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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만의 증언] 멱감다 두룩여폭격사건 목격 "조기 낚으러 간 이웃집 사람 죽어"

73년만의 증언, 두룩여 목격자 정채균 어르신
내가 아는 사람도 2명 죽었다...어찌 잊겠나?
신문·방송보고 사건 접해... 공무원 퇴직후 농사지으며 여생 보내

  • 입력 2023.08.29 07:26
  • 수정 2023.08.29 13:59
  • 기자명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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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넷통뉴스에 털어놓은 두룩여 목격자 정채균씨의 증언 모습 ⓒ심명남
▲ 여수넷통뉴스에 털어놓은 두룩여 목격자 정채균씨의 증언 모습 ⓒ심명남

전쟁중 250여명이 탄 피난선 폭격한 ‘이야포미군폭격사건’에 이어 생업중이던 조기낚시배 어민들을 폭격한 ‘두룩여·미군폭격사건’으로 이어진 가운데 두룩여폭격사건을 직접 목격한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 미군폭격사건 73년 만, <여수넷통뉴스>가 이야포두룩여 미군폭격사건 추모제를 이어온지 6년 만이다.

이 같은 사건을 목격한 제보자는 여수시 국동에 거주하는 정채균(89세) 씨다. 당시 나이 16살이었던 그는 두룩여(문여)가 보이는 바닷가 해수욕장에서 이같은 광경을 목격했다.

공무원 이어 20여년 자영업...농사지으며 여생 보내

정씨는 돌산 신복리 신기가 고향이다. 현재 비렁길인 금오도를 오가는 신기항 있는 곳이다. 신기에서 4대째 살았고, 아직도 딸이 고향에서 살고 있다. 국동에서 신기를 오가며 500여평의 농사를 짓고 있는 그는 이제 나이가 들어 작년에 운전면허를 자진 반납하고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채균씨는 1950년 8월 9일 당시 16살 때 두룩여사건을 직접 보고 겪었다. 이같은 사건에 대해 지역 신문과 TV를 보고 알게 되었다. 그는 "여수시의회 박성미 위원장이 이번에 화태리 독정마을에 추모비 제막식을 세운 것을 보고 증언을 하기로 결심했다”라고 밝혔다. 정씨는 당시 14살 때 돌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국동 여항중학교, 여수고, 동아대를 나왔다. 20여년간 공무원으로 퇴직 후 자영업도 20여년 이상을 하며 지금은 소일거리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 두룩여 목격자 정채균씨는 이웃집 사람이 그날 조기잡이 낚시에 나가 죽었는데 희생자로 기록되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심명남
▲ 두룩여 목격자 정채균씨는 이웃집 사람이 그날 조기잡이 낚시에 나가 죽었는데 희생자로 기록되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심명남

<여수넷통뉴스>에 처음 증언한다고 밝힌 정씨는 “지금껏 추모제 관련 신문과 방송에 나온 것을 보고 관심을 가졌고, 이웃집에 죽은 사람이 있는데 기록되었는지 안되었는지 궁금해서 증언하기로 결심했다”라고 밝혔다. 기자는 8월 중순 국동에 위치한 찻집에서 정씨를 만났다. 제보를 위해 그날의 사건들을 메모지에 꼼꼼히 적어온 그는 89세의 나이답지 않게 건강한 모습이었다. 

나도 믿는 사람이고 교회 장로입니다. 당시 16살때지만 기억이 생생해요. 73년전 그때 신기에 125가구 정도 되었는데 어린이들이 많았어요. 아침이면 소를 산에다 놔두고 점심 먹고 소먹이로 갔어요. 신기와 작금리 사이에 지금 제일교회 수련관 밑에 있는 조그마한 해수욕장이 있어 점심 먹고 우리가 5명 정도 멱을 감았어요. 그때 우리가 뒤시라고 불렀죠. 그때 돛단배가 가라앉는 것도 봤어요. 고기를 낚으러 갔다가 물때가 끝나고 헤어지는 판이었죠.

나중에 동네 와보니까 신기 바닷가에 기관포를 쏜 흔적도 봤는데 처음 소련비행기가 쐈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알고 보니 미국 비행기가 쐈다는 것을 알게됐어요. 당시 우리동네 신기에서 강성인(당시 30대 초반) 씨 한명이 조기 낚으러 가서 배에서 죽었고, 군내리도 개떡장이라는 사람도 그날 총 맞아 죽었어요. 그날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도 생생하게 봤는데 그때 많이 놀라서 기억이 생생해요. 총소리가 엄청 컸어요.

"우릴 보고 쏘는 줄 알았다!"

정씨가 이같은 광경을 목격한 것은 오후 1시에서 3시 사이다. "동네 아이들과 소를 먹이러 가서 친구들과 멱을 감다가 전기투 3~4대가 지나가더니 따발총(기관포) 소리가 나서 우리보고 쏘는 줄 알고 놀라 바위틈으로 숨었다”면서 “당시 빗간이와 화태 사이 두룩여(문여)에서 조기가 많이 났는데 횡간도(빗간이), 화태리, 군내리, 대복, 예교사람들도 조기 낚으러 다녔는데 그때 오전에 조기낚시를 하고 들물이 되어 조업을 마치고 오는 시간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신기 마을에서 눈앞에 보이는 두룩여는 정씨가 아버지를 따라 조기낚시를 하러 여러번 다녔단다.

▲ 두룩여 목격자 정채균씨가 증언. 모습 ⓒ심명남
▲ 두룩여 목격자 정채균씨가 증언. 모습 ⓒ심명남

정씨는 ”그때 폭격은 안도에서 지금 화태대교 사이에서 이뤄졌다. 당시 피난민이 많이 와서 순찰을 많이 했던 때다. 나중에 피난민 배가 연도에서 부산으로 간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우리 마을에서 죽은 강석인씨는 아들 한명이 있고 미망인인 마누라는 재가를 해서 순천에서 살다가 부산에서 산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누락되었으면 확인해 봐라”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정씨는 ”얼마전 미군이 한 짓이 문서로 밝혀졌는데 미군이 그렇게 빨갱이도 아닌 어민들이 집으로 오는 것을 폭격한 것은 정보의 미스고 적군도 아닌 아군을 폭격한 것이 세상에 어딨냐?“라고 물으며 ”이런 학살은 미군의 잘못이다. 총들고 있는 사람도 아닌데 생계를 위해 고기 낚으러 간 무고한 사람들을 폭격해서 되겠나? 라며 거듭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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