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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여순항쟁 70주년에 여수시민에게 드리는 질문

  • 입력 2018.09.25 10:24
  • 수정 2018.09.25 10:59
  • 기자명 양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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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여수역'작가 양영제.  <여수넷통뉴스>자료 사진

올해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나라를 반민족 이승만 초대 정부에 의한 분단고착이 시작된 지 70년 되는 해입니다. 1948년 제주 4.3 항쟁 역시 70주년입니다. 같은 해 일어난 여순항쟁도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비록 한반도를 38선으로 나눠 미국과 소련이 분할점령하고 있었지만 민족이 분단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의 나라 한 민족이었지요. 그런데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를 세워 분단을 고착화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해방된 나라의 분단획책을 종용하는 미군정과 이승만에 대항하여 각 지역에서는 저항이 일어났습니다.

이 시기 남한에서는 미군정하에 적산 자본을 분배 축적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미증유의 사회 격변, 생계 수단의 강탈, 그리고 생활 조건의 양극화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실상은 폭발의 잠재력을 내포한 사회적 긴장을 창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부를 축적한 자본가 그룹인 한민당은 강력하고 무자비하며 위압적인 독재체제를 세워 이러한 긴장을 억눌러야 했습니다. 또 점령국 미군정은 남한의 통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토착 대리정권이 필요했습니다. 분단을 고착시킨 반민족 이승만 정권이 탄생한 것입니다. 민중들은 여기에 저항한 것입니다.

저항운동의 시작점은 1946년 10월 1일 대구 추수항쟁입니다. 굶주린 민중들이 미군정의 남한점령정책과 배고픔에 항쟁 집회를 가진 것입니다. 대구 추수항쟁의 결과는 미군정에 의해 부활한 친일경찰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17명의 시위대가 사망하였습니다. 분노한 민중은 경찰서를 습격했습니다. 시위지역은 대구 인근 칠곡 예천 등지로 번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전국적 항쟁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충청 서울 전북 전남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경찰의 발포진압은 전주를 끝으로 일단 무력진압이 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미군정과 이승만에 저항하는 항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제주도에서는 3,1절 기념식을 살인 진압하는 친일경찰에 저항하였습니다. 제주 4.3 항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미군의 지휘 하에 이승만 정부 진압군과 경찰 및 서북청년단은 제주도민을 무참히 살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제주도민은 완강히 저항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승만 정부는 여수 신월동 주둔 14연대에 제주도민을 학살하기 위한 증파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여수 신월동 주둔 14 연대는 미군정과 이승만 반민족 정부를 위해 제주 동포를 살육하라는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군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미국과 반민족 정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4연대는 이승만의 명령을 거부하고 군사행동을 하게 됩니다. 군사봉기를 일으킨 것입니다. 14연대 군사봉기는 여수시민에게 항쟁의 불씨를 촉발시켜버렸습니다.

여수와 순천은 미군정과 이승만에 의해 부활된 친일경찰의 동포 수탈이 일제강점기 때 보다 더 극심했고 어느 지역보다 동포탄압이 심했습니다. 이 시기를 거쳐 온 여수 어르신들에게 물어보면 진저리를 칠 정도로 일제순사출신 경찰의 학정은 극심했습니다. 오죽 했으면 여수 어머니들은 아이가 울면서 보채면 순사 온다고 하여 그치게 했겠습니까. 

그런 여수에서 14 연대의 군사봉기는 여수 민중들의 응축되어 있던 저항의식에 불을 붙였습니다. 여순항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1948년 10월 20일 중앙동 로터리에서는 인민대회가 열렸습니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청년학생들은 중앙동 로터에서에서 경찰서까지 행진을 했습니다. 그리고 14연대가 가져온 무기로 무장하고 치안대를 조직 했습니다 철도와 관공서는 정상적으로 일을 보았습니다. 

은행도 문을 열어 그동안 대출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무이자로 대출을 해 주었습니다. 여수는 미군정과 일제순사출신 경찰의 탄압에서 벗어나 진정한 민족 해방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말 해 왔습니다. 여수 지하에 숨어 있던 남로당이 14 연대 지창수 상사 김지회 중위 등에게 지령을 내려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승만 정부 진압군들에 의해 아무 짓도 안 한 양민들까지 빨갱이로 몰려 ‘억울한 희생’을 당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항쟁’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좌우익 이념대립에 의한 ‘희생’ 이라고 주장합니다.

필자 양영제는 소설 『여수역』 저자다.

양영제 작 소설 [여수역] 겉표지

그는 무미건조한 ‘여수사건’이어서는 안된다며 ‘여순항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영제는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여수 동초등학교 다니고 자랐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아버지의 무덤>으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 이혼현상을 사회심리적으로 파헤친 <재혼하면 행복할까>가 있다. 서울시립대 평생교육원 상담심리 강사다. 여순사건을 꾸준히 취재중이며 관련 소설을 준비중이다.

카피라이터 정철은 양영제의 소설 '여수역'을 여순항쟁 70주년인 올해  TV 대하드라마로 만나길 바란다고 본지에서 밝힌 바 있다.

지난 4월 여수에서 '르뽀문학의 특징'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는 필자

이제 여수시민에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질문 전에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을 먼저 제기해야 하겠습니다. 아직까지도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여순항쟁 이미지는 당시 이승만 정부가 왜곡조작해서 발표한 내용인 경찰이나 우익인사에 대한 흉악한 처단, 소요와 혼란을 부추기는 좌익 활동, 진압군에 대항한 학생들의 극렬한 저항으로 고착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누구나 조금만이라도 생각해 보면 이런 의문이 드실 겁니다.

왜 다수의 14연대 군인들이 소수의 남로당 계열 군인들이 선동한 군사행동에 합류했는지?

왜 다수의 학생들과 여수 인민들은 14연대 군사봉기에 가세하게 되었는지?

왜 일부 진압부대 군인들이 도리어 봉기군에 합류했는지?

당시에도 이런 상식적 질문들 제기한 기자가 있습니다. 서울신문사에서 발간한 종합잡지 ‘신천지’ 1948년 11월호에 설국환 기자는 상식적인 질문을 이렇게 던집니다.

"이 사건의 현지로 가면서 우리가 먼저 알고자 한 것이 왜 14연대라는 적지 않는 국군의 병사가 반란을 일으키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답은 서울서 우리가 들은 한 공산당원과 극우파의 공동 전략으로 일으킨 것이었으나, 만일 이 단순한 해석을 그대로 믿는다면 반란의 가능성은 비단 14 연대 뿐은 아니라는 결과에 버려지는 것이며 따라서 금반 사건은 좀 더 상세한 설명 없이는 이해가 곤란한 것이다. "

당시 설국환 기자가 제기한 의문을 중심으로 좀 더 의문을 풀어보겠습니다. 14연대 군사봉기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 일부에서는 군부 내 침투한 일부 남로당 계열 좌익 군인들의 선동에 의 한 것이라고 말 합니다. 

설혹 지창수 상사 등 남로당 계열 군인의 개인적 선동이 있었다고 해도, 여단 병력 중 대다수가 왜 군사봉기에 가담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다.

14 연대 병력의 상당수 연고지는 여수 도서지방과 전남 동북부 인근지역과 출신들입니다. 즉 일제로부터 해방된 나라를 지배하는 것이 미군정이고, 미군정을 대신하는 것이 이승만 정부라는 민족모순에 의해 굶주리고, 일제순사출신 경찰들에게 극심한 핍박을 받은 사람들이 당시 모병제인 군대로 상당수 피신해 들어갔던 것입니다.

설사 14연대 부대 구성원들이 타 지역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해도 제주도민을 학살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부당한 명령을 그대로 따라야 했겠습니까. 만약에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저항하여 일어난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라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부대가 있다고 칩시다. 그 부대가 반란군이겠습니까. 

14 연대 부대원들 역시 명령거부에 따른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지 알면서도 군사봉기를 했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만든 당시 민족모순에 의한 시대 상황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시대 민족모순이라는 것은 일제로부터 해방 된 이 땅을 점령 지배한 미군정, 남한만을 단독으로 정부를 세워 민족을 분단하겠다고 하는 미군정 대리정권인 이승만 반민족 정부, 이를 지탱하는 일제순사 출신 경찰과 일제 천황에게 충성하면서 독립군 때려잡던 일제 황군 출신 군 지휘자들, 그들이 해방된 나라에서 군림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여수시민에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948년 10월 20일 중앙동 로터리에서는 인민대회가 열렸습니다. 많은 여수 시민들이 집결하여 박수를 치며 호응을 했습니다. 그리고 경찰서까지 행진을 했습니다. 청년학생들은 무장을 했고 치안대를 조직했습니다. 

각 관공서는 정상적으로 업무를 보았고 은행 철도 역시 정상운행이 되었습니다. 이런 행동이 지난 군사독재정권 세월동안 왜곡 조작하여 심어준 이미지인 반란군에 동조한 여수 좌익의 소요와 폭동인지요.

이어서 질문 드리겠습니다.

14연대가 군사봉기를 일으킨 후 순천으로 진격하여 광양 백운산 지리산 등지로 은신하기 위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경찰관 74명이 사살 되었습니다. 먼저 저지선을 친 충무파출소 경찰들이 14 연대 봉기군에 의해 죽었고 이어서 여수경찰서를 공격하여 74명의 경찰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봉기군은 경찰서를 공격하였을까요.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 나라에는 몽양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즉각 발족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일제로부터 경찰권을 인수받아 자치 치안대를 조직하여 국내 치안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미군정과 이승만은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대를 내몰고 그 자리에 일제 순사출신들을 다시 경찰로 부활시켰습니다. 미군정과 지지기반이 약한 이승만은 자신들의 지배정책을 효율적으로 통제실시하기 위해서는 동포를 일본 칼로 다스린 경험이 풍부한 일제 조선인 순사 출신들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만약 경찰이 일제 순사출신들이 아니고 해방과 동시에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대가 경찰이 되었다면 봉기군이 경찰서를 공격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또 질문을 드려야겠습니다.

혹자는 여수 중앙동 인민대회 위원장 이용기 등이 남로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수 시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에 가담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은 빨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진압군에 의한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되었다고 책임을 묻습니다. 도무지 이치에 들어맞지 않는 말입니다.

물론 여수 사람들 중에는 해방된 나라의 국가정체성을 사회주의가 적합하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겠지요. 일제 신민지 체제에서 해방 된 후 나라의 정체성 즉 사회가 운영되는 형태를 사회주의 체제로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요. 당시에는 국제공산주의운동(코민테른 comintern)이 활발한 때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당시 남한에 살고 있던 시민들 대다수도 사회주의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미군정이 1946년 8월에 8천명을 상대로 실시한 남한 국가정체성에 관한 설문에 의하면 자본주의를 14%, 사회주의를 70 %가 선호한다고 답했습니다. 대다수 국민들은 해방된 나라가 사회주의 국가가 되길 원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다수 시민들이 바란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은 맑스 엥겔스 공산주의 이론에 입각한 사회주의, 즉 공산주의로 이행해 가는 과정 중 전 단계인 사회주의를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일제가 물러가고 나라가 해방되었으니 공평한 사회를 막연히 바랬던 것이지요. 동포를 짓누르고 부를 누리던 친일파들이 척결된 사회를 바랬던 것이지요. 

일본인 소유였던 토지를 농민들에게 공평하게 나누고 사회적으로 평등한 관계, 그게 그 당시 해방된 나라의 민중들이 생각하는 '사회민주주의'였습니다.

그렇게 될 줄 알았던 나라를 미군정과 이승만에 의한 친일파 부활로 인해 또다시 핍박을 받자 그 분노가 터진 것이지요. 전남 동북부 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농경지가 많아 일제순사 출신 경찰들에 의한 수탈과 탄압이 극심했던 곳이라 그만큼 민중들의 분노는 응축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14 연대 봉기에 의해 표출된 것이 바로 여수 인민대회입니다. 이게 바로 여순항쟁 시발점 인 것입니다. 촉발은 14 연대 봉기군에 의한 것이지만 봉기에서 항쟁으로 확장된 후 항쟁의 주체는 여수 · 순천 시민들인 것입니다.

항쟁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지금껏 여순항쟁 주체를 14 연대를 축으로 바라보았습니다만, 이제는 항쟁의 시각을 여수 · 순천 시민들에게로 옮겨야 합니다. 그렇지않고 14 연대 군사봉기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대구 항쟁처럼 시민항쟁이라고 할 수 없고 군사봉기에 국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혹자는 또 이렇게 말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나 광주민주화항쟁처럼 시민들이 무장 저항하지 않았는데 무슨 항쟁이냐고 말입니다. 항쟁이 굳이 총칼을 들고 무력 저항을 해야만 할까요. 그럼 3.1 독립만세운동은 일제에 비폭력저항이므로 항쟁이 아니라는 것과 다름없잖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항쟁의 형태가 무력항쟁이 되어야 한다면, 그럼 미군의 지휘를 받으며 여수를 학살하러 온 진압군을 격퇴시킨 잉구부 전투는 무엇입니까? 여수의 청년학생들이 잉구부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진압군을 격퇴하였습니다. 미평 쪽에서 여수로 들어오는 길목을 그때 여수사람들은 '잉구부'라고 불렀습니다. 연등동 중앙을 관통하는 도로의 옛 이름이지요. 그 시점에는 14 연대 봉기군 주력은 이미 광양 백운산 지리산 등지로 은신해 들어가 있던 참이었었습니다.

잉구부 전투 푯말 사진

또한 미군 수송선인 LST를 타고 지금의 해양공원(당시는 종포라고 불렀습니다)으로 상륙하려던 부산 5연대 김종원 대위(일본군 하사관 출신으로 지금의 중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여수 시민 목을 자른 자) 부대를 저지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여수의 청년학생들입니다. 도대체 당시의 여수 청년학생들은 왜 총을 들고 진압군에 맞서 싸웠을까요.

여순항쟁 당시 손들고 있는 여수중 학생들 사진

그러나 여수 순천 민족해방구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80년 광주가 그랬듯 미군정의 지휘를 받는 진압부대들이 순천을 먼저 학살하고 여수로 진입하였습니다. 그 결과 일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즉결처분으로 처형당했거나 행방불명되었습니다. 당시 여수읍 인구가 도서지방까지 모두 합쳐 8만 이었으니 어마어마한 시민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진압 계엄군의 끔찍한 학살로 죽임을 당 한 것을 14 연대와 이에 동조한 여수 인민위원회에 책임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군인들과 여수의 좌익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억울한 희생도 없었다는 극우 뉴라이트 학자들 파렴치한 논리를 따르고 있는 것이죠. 여기에는 여순항쟁이 ‘반란’ 이었다는 이승만과 이후 군사독재정부의 간교한 술책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그렇게 의식이 마취 당 한 상태에서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까운 예를 들겠습니다. 1980년 5월 광주 전남대생들은 전두환 신구부가 정권을 탈취하려고 하자 이에 저항하여 계엄군들에게 저항했습니다. 광주항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광주는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대항해서 시민들이 합세하였습니다. 시민군들은 무기를 손에 쥐고 저항했습니다. 결국 수많은 인명이 전두환 신군부 계엄군에 의해 희생을 당 해야만 했습니다.

질문 드리겠습니다.

광주민주화항쟁을 학살 진압한 계엄군에 의해 희생된 분들 중에는 총 한번 손에 쥐지 않았던 시민들이 많습니다. 집에 있다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은 분들도 있습니다. 억울한 희생인 것이죠. 그럼 이분들의 죽음은 전두환 신군부에 저항한 학생들과 이에 합세한 무장시민들에 기인한 억울한 죽음입니까. 

광주민주화 항쟁도 신군부 정권시절에는 광주폭동으로 호도해 왔고 중앙언론은 신군부의 나팔수가 되어 광주항쟁을 왜곡 조작하여 국민들의 의식을 마취시켰습니다.

여순항쟁에 있어 억울한 희생 원인을 반민족 이승만 정부에 저항한 여수의 청년학생들과 깨어있던 시민들, 그리고 제주 동포를 학살하라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군사봉기를 일으킨 14 연대에 돌리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미국을 등에 업고 반쪽 나라의 권력을 움켜쥐려고 했던 이승만 정부의 반민족 반통일적 학살에 면죄부를 부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수 순천 시민들의 억울한 죽음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는 이승만 정부와 부활한 친일파 경찰, 그리고 독립군 때려잡던 일제 만주군 출신 군인, 그들이 정권을 다지기 위해 저지른 끔찍한 살육이었습니다. 

정당성 없는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를 학살하고 정권을 다졌다면, 국내 지기기반이 약한 이승만은 여수와 순천을 살육하고 정권을 다진 것입니다.

다음으로 명칭에 관해 질문 드리겠습니다.

아직까지도 '여순 10.19 사건'에 대한 성격을 항쟁으로 회복하는데 거부감이나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저것 따지기 귀찮고 걸림돌이 많으니 그냥 ‘사건’으로 부르나 봅니다. 

그런데 사건이라는 단어는 명칭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거나 관심을 끌 만한 일을 통칭으로 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건으로 부르는 것은 사건에 있어야 할 내용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왜 이렇게 불리고 있는 것일까요. 심지어 아직까지 이승만과 군사독재정부가 조작해서 심어놓은 ‘반란’으로 부르는 사람조차도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랜 기간 동안 군사독재정권을 위한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입된 집단무의식의 병리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건의 내용을 따지고 들어가면 이승만 반민족 정부의 성격과 폭정이 드러나는 게 두려운 까닭이 아닐까요. 

또 그동안 시민을 절대적 반공 이데올로기를 동원해서 군사독재정권 좀비로 제조해 냈음이 밝혀지는 것이 싫은 세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군사독재정권들이 자신들의 권력유지 발판으로 삼은 반공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독재권력 존재 명분을 쌓은데 위력을 발휘해 왔지 왔습니까.

이제는 다시 이 땅에 발붙이지 못 할 군사독재 정권을 위한 절대적 반공 올가미인 도그마(dogma)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써 여순항쟁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순항쟁 명칭이 회복될 때, 그럴 때 비로써 화해상생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화해상생을 위해서는 사건의 진실이 무엇이고 성격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드러내어 디딤돌로 삼고 그 바탕에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위로가 순차적으로 이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러지 않고서 밑도 끝도 없는 화해와 상생만을 내세우게 되면, 앞으로 수년이 또 흐른다 해도 여수와 순천의 명예는 회복될 수도 없을뿐더러, 화해와 상생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또한 역사에 1948년 10월 19일 여수와 순천을 올바로 기록할 수도 없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서울 세종로 미국대사관 옆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내 현대사 연대별 사건 안내판에는 아예 1948년 여수와 순천은 없습니다.

안내판 사진

이제는 화해 상생을 노래하기 전에 정확한 사건 명칭을 불러야 합니다. 이것이 이승만 정부가 남긴 민간인 학살 사건에 따른 물리적 정신적 유해를 가지고 올바른 정신적 복원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복원을 문화적으로 브리콜라주 (Bricolage)라고 합니다. 학살이라는 사건에 따른 정신적 복원은 학살 이전 원형의 모습이 아니라 학살로 인해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재창조하는 것을 말 합니다.

그러므로 70년 전 여수 순천 전남 동북부 지역에서 벌어진 과거 역사 학살 사건이 지금까지 정신적 유해를 주고 있는 것을 유야무야 할 것이 아니라, 정확한 진실을 드러내 놓고 이를 가지고 앞으로 역사와 인권 발전을 위해 어떻게 재창조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추모의 내용이고 정신적 복원인 것입니다. 

이와 연동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화해 상생 인 것이지 무작정 덮어버리고 사건으로 치부하자고 하는 것으로는 화해 상생이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국가가 정확히 기록하지 않는 비통한 역사는 오롯이 피해자 유족의 몸으로 기록되어 대물림 되어 갈 뿐입니다.

 

담지자인 여수시민에게 마지막 질문을 드립니다.

역사는 시대에 따라 늘 새롭게 기록되어야 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군사독재정권이 감시와 처벌로 항쟁의 역사를 반란으로 쓰도록 했다면, 이제는 항쟁으로 새롭게 역사를 써야 합니다. 새로운 역사 쓰기는 현재가 과거와 새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과거는 흘러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와 미래에도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길잡이를 합니다.

항쟁에 따른 학살에 의해 무수한 사람들의 죽음을 극우 친일잔존 그림자들이 여전히 반공 이데올로기에 가두어 놓고 빨갱이 음영을 뒤집어씌우는 짓거리를 막아내는 책무가 여수 순천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또한 학살 그 이후에 관변 기관이나 단체가 죽음을 소유하면서 입장에 따라 변주하는 것도 차단해야 할 사람도 여수 순천 사람들입니다. 학살 희생의 명예를 회복할 담지자가 바로 순천 여수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지난 세월 동안 군사독재정권과 보수정권들이 여수와 순천을 반란의 이미지로 마취시켰던 몽롱한 의식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여수는 반민족과 동포학살 폭압에 저항한 자랑스러운 고장이며 이런 명예를 지켜내야 하는 담지자(擔持者)가 여수인입니다.

지금까지 비통한 세월동안 유가족 및 학자와 시민단체들은 억울한 희생에 대한 명예회복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습니다. 그 명예가 이승만 반민족 정부에 저항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명예란 이승만과 군사독재정권이 말 한 양민, 바로 그들의 정권체제 하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사람, 결과적으로 반민족 독재정권이 강화되는 결과에 복무하는 시민으로서 사회적 인정이 아닙니다.

사회적 인정이란 긍정적인 자기의식을 가지게 하는 심리적 조건입니다. 인정을 요구하는 개인이 사회적 조건 속에서 긍정적인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을 뜻 합니다. 이런 요구를 위해 투쟁하는 것을 명예투쟁이라고 하며 '인정투쟁'이라고도 합니다.

관계의 회복이 되면 세 가지 욕구가 충족됩니다. 

하나가 동등한 권리가 인정을 통해 형성됩니다. 둘째가 도덕적 판단능력이 있는 존재로 인정 됩니다. 셋째로 사회적 연대입니다.

여순항쟁 때 아무 짓을 했건, 안 했건 희생된 분들과 유가족 분들은 대한민국 사회로부터 이 세 가지를 모두 박탈당하고 살아왔습니다. 

연좌제에 의해 진학과 취업에 제한을 당 했고, 시민으로서 권리를 박탈 당 했습니다.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사회를 혼란과 불안케 만드는 불한당 같은 존재로 낙인찍혀 왔습니다. 지난 세월동안 군사독재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제물로 유지해 왔던 것입니다.

여순항쟁으로 학살 당 한 영령들과 유족 분들의 명예회복을 지난 세월동안 이 땅을 지배해온 이승만과 군사독제정부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양민으로 편입시켜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분단고착화를 통해 정권을 잡으려는 반민족 이승만 정부와 정당하지 못한 군사독제정부가 펼치는 반공 먹이 그물에 포획 당하지 않아서 희생 당 한 것인지, 이제 어느 쪽으로 인정을 내려서 명예를 회복시킬 것인지 여순항쟁 70주년에 이르러 담지자인 여수시민이 선명하게 대답을 해야 할 차례입니다.

 순천 위령탑과 여수 위령비 비교 사진

 

사족으로, 아무 짓도 안 하고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여수시민이 희생되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에게 프랑스 드골이 한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민족을 위해 아무것도 안 한 것, 그것이 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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