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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어느 팔순 어르신의 여수 첫 구경

  • 입력 2020.08.01 07:41
  • 수정 2021.06.30 09:09
  • 기자명 양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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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설가 양영제가 지난 6월 25일 ‘한국전쟁기(이야포, 두룩여, 여자만) 미군폭격 민간인 학살 명예회복 토론회’에서 주제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그 분은 여수 바다를 내려다 보았다. 살고 있는 부산 바다보다 아름답다고 했다. “돌산이 섬이냐”고 물었고, “안도는 어디쯤 있는 것이냐”고도 물었다. 여수를 한두 번 온 것이 아니다. 안도를 수차례 방문했는데도 여수 구경은 처음이라고 했다.

여수에 아는 지역이라곤 안도로 가는 배를 타는 여객선 터미널뿐이라고 했다. 오동도 입구까지 혼자 밤에 걸어 와 본 것이 여수 구경 전부라고 했다. 무서웠기 때문이라고.

남북군사긴장감이 높던 시절 시민이 돌아다니지 못하는 야간통행금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로 검문소마다 군인과 경찰이 버스에 올라 타 매서운 눈초리로 승객들을 노려보며 신분증을 검사하던 시절도 저 멀리 지나간 시간이다. 그런데도 노인은 한 번도 여수를 구경해 본 적이 없었단다. 누가 팔순노인을 이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자산공원에서 베트남전 참전비를 바라보는 이야포 학살 마지막 생존자 이춘석 어르신. 지난 6월 25일 토론회 참석차 여수에 들러 이튿날 자산공원을 찾았다. 이날 여수를 처음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정신과 의사 출신으로 식민지 민중의 민족해방에 투신했던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일부 신경증은 사회적 요인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집단도 사회적 요인에 의해 집단 신경증에 걸린다.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던 대구 지역은 1950년 7월 전선을 피해 내려온 피난민들이 발 디딜 틈 없었던 곳이다. 대구역 광장은 거대한 피난민 수용소가 되었다.

이불과 가재도구를 짊어진 피난민 중에는 이제 팔순 노인이 되어버린 마지막 생존자 이춘석(나중에 이춘혁으로 불렀다) 어르신 일가족도 거기 있었다. 일가족은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다시 거제도에서 거문도를 향해 피난선을 타고 이동을 하던 중 8월 3일 여수 안도 이야포 해상에서 미군 폭격기에 의해 그의 가족이 피난선에서 150여명과 함께 피격 당했다. 이건 ‘학살’이다.

그 후 십년이 흐른 1960년 7월 28일 대구역 광장에 2천여 명의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1950년 7월 대구의 그 피난민 중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많은 수가 소복 입은 여성이었다. 한 여인이 1950년 7월에 실종된 남편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광장은 집단 곡소리가 울려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고 신문은 전했다.

4.19혁명 직후인 1960년 7월 28일 대구역 광장. '경북지구피학살자 합동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자료 '가려진 역사 밝혀진 진실' 중에서

그러나 이 모임 이후 피학살 유족회를 꾸린 한의사 이원식 씨는 1961년 박정희 군사재판에서 내란선동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대구 인근지역은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 , 反動形成 )화 되어 갔다. 살아남기 위해 태극기와 성조기를 열심히 흔들어야만 했다. 이 땅에서 백성질 해먹기 참으로 힘든 시대였다.

미군폭격기 학살로 부모를 잃은 이춘석 어르신도 성조기에 경례를 붙이는 바람에 미군 깡통 든 전쟁고아 생활에서 미군부대에서 월급을 받는 어엿한 미군트럭 조수로 살게 되었다.

성년이 되어서는 미군부대에서 받은 운전면허증 때문에 평생 택시운전으로 생계를 꾸릴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같이 살아남은 동생을 공부시킬 수 있었다. 공부시킨 동생은 고(故) 이춘송 님이다.

이춘석(좌) 이춘송 형제가 이야포를 방문하고 기념 사진을 찰칵.

 

미국 백악관 항의집회에 참석한 이춘석(우) 이춘송(좌) 형제 사진. 2001년 6월 24일. 사진 이춘성 제공.

 

동생이 생전에 남긴 육필 증언에는 미군이 우리 가족을 죽였다고 뚜렷하게 기록해 놓았다. 고 이춘송 님의 통곡은 정부가 피난민을 이동시켜 부산에서 거제도로 갔고, 또 다시 명령에 의해 거문도를 향했는데 왜 미군이 학살 했냐는 것이다. (정확히는 피난민 소개 이동 수용 분산 통제는 미8군 명령에 의했고 실행은 한국 경찰이 맡았다.)

형이 미군부대 군용트럭 닦는 일을 한 덕분에 공부할 수 있었고, 형이 가져 온 미군 식빵으로 배를 채운 그가 미국 워싱턴에서 가서 항의집회를 한 것은 한국의 모순과 미국의 아이러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주축으로 동서냉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자국의 패권을 위해 동양의 그리스라고 하는 한국전쟁에서 학살과 구원을 통한 지배 기술(nation –making)을 그리스에서 했던 것처럼 똑같이 펼쳤다. 이야포 마지막 생존자 이춘석 형제의 백악관 항의 집회는 이에 대한 정확한 고발인 것이다.

지난 2018년 이야포 미국폭격지를 찾은 이춘석(오른쪽)씨가 6.25 당시 폭격을 목격한 이야포 주민 이사연(왼쪽)씨가 함께 이야포 해변에서 추모제 후 모습

한국의 역사 모순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미국 트럼프는 연신 방위비 내놓으라고 한국에 윽박지르고 있고,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통일부 장관 후보에게 뜬금없이 사상전향을 했냐고 따져 묻는다. 다음 날 광화문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펼쳐놓고 빨갱이를 때려잡아야 한다는 집회가 열렸다. 1950년 8월 3일 여수 안도 이야포 해상에서 미군기에 의해 학살 당 한 마지막 생존자 이춘석 일가족이 탄 피난선도 빨갱이들이 탄 배라고 해서 학살 당했다.

그러니 노인은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로 이어지는 시절에는 부모가 원통하게 돌아가신 여수 안도 이야포를 찾아 와서 목 놓아 울 수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 겨우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그때서야 용기를 내어 안도를 찾아 왔다고 했다. 그때도 피서객인 척 했지, 자신의 부모가 미군 폭격기에 의해 학살 당한 무덤 없는 산소에 찾아 온 것을 주민들에게 말 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자식인데도 부모가 원통하게 죽은 바다에 찾아와 목놓아 통곡도 할 수 없고 울음을 집어 삼켜야 했던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전쟁 고아! 정말이지 무엇 때문에 이 땅에서 백성 노릇하기가 이토록 어려웠단 말인가.

지난달 25일 이야포 토론회 후 방청 학생으로뷰터 꽃다발을 받는 이춘석(이춘혁) 어르신

 

2019년 8월 이야포 현장에서 미군폭격사건 내용이 적힌 표지판 제막식 광경
2020년 현재 마을 주민들이 이야포 미군 폭격 현장 표지판 옆에 평화를 상징하는 돌탑을 쌓고 있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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