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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칼럼] 아이의 몰랐던 모습,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부모님과 친구 앞에서 다른 모습의 아이
부모님을 속인건지, 부모가 속은건지?
아이의 다른 모습은 두려움때문입니다

  • 입력 2024.01.28 09:35
  • 수정 2024.01.28 15:43
  • 기자명 주경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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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pixabay
▲ ⓒ출처: pixabay

부모가 된다는 건 굉장한 축복입니다.

하루하루 아이가 자라는 모습은 최고의 감사와 행복과 사랑을 경험하게 합니다. 옹알이하는 모습부터, 하품하는 모습, 하물며 낑낑대며 배설하는 모습도 마냥 귀엽기만 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과 감사가 쌓여서 모성애가 되고, 부성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 아이에게 더 잘해주고 싶고, 더 좋은 것과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물질적 풍요를 위해 밤낮 없이 일을 하다 보면 아이의 마음을 놓치기 쉽고, 아이의 마음만 살피다 보면 불안하고 부족한 부분만 찾아내는 이상한 부모가 되고, 사랑만 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경제적 지원의 부족함을 아이가 온전히 감당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면 미안해지게 됩니다. 어느 것을 더 잘하고, 어떤 부분에 더 집중하는 것이 좋은 부모가 된다는 기준이 없기 때문에 부모는 본인의 경험치 안에서 자녀를 향한 필요와 충분조건을 찾아 내게 됩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되고, 맞벌이하는 부모가 늘고, 더 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 보니 그 속도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할까 봐 부모는 부모 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부모가 된다는 건 행복의 크기만큼 부모로서의 태도, 방식, 가치관에 있어 불안과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합니다. 바로 양육 불안, 양육 스트레스입니다.

▲ ⓒ출처: pixabay
▲ ⓒ출처: pixabay

그래서 아이가 어린이집, 유치원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부모에서 학부모가 되고, 사회적 기준과 가치를 아이에게 주입하게 됩니다. 남들이 하는 방식이다 보니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고 되고, 잘못된 방식이라고 의심하지 못한 채 되려 부모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탓하게 되고 ‘다 너를 위해서’라고 합리화하면서 힘듦을 드러내지 못하게 합니다.

어느날 돌아보니 부모의 노력과 애씀을 알아주어야 할 내 아이는 부모가 만들어놓은 성공 트랙에서 벗어나 가장 뒤처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많이 커버린 아이는 더 이상 부모의 입맛대로 움직여주지도 않습니다. 부모와 같이 있는 공간을 짜증 내고, 시간을 힘들어하고, 목소리를 거부합니다.

‘뭐가 부족해서. 뭐가 모자라서. 뭐가 문제여서.’이런 고민 끝에 상담에 찾아옵니다.
차려놓은 밥상도 못 받아먹는 내 아이를 위해 아버지는 또 한 번 큰 결심을 한 것입니다. ‘내 아이를 이해하고 싶다. 제대로 이해해야 제대로 지원하지 않겠냐?’고 말하면서 그동안 아버지로서 당신이 얼마나 애쓰고 참아왔고, 지금도 참고 있는지를 호소합니다.

▲ ⓒ출처: pixabay
▲ ⓒ출처: pixabay

 

부모로서는 충분히 이해되고, 공감이 갑니다.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욕구와 기대가 너무 과해서 도망치고 싶을 것 같습니다. 부모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 아이, 부모와는 대화도 거부하는 아이, 부모 앞에서 웃지 않는 아이, 부모와는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부모 또한 딜레마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만해야 하나?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 하나?’

아버지 앞에서는 세상 무기력하고, 게으르고, 둔한 아이가 친구들과 있을 때 너무 다른 모습을 보여서 아버지는 딸이 자신을 속인 건지. 아버지로서 자식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건지 혼란스럽다고 하셨습니다.

아이가 아버지를 속인 게 맞을까요?
아버지가 아이를 하나도 모르는 게 맞을까요?

맞는 것도 맞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아이가 친구 앞에서 세상 걱정 없고, 말이 많아지고, 감정을 애써 누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이유는 친구들은 그 모습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친구 앞에서는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의 감정과 표현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계산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긴장하게 됩니다. 자연스러운 모습보다는 큰아이로서의 기특한 모습을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숨 쉬는 것부터 걷는 것까지도 아버지는 자신에게 큰아이, 멋진 아이, 세상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아버지가 기대한 모습이 아니면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아버지를 속일 의도가 있어서라기보다 자신에게 기대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의 다른 모습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자식을 위해 가장 애쓰는 사람도 부모, 염려하는 사람도 부모인데, 부모 앞에서 많은 것을 감추는 모습이 견디기 힘든 겁니다.


세상에는 참 많은 기준이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몇 센티 이상의 키에, 몇 키로 이상의 몸무게가 되어야 정상이라고 말하며, 가족 구조 형태가 다양해졌음에도 여전히 엄마, 아빠와 자녀의 형태를 ‘정상 가족’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공부, 외모, 결혼 조건 등등 많은 기준이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숨통을 조이는 세상입니다.

▲ ⓒ출처: pixabay
▲ ⓒ출처: pixabay

 

세상이 그렇다면 그 기준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그게 사회성이고, 그렇게 되어가는 과정이 사회화일 테니까요. 하지만 부모를 통해 배우는 사회성은 성과가 아닙니다.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를 살려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이가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일관적인 태도로 아이를 지지해 주어야 합니다. 조건부로 자녀에 대한 사랑을 삼키고 뱉는 사람이 아니어야 하며, 사랑을 볼모로 아이의 정서를 통제해서도 안 됩니다.


가끔 저는 부모에게 질문을 합니다.
“아이가 공부하지 못하거나, 기준에서 벗어나면 그땐 아버님 아이가 아닐까요?”
물론, 모든 부모는 어떤 순간에도 아이를 사랑할 거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을 믿습니다. 하지만 정작 믿어야 할 그들의 자녀는 부모를 믿지 못하고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참 슬픈 현실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세상에 있는 많은 기준에서 비켜났을 때, 노력했음에도 그 노력이 채택되지 않아 좌절될 때, 기준 때문에 속상할 때 돌아갈 수 있는안식처여야 하며,, 어떤 조건에도 온전하게 수용해 주는 존재여야 합니다. 수용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이 부모와 친구 앞에서 다른 모습을 드러내게끔 합니다.

‘너를 믿는다. 너는 믿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내 아이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하루에 3번씩만 해 보시고, 그대로 행동하면 아이는 믿음대로 성장하게 됩니다.


연습하고 부모가 되지 않았고, 어느 곳에서도 부모가 되었을 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이제까지의 실수! 수용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건 의도적이며 어떤 변명으로도 덮을 수 없습니다. 아이는 부모를 믿고 싶어 합니다. 부모가 가진 게 적어도 아이들에게 부모는 세상 전부입니다. 부모가 조금 덜 갖고, 덜 배우고, 덜 세련됨을 자녀들에게 들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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