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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10.19 여순사건] ④ 7살 소년의 치유되지 않는 아픔

“원한은 갖지 말자 그러잖아요, 그러나 난 절대 그건 못 잊어요”

  • 입력 2023.10.19 06:55
  • 수정 2023.10.19 07:32
  • 기자명 조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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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국방경비대 14연대 일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여수, 순천 일대의 남로당 당원과 합세하여 봉기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이어졌으며 2천~5천 명의 인명 피해와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를 남겼다. 그리고 약 100억 원의 재산 피해와 2천 호의 가옥이 소실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백융송 어르신은 아프고 슬픈 일은 오래 기억된다고 했다. 마치 어제 일처럼.  ⓒ조찬현
▲백융송 어르신은 아프고 슬픈 일은 오래 기억된다고 했다. 마치 어제 일처럼. ⓒ조찬현

백융송(82세), 1942년 12월 25일 여수시 남면 심장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나이는 7살로 7남매(3남 3녀) 중 막내다.

12일 여수 교동 식당(백금식당)에서 만난 그는 아프고 슬픈 일은 오래 기억된다고 했다. 마치 어제 일처럼.

“지금도 그날(여순사건)의 일들이 생생해요”

건국준비위원회에 함께했다며 아버지 좌익으로 몰려

“원래 할아버지 고향은 돌산이에요.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금오도로 건너와 정착하셨죠,”

- 아버님은 어떻게 작고하셨는지요?

“건국준비위원회에 함께했다며 좌익으로 몰렸어요. 친척 집에 숨어 있다가 ‘아이고 나 때문에 사돈네 팔촌까지 당하겠다’ 싶어서 아버지가 자수를 해버렸어요.

현 여수중앙초등학교로 이송되어 수용되어 있다 돌아가셨어요. 큰형님도 아버지 때문에 좌익으로 몰려 막 잡아들이려고 하니까 큰형님도 숨었죠. 근데 밭에다가 땅굴을 파놓고 어머니가 밥을 갖다 나르고 형님은 거기 땅굴 항아리 속에 숨어 계셨어요. 그러던 중 형님이 ‘어머니 나 도저히 죽었으면 죽었지 여기서 더는 못 있겠습니다’ 하여 이후 작은아버지 집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그때 의용대라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들이 지서 순경들 앞잡이죠. 우리 큰형님 찾아내라고 어머니를 동네 한가운데 있는 바닷가에서 매질을 막 했어요. 그때 나도 봤어요. 우리 형님이 숨어 있는데 ‘어머니가 이제 형님 때문에 두들겨 맞는다.’라고 누가 알려줘 형님이 나왔어요. 형님은 그때 지서로 잡혀가서 여수경찰서로 넘어가 군사재판에서 20년 형을 받아 복역하던 중 6.25가 터지니까 모두 다 죽여버렸어요. 아버지도 그래서 당하시고.”

“백두산 호랭이 그놈은 내가 살이라도 씹어 먹고 싶어요”

▲자신의 일기장을 펼쳐 옛 기록을 찾아내고 있는 백융송 어르신. ⓒ조찬현
▲자신의 일기장을 펼쳐 옛 기록을 찾아내고 있는 백융송 어르신. ⓒ조찬현

- 어르신에게 10.19 여순 사건의 의미는 뭘까요?

“항쟁이 맞느냐, 뭣이 맞느냐? 그런 건 모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가 당한 김종원이 백두산 호랭이 그놈은 내가 살이라도 씹어 먹고 싶어요. 왜냐하면, 지가 법이었어요. 맹창순이라는 사람이 김종원이하고 동네 돌아다니면서 ‘저 집 누구 집에 불 놔라, 누구 집에 불 놔라’ 그랬어요.”

- 그때 몇 집이 불에 탔나요?

”우리 동네(남면 심장리)가 한 100가구 정도 됐을 겁니다. 그중에 두 집을 불태웠어요. 강영옥이 집하고 우리 집인데, 그 집은 아주 귀한 집이고 그때 돈을 잘 번 부잣집인데 그 집을 태워버렸어요.“

- 7살 소년의 시각으로 본 당시의 느낌은?

”분노죠, 두려움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서 다녔어요. 지서 의병대들이 어머니를 잡아내라고 청년들을 이제 두드려 패요. 그러면 우리는 아버지 친구 집에 숨곤 했죠. 어머니와 내가 숨어 있으면 그 청년들이 와서 알려줘요. ‘어머니 여기 우리가 왔는데 밖에서 지금 마을 청년들이 어머니 찾아내라고 막 타작을 당하고 있습니다. 내 살 아프면 누가 안 불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피해 나가십시오. 그래서 그 옆 대밭에 숨어서 밤을 새우고 그랬어요.“

”싹 다 죽여버렸어요, (형님) 시체도 못 찾았어요”

- 어머니는 이후 어떻게 되셨나요.

“어머니는 몽댕이(몽둥이) 타작을 당해 손목을 다쳤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의용대들 한테 형님 숨어 있는 곳 실토하라며 두들겨 맞아서 팔이 부러졌어요. 이후 72세 되던 해에 돌아가셨어요.”

- 형님은 어떻게 돌아가셨나요?

“전쟁 그 자체가 완전히 인구 말살의 징조죠. 죄 없는 사람 멀쩡한 사람 다 당하잖아요. 전쟁은 하면 안 돼요, 절대 안 되지. 세상이 천지개벽해도 전쟁을 하면 안 돼요. 6.25 전쟁 때, 그러니까 우리 큰형님도 전주형무소 복역 중에 죽여버렸잖아요. 1950년에 전주형무소에서 복역을 하고 있는데, 군사재판 형 받아서 이북에 동조할 거라고 이제 인민군 내려오니까 싹 다 죽여버렸어요, (형님) 시체도 못 찾았어요.”

- 지금이야 담담하게 말씀하시지만 실은 끔찍한 일이었잖아요.

“이제 우리는 아버지 때문에 당한 거 그거는 어찌 됐든 간에, 그 후로 살아남은 과정 은 누구한테도 말 못 해요. 집이 홀라당 불타버리니까 남은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먹고 사는 것이 우리의 최대 목적이었어요. 저는 안 먹어본 것이 없어요. 풀뿌리, 나무껍질, 초근목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거, 먹고 안 죽는 거는 전부 다 먹어봤어요.”

▲여수 교동 식당(백금식당)에서 밥상을 차려내고 있는 백융송 어르신의 아내 민영금씨. ⓒ조찬현
▲여수 교동 식당(백금식당)에서 밥상을 차려내고 있는 백융송 어르신의 아내 민영금씨. ⓒ조찬현

- 어르신이 살아온 과정을 얘기해 주세요.

“저는 원양어선 배를 탔어요. 군대 제대하고 27살 무렵 바로 나갔어요. 13년 동안 두 번 선장도 하고, 결혼해서 1974년에 여수 시내로 나와 지금껏 식당을 해요.

그때는 먹을 것이 없었으니까 안 먹어본 것이 없어요. 초등학교 10리 길 다니면서 배가 고픈데 먹을 건 없고 해서 가을걷이 끝난 밭에서 얼어서 물이 질겅질겅 상한 고구마를 주워 먹었어요. 학교 다니는 길가에 먹을 것이라고는 무엇이든지 먹었어요.”

“입밖에도 내지 말아라, 징그럽고 몸서리난다”

- 어머님(박매화) 살아생전 당부한 말씀은?

“어머님이 잔뜩 당하고 나니까 ‘우리 식구들이 어떻게 했다 하는 거 입밖에도 내지 말아라. 징그럽고 몸서리난다. 절대 진저리가 나고 소름이 돋는다. 통 입 밖에 내지 마라’하셨어요. ‘여순사건 피해 신고 신청을 해봐라’ 주변에서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 하신 말씀이 ‘몸서리가 쳐진다’라며 만류했어요.”

- 국가에서 피해보상 해준다고 해도 신고 안 하신 분들이 더러 있겠네요.

”많죠. 그러니까 예를 들면 지금 저처럼 우리가 여순사건을 당했다 하는 말을 언제부터 마음 놓고 할 수 있었냐 그러면 김대중 대통령 때부터 했어요. 김영삼 정부 때도 말 못 해요. 옆에서 누가 우리 집 욕을 한다 해도 그냥 못 들은 척하고 넘어갔어요. 그런데 이제 김대중 대통령 때부터 말했어요. 지금도 안 나타나는 사람들이 많죠.“

- 여순사건 피해 신청하셨나요?

“보상은 아직 안 받았어요, 등록은 했고. 뭐 진실화해위에도 넣고 여수시청에도 넣고... 이제 진실화해위에서 보상법이 통과되면서 이쪽으로 넘어왔다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엊그저께 문자가 왔어요. ‘지금 채택이 돼서 중앙심사위원회 심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리 알고 있으라고’ 얼마 전에 왔더라고요. 그거 신청한 지가 한 4~5년 될 겁니다.”

- 끝으로 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한 말씀.

“원한은 갖지 말자 그러잖아요, 그러나 난 절대 그건 못 잊어요. 그렇다고 내가 복수 하겠다, 그런 마음은 없어요. 사실 지금 복수가 되겠습니까? 젊었으면 복수를 하겠다, 그런 마음도 있겠죠. 이제 ‘네가 잘 되나, 나가 잘되나 보자’ 하고 살아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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