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27 일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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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여순 70주년', 먼저 진실의 디딤돌이 놓여져야
화해도,상생도, 진실을 기반으로 '정리'되어야 가능
  • 2018.02.01 14:52

'여순참변' 성격이 무엇이고,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얼마나 중요한 위치인지 먼저 알아야 

귀가 있으니 듣게 된다. 올해가 여순참변이 일어난 칠십 주년 되는 해이다. 그런데 여수시 기념사업 예산이 제로라고 한다. 정확한 것인지 귀를 의심해 본다. 또 들어보니 여순참변과 쌍둥이 제주참변 4.3은 칠십 주년을 맞아 공휴일 제정 조례 제정까지 논의가 있었단다. 

쌍둥이가 너무 다른 모습이라 여수는 왜 예산이 제로인지 누구에게 물어보았다. 여수시 입장은 일방에게만 예산을 편성할 수 없으니 보훈단체와 손잡고 오면 예산을 편성 하겠다는 것이다. 정확한 여수시 입장인지 모르겠으나 뜨거운 물에 데친 조개처럼 입이 쫙 벌어진다.

여수가 고향이지만 멀리 떨어져 살고 있으니 지역사회 정서나 단체들의 움직임은 모른다. 다만 활자화 된 기사와 전해들은 이야기로만 들어보고서는 난상가란(卵上加卵)이며, 한 그릇에 자장면과 짬뽕을 함께 담아서 오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수시정 당국은 여순참변 성격이 무엇이고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저 옛날에 여수 순천 지역에서 좌익과 우익의 감정충돌로 인해 상호간 살상자가 많았다는 것으로 여순참변 성격을 알고 있는 것인지 의심된다.

쌍둥이인 제주 4.3은 기념관 세워지고, 유족과 경우회 동시에 잔 올려 

여순참변과 쌍둥이인 제주 4.3은 이미 항쟁으로 명예회복과 함께 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기념식에 경찰 경우회와 학살된 유족이 함께 퇴주잔을 올리는 것을 여수시는 알고 있을까? 그렇게 화해 상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을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산이 제로인 것 보니 아직까지 상호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나 보다. 사무친 원한도 삼대를 거치면 녹아 없어지거늘, 사대가 이어지는 세월이 흘러도 융화되지 않았나 보다.

애초에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비극을 막을 수 없었는지 가정을 해 본다. 역사에 있어 가정은 소용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난 역사학자가 아니라 소설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소설 같은 가정을 해 본다. 

일제 패망 후 조선의 치안을 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대가 일제순사 대신에 국내 치안을 담당했다면, 14 연대 봉기군이 여수 경찰서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일제에 해방된 나라의 주인인 민족이 자주통치를 했다면, 제주민을 학살하라는 악의 명령도 없었을 것이다.

건준의 해체, 인민위원회 자치기능 사라져

몽양 여운형은 일제 패망을 예견하고 건국동맹을 결성하고 있었다. 마침내 조국이 해방되자 일제 정무총감 엔도를 만나 일본인의 안전도일(安佺渡日)을 약속하고 치안권을 인수했다. 사상의 좌우를 가리지 않고 악질친일만 배제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는 곧 바로 전국 145개 인민위원회 지부를 갖추고 자치행정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다. 치안도 인민위원회 치안대에 의해 일제 경찰서를 접수하고 치안권을 확보하여 질서가 잡혀가고 있었다. 여수도 마찬가지였다. 관공서는 인민위원회 자치적으로 제 기능을 발휘했고 치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뒤늦게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친일잔당 한민당의 획책으로 가장먼저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대를 해체시켜 버렸다. 대신 일제 헌병대 순사출신들을 소집하여 치안을 맡게 했으니 거기서부터 비극이 심어져 있었던 것이다. 

당시 미군정관 이었던 리처드 로빈슨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공산당으로 오인하여 해체 시켜 버린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고 그의 저서 ‘미국의 배반 (원제 Betrayal of nation -이 책은 미국에서 금서가 되었다.)’이라는 책에서 기술하였다.

필자의 소설 <여수역>

직업경찰과 친일 순사가 뒤섞여... 일제 압자이 친일 순사가 치안 맡아 꼬여

여수 경찰의 피해는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일제 헌병무단정치 수행자 조선인 순사출신들은 일제가 물러감으로 다른 직업을 찾아야 했다. 국내 치안은 건준위의 치안대로도 충분히 수행되었고 이들이 해방 조선의 경찰이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POR JOP(직업 경찰)과 POR JAP(친일 순사)는 구분해야 한다며 해방 조선의 경찰로 친안을 계속 담당하게 했다. 조병옥은 또 ‘매 잡는 게 꿩’ 이라고 하며 좌익을 잡아내는데 일제순사 출신 경찰만큼 적격자가 없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풀없는 밭 없다고 하지만 매화가 피어나야 할 밭에 일본산 벚꽃이 만발했다. 여기에 대항하다 용공조작으로 사형 당 한 사람이 있다. 초대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1899-1951)이다. 독립운동가 출신 민족주주의자 최능진은 일제 패망 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부장으로 활동했다. 

미군정에 의해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발탁되었으나, 친일경찰 처벌을 주장하며 조병옥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친일경찰 등용과 부패에 항의하다 결국 경찰직에서 밀려났다. 최능진은 이에 굴하지 않고 친미기독교파 이승만이가 친일파를 동원하여 집권을 꾀하자 여기세 맞서 다시금 대항하다 용공조작으로 사형을 당하게 된다. 한국 최초 용공조작사건이다.

건준의 치안대가 해체되고 친일경찰이 다시 만발한 것은 승전국 미군정이 남한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조선인 자치행위를 용인하지 않고 철저하게 분쇄했다. 맥아더 포고령 1호에서 보여 지듯이 한국인의 자주적 통치행위를 말살하였다. 미군은 남한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다.

맥아더 포고령 1 호

제1조 -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정부의 모든 권한은 당분간 나의 관할을 받는다.

제2조 - 정부의 전 공공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의 유급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인과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추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기능 및 의무 수행을 계속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해야 한다.

제3조 -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의 안녕을 방해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제4조 - 제군의 재산권을 존중하겠다. 제군은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제군의 정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라.

제5조 - 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목적을 위하여서 영어가 공식언어이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혹은 일본어 원문 간에 해석 혹은 정의에 관하여 어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한 점이 있을 시에는 영어 원문에 따른다.

제6조 - 추후 포고, 포고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혹은 나의 권한 하에서 발표되어 제군에게 요구되는 것들을 구체화할 것이다.

1945년 9월 7일.  태평양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남한 점령 미군정, 친일 순사를 오히려  경찰에 적극 채용한 게 화근

맥아더 포고령 1 호에서 보여 지듯이 일제치하 통치 수단을 그대로 이어받겠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직업에 종사하라 라는 명령에는 친일경찰도 포함된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의 입장에서는 조선인 경찰이 친일순사 출신 따위는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14연대 항명 봉기군이 경찰을 피습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친일경찰을 비롯한 친일파들은 완전 청산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을 비롯한 친미기독교파가 친일파를 동원하여 독재체제를 구축하면서 친일청산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까지 친일파 계보를 잇는 뉴라이트들이 무좀균처럼 살아남아 도처에서 민족정신을 갉아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프랑스 나치협력자 청산을 예로 들지 않을 수 없다. 1944년 프랑스 드골은 나치에 협력한 민족반역자를 색출하여 공식집계로 3만 명 이상을 처형하였다. 프랑스 대숙청을 처음 학문적으로 연구한 로베르 아롱은 44~45년 나치협력 혐의로 의심받거나 처벌된 사람이 50만 명, 구속된 사람이 15만 명, 사망자는 3만~4만 명이라고 추산했다. 나치 협력자 중 이렇게 항변하는 사람도 있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드골의 대답은 명료했다.

“그것이 민족에 대한 죄다.”

드골은 또 이런 유명한 말도 남겼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게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프랑스가 외국인에게 점령될 수 있어도 내국인에게는 더 이상 점령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친일부역자 중 단 한명이라도 처벌을 한 적이 있는가. 오히려 재등용하여 자신들의 정권도구로 사용하지 않았는가. 재등용된 경찰들은 친일에서 친미로 말을 갈아타고 남한 민중을 수탈하는데 주구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제주,여수 공히 일부 친일 경찰들의 등용이 문제시 돼

제주 3.1 운동 기념식에 참석하려는 어린 아이를 말발굽으로 밟아 죽이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제주 4.3 항쟁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여수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재등용 된 친일경찰들은 미군정이 하달한 공출량을 달성하기 위해 집집마다 쑤시고 다니면서 갖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동족을 위해 이민족과 한 번도 싸워 본 적 없는 친일순사출신 경찰들은 어찌도 그다지 숙달된 솜씨로 동족의 어깨가 으스러지도록 홍두깨를 내리칠 수 있었는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대는데 하물며 해방된 나라에서 또다시 친일경찰에 의해 두들겨 맞으니 여수 시민의 분노가 축적되어 가고 있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14연대 봉기군에 의해 촉발된 여수시민의 민족정신이 불꽃처럼 일어난 것이 아니었겠는가. 이것이 "여순항쟁"이고 이를 미군의 지휘를 받는 이승만 계엄군에 의해 참살 당한 것이 "여순참변"이다. 이렇듯 진실이 먼저 밝혀져 디딤돌이 놓이고 그 위에 참회와 용서가 악수를 나눌 때, 그때 비로소 화해 상생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수시는 여순사건의 성격을 그저 옛날에 일어난 쌍방 간의 유혈충돌 형사 사건정도로 치부하나 보다. 그래서 상호 화해하고 손을 잡고 오면 예산을 배정하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제주는 경우회가 '반민족 동족학살 경찰' 행위 반성,  '민주경찰회' 역할 돋보여

여수시는 제주 4.3 항쟁 기념식처럼 경찰 피해자 유족과 학살 당 한 유족들이 함께 퇴주잔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가 보다. 

그런데 제주가 이렇게 승화된 것에 있어 간과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제주 4.3 항쟁 정당성이 인정되었다. 다음으로 경우회 측에서 동족학살을 저지른 민족반역자 이승만 독재자에게 부역한 것을 반성하는 민주경찰회가 결성되었기 때문이다. 

제주는 지난한 이 과정을 쉬지 않고 거쳐 왔기 때문에 올해 제주항쟁 칠십 주년 기념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려 온다.

반면에 여수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나서지 말라"는 묵시록이 아직도 집단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어 그런지 "항쟁"이라는 명칭 사용하기도 머뭇거리고, 여전히 피해의식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양민인데 억울한 죽임을 당 했다고 한다면, 역사에 있어 피주체적 입장만 고수한다면, 여수는 그냥 피해지역이지 이승만 민족반역 친일 무리에 대항한 명예를 회복할 수 없다. 

명예는 민족반역에 저항한 제단 위에 놓이는 화환이다. 이제 칠십 년 동안 잃어버린 명예를 여수시민 스스로 되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여수는 언제까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피주체적 도시로 남을 것인가. 올해가 이승만과 친일무리에 항거하다 학살을 당한 여순참변 칠십 주년이다.

 

필자 양영제
양영제는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여수 동초등학교 다니고 자랐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아버지의 무덤>으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는 한국 이혼현상을 사회심리적으로 파헤친 <재혼하면 행복할까>가 있다. 서울시립대 평생교육원 상담심리 강사다. 
1950년, 8월 3일날 금오도 안도 미군 폭격기 사건인  남면 안도 이야포 사건을 소설로 펴내려고 취재중이다.

양영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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