장도로 찾아와 그녀의 작품세계를 담은 도록집을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책 속에 느껴지는 진중한 무게감과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그녀를 만나고 싶음에서 함부로 뒤적거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마음에 품고 있었다.
새해 첫날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예술가의 삶 속에 들어가 초록빛나무를 지키고 있는 ‘검은 숲’에 온통 빠져 그녀와 나누지 못한 대화를 슈만의 음악과 함께 하고 있다.
아래는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연주한 슈만의 피아노소나타 1번 영상이다.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숲’은 슈만(R.Schmann,1810-1856)의 피아노 소나타1번 f#단조의 낮은 저음들과 닮았다.
서주(Introduction)에서 들려오는 깊고 낮은 저음들의 울림이 곡 전체를 잡고 있어 30여분의 곡이 끝날때까지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강렬한 힘을 갖고 있다.
사랑과 열정을 담고 있는 선율과 리듬으로 음악을 펼쳐나가지만 본질적인 근원이 담겨있는 저음들이 때로는 아련하게 때로는 엄격하고 신비롭게 다시금 들려질 때마다 듣는 나에게 질문을 한다.
오늘도 진정 살아있는지, 삶 속에 깊은 저음들이 깔려 있는지, 그것들의 방향이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그녀의 숲도 그렇다. 그녀는 말하기를,
”나에게 숲을 그리는 일이란, 거대한 동굴의 검은 입구에 쉼없이 생명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
생명으로 가득찬 그녀의 숲, 화보집으로도 이토록 영혼을 사로잡는 힘이 있는데 언젠가 작품앞에 서서 바라볼 때에 온 몸을 휘감을 경외감, 하늘이 보이지 않는 독일의 검은 숲(Schwartzwald)에서 느꼈던 그 경외감을 그려본다.
언젠가 그녀를 만나면 검은 숲속에서 언뜻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우리 각자가 나무되어 조용한 침묵으로 말이 필요없는 대화를 나누리라.
그녀의 벵센느(bois de vincennes) 숲에서 나는 슈만소나타 1번의 저음을 연주하며 시인인 그녀의 남편은 한 줄 시를 낮게 읊조리는 정경을 그려본다.
가슴 벅찬 그 어울림으로 한줄기 빛의 생명이 어둠과 고독 속에서 함께하리라.
올해는, 바다의 심연을 바라보리라.
진섬다리가 잠길 때에 홀로 존재하는 장도바다를 사랑하며 어둠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바다결을 느껴보리라.
슈만의 저음 속에서 들려오는 도도한 선율의 움직임처럼, 그녀의 검은 숲속에서 비쳐지는 에너지와 생명력처럼, 깊은 심연 속에 깃들인 빛이 주는 메세지를 들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