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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노근리' 이야포 미군폭격 사건 추모식

이야포 해변에서 이사연 유족, 이춘혁 생존자 등과 70주년 추모
TCS국제학교 학생들과 이승필 시인의 추모글로 넋 기려
주변돌로 '평화탑'쌓기도 가져... 참가자들 탑에 헌화와 묵념

  • 입력 2020.08.04 00:23
  • 수정 2020.08.27 14:35
  • 기자명 전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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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헌화 후 전체 기념촬영하는 순간.  당시 피난선 잔해물이라고 추정되는 지점의 바다위에는 수백마리의 갈매기가 떼지어 날아올라 그 지점을 한동안 선회하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기념촬영을 하다 이를 발견한 참가자들이 갈매기떼를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70년 전 미군기의 폭격으로 바다 한가운데서 사망한 이야포 피난선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여수시민들이 모였다.

3일 오전 11시, 이야포 해변에서 거행된 추모식과 돌탑 쌓기 행사에는 여수넷통과 여수뉴스타임즈, TCS국제학교 학생 등이 참여했다.

본격적인 추모식에 앞서 참가자들은 박종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부소장의 설명을 통해 이야포 미군폭격사건의 전말을 이해했다.

박 부소장은 “이야포 미군 폭격사건은 너무 손쉬운 판단이 가져온 결과”라고 진단했다.

1950년 미군은 한국전쟁에서 후퇴하면서 미군이 주둔하지 않는 지역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며 물러갔다. 이야포 피난선을 폭격한 비행기 역시 단시간에 많은 양의 희생자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민간인들에 피해를 입혔다.

또한 최근에 이야포를 폭격한 비행기가 익히 알려진 것처럼 슈팅스타기가 아니라 'F9팬더'일거라는 당시의 신문자료등을 공개하며 "이는 새로운 사실이다. 더 자세히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여수 시민들이 말하는 그날의 참상

이야포 미군폭격사건을 눈앞에서 목격한 이사연 씨

이야포 주민이면서 당시를 목격한 이사연 씨 증언도 이어졌다.

1950년 8월 3일 이사연 씨는 당시 16살이었고 미군 폭격이 벌어진 해안가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날 아침 미군기 두 대가 느닷없이 나타났다. 갑작스런 미군기의 공격에 목선은 아수라장이 됐다. 200톤급 목선은 상당히 큰 배였고 한쪽에 태극기가 달려 있었다. 사람을 태우고 오가는 피난선을 보더니 미군기가 상공에서 한바퀴 돌더니 다시 돌아와 배를 향해 세 발 연속 폭격을 가했다. 기관총에 맞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큰 배를 빠져나오려던 사람들은 바다에 빠져 죽었다. 폭격에 죽은 시체는 이곳 야산과 공동묘지까지 가서 묻혔다.

이야포 앞바다는 멸치어장이고 밥벌이 장소다. 하지만 어민들은 멸치잡이 대신 배를 타고 나가 죽은 시체를 건져올려야 했다.  이후 피난선 선주와 직원들은 안도에 주둔중이던 영암경찰서 등  한국경찰의 지휘에 따라 물위로 떠오르는 시체들을 배위로 건져올리고, 배에 기름을 붓고 시체를 소각하여 그대로 3일여를 태운 후 배가 수장되도록 했다. 미군폭격에 살아남은 피난민들은 인근 연도와 금오도와 여수시내  등 곳곳으로 흩어졌다."

두룩여 사건 생존자 박영근 씨

그런가하면 올해로 90세를 맞은 두룩여 생존자 박명근(남면 송고 거주) 씨는 두룩여(문여)에서의 또다른 미군폭격 사건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다. 박 씨는 형제들과 이웃과 함께 당시 조기잡이 배를 탔다.

“미군 폭격기는 저공비행을 하며 배에 탄 사람들을 세밀히 관측해 정확한 사격을 가했다. 당시 바닷물 속에 들어간다거나 보이지 않게 몸을 숨긴 사람들만 살아남았다. 누구든 무장 안한 어부라는 걸 척 보면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격을 가했으니 대항하는 세력으로 보고 포격했다. 당시 미군기는 부근의 조기잡이 배에 연달아 총을 쏘았다.”

박 씨가 탄 배에서 젊은 사람 한명은 죽고 50대는 무릎에 실탄을 맞았다. 박 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 모두 사복을 입은 상태였으므로 폭격기는 당연히 그들이 군인이 아님을 알았을 것이다. 박 씨는 배를 붙잡으면서 바닷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숨긴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춘혁 어르신이 희생자를 위해 기도를 올리고 있다

당시 16살이었던 이야포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은 추모제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반복했다. 국군이 들어온다는 말에 무작정 배를 타고 내려오다보니 거제도를 지나 이곳까지 오게 됐다. 어느날 비행기 한 대가 상공에서 기관총 사격을 시작했고 350명이 탄 배는 아수라장이 됐다.

“황급히 기관실 밑으로 몸을 피했다. 사격이 멈췄나 싶더니 다시 2차 사격이 시작됐다. 6살 동생이 있었는데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당시 군사독재시절이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누나는 그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20대에 세상을 떠났고 동생은 5년 전에 세상을 떠나서, 지금 생존자는 (가족 중에) 저 하나다.”

이춘혁 어르신은 뒤이어 “오늘 여수시민들과 시의원들이 이렇게 이야포 피해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와줘서 정말 감사하다. 후손들도 이 역사를 알 수 있도록 위령탑을 세워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준비한 추모의 글

추모시를 낭독하는 이승필 시인

예울마루 대표인 이승필 시인은 준비한 추모시 ‘이야포의 그날’을 낭독했다.

‘누가 기억하는가 1950년 8월 3일 그날 아침을/ 이야포의 피떨리는 역사의 비극, 푸른 바다 위 피난선에 쏟아진 폭격/누가 기억하는가 2020년 8월 3일 이 아침에 이야포에 수장된 기총사격의 참극을 /세상에 떠돌 150여 원혼, 죽은 자의 고통, 통한을 /누가 기억할 것인가 2090년 8월 3일 지금부터 70년이 다시 흐른 그날까지도 이야포의 잊혀서는 안되는 만행/누가 기억해야 하는가 70년이 일흔번 또 흘러갈지라도/이야포, 노근리, 인류의 흑역사가 지상에서 재발되지 않을 그날까지“

TCS국제학교 정이겸, 배준우 학생은 추모글을 낭독했다. 두 학생들은 지난 6월 25일 여수시의회 소회의실에서 열린 '한국전쟁기 미군폭격에 의한 민간인 학살 명예회복 토론회'를 방청하기도 했다.

정이겸 TCS국제학교 학생이 추모글을 낭독하고 있다

TCS국제학교 전 학생회장을 맡은 바 있는 정이겸 학생은 “이 아름다운 바다에서 전쟁 중에 살고자 항해하던 피난민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다는 것을 저희로서는 상상조차, 가늠조차 할 수 없다”는 말로 피해자들을 애도했다.

그러면서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이야포 해변에 세워진 안내판이 유가족과 이춘혁 할아버지께 작은 위로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며 “이 사건이 사적 기억에서 공적 기억으로 될 수 있도록 여수시와 대한민국이 부끄럽지 않게 행동으로 나타내주길 바란다”는 부탁의 말도 잊지 않았다.

배준우 부회장

이 학교 배준우 부회장은 “이제는 더 이상 피난민의 억울한 희생을 외면해선 안된다. 이미 고령에 이르신, 생존자와 목격자가 살아계시는 지금 여수시는 이 분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늘 추모의 날을 계기로 우리 학생들도 미군폭격사건에 관심을 갖고 기억하겠다. 사회 각계각층에서도 무고한 희생을 당한 이들의 아픔이 치유되도록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란다”고 발언을 마쳤다.

 

박성미 여수시의원

박성미 시의원은 “역사적 사건은 날짜가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야포 미군폭격 사건은 아직 인양할 배가 남아있으므로 오늘 추모식에 참여한 젊은 학생들이 꾸준히 관심을 가지기만 하면 언젠가 진실을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석한 TCS국제학교 학생들이 진실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해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엄길수 대표는 “이야포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는 안타까운 사건이다. 이런 일이 재발되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저희 신문사와 여러 단체가 힘을 합쳐서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처럼 다시는 이런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길 바라면서 오늘 이 자리가 다시 한번 뜻을 되짚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야포 평화의 탑과 그 안에 담긴 뜻
 

평화탑에 헌화하는 학생들

마지막으로 참가자들은 다함께 이야포 평화의 탑 앞에서 미군폭격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헌화했다. 최병수 작가는 돌탑 꼭대기에 손수 만든 돌솟대를 세웠고 참가자들은 돌탑 사이로 국화를 한 송이씩 헌화했다.

원뿔형 돌무더기 탑인 ‘이야포 평화탑’은 우선 큰 돌로 밑단을 둥글게 한 뒤 그 안에 잔돌을 채우고 다시 가장자리에 돌을 쌓는 방법으로 만들어진 원형 돌탑이다. 투박하지만 안정감 있는 원뿔 형태로 주변환경과 잘 어울린다.

탑을 쌓아올리기 전 미리 그 속에 무쇠솥과 나무 밥주걱을 묻었는데 이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원혼들을 위로하고 평화를 담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엄길수 여수넷통 이사장이 최근 세워진 이야포 추모탑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엄길수 여수넷통 이사장은 “무쇠솥과 나무주걱에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영혼을 위로하는 마음과 또 솥에 밥을 담듯이 평화를 담아주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말했다.

추모식에 참석한 여수넷통 주미경 운영위원은 안도 이야포 방문이 처음이다. 주미경씨는 “뜻깊은 일에 참여하기 위해 바쁜 일정을 미루고 달려왔다. 안도 이야포의 아픈 역사를 심도 있게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시민들이 이와 같은 행사에 많이 참여하여 역사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돌산 우두리에 거주하는 김미애 씨도 함께 했다.

김미애 씨는 “가슴 아픈 역사지만 이 현장을 잊지 않고 찾는 시민들이 있어 희망이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여수넷통과 해양인명구조대는 지난 29일 이야포 수중에서 6.25 당시의 대형 목선 엔진으로 추정되는 잔해를 발견한 바 있다.

현재 침몰선 부근에는 부표를 띄워 장소를 잊지 않도록 했고 관계당국의 빠른 인양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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