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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10.19 여순사건] ② 해원(解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광주 시민저항은 여순항쟁에 뿌리가 닿아있다
여순 10월 항쟁 긍지는 언제나 세워질 수 있단 말인가

  • 입력 2023.10.17 06:25
  • 수정 2023.10.17 07:30
  • 기자명 양영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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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광주 무정부사태로 발표한 기사
▲ 1980년 광주 무정부사태로 발표한 기사

1980년 광주 5.18은 폭동이었다.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 특수부대가 불량배들을 선동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소요사태를 일으킨 폭동이었다. 사회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계엄군은 폭동을 진압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부 시민들이 희생당했다. 국가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희생된 부수적 피해였다.

언론에서는 전두환 신군부 정권찬탈을 저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오월 광주를 이런 식으로 규정했다. 당시 신문기사들은 광주를 무정부 폭동사태로 기사를 쏟아냈다. 광주 유족들은 망월동 공동묘지에서 피눈물을 씹어 삼켜야 했다.

▲광주 5.18 공동체정신 상징 주먹밥
▲광주 5.18 공동체정신 상징 주먹밥

그러나 광주 민주화항쟁은 이어졌다. 광주의 죽음을 보고서도 사람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5.18 진실을 밝혀라!” “광주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 “민주주의 만세!”

사람들은 정치 문화예술 인문사회 각 분야에서 5월 광주 진실을 알리기 위해 떨쳐 일어났다. 그러다 또다시 고초를 당하고 죽음을 맞기도 했다. 진실은 그렇게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동소용사태 광주는 민주화항쟁으로 자리매김해 갔다.

나쁜 죽음이라고 했던 망월동 공동묘지는 민주화 성지로 탈바꿈되었다. 오월 광주는 위대한 민주화 시민항쟁으로 정의되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5월 광주 원통한 한(恨)은 해원(解寃,원통함이 풀어지다)이 되었다. 해원은 기원한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후대의 지속적 투쟁결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  박금만 작 여순항쟁
▲ 박금만 작 여순항쟁

1948년 10월 여순, 아직도 해원되지 못하고 있는 원통한 죽음들이 구천을 헤매고 있다. 어이하여 원통한 혼들이 안식을 갖지 못하고 있는가. 부활한 친일세력이 민족을 분단하고 권력을 다지기 위해 투망한 좌익세력 무장폭동소요사태라는 오명을 완전히 찢어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위대한 ‘민족민주 시민항쟁’ 깃발을 세우는데 주저하기 때문에 해원 만장만 바람에 힘없이 날리고 있는 것이다.

80년 5월 광주가 위대한 것은 서울의 봄을 군화발로 짓밟고 권력을 찬탈하려는 전두환 신군부 쿠데타 세력에 죽음을 불사하고 항쟁하였기 때문이다. 광주 시민저항은 여순항쟁에 뿌리가 닿아있다. 1948년 10월 여순시민공동체 저항정신이 1980년 5월 광주의 시민공동체 정신에서 재현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순 10월 항쟁은 제주도민 학살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14연대 군사행동으로만 기억되어서는 안 된다. 민족민주 시민항쟁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민족항쟁은 이미 1946년 대구에서 일어났다.

▲ 대구 46년 추수항쟁
▲ 대구 46년 추수항쟁
▲  제주항쟁 도화선
▲ 제주항쟁 도화선

1947년 제주에서는 삼일절 행사를 탄압한 친일경찰에 맞서 4.3 항쟁이 시작되었다. 

1948년 10월 여순항쟁은 이런 민족항쟁 연속선상에서 일어난 필연적 사건인 것이다. 미군정에 의해 부활한 친일세력이 물러나 진정한 민족 해방공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신문에서는 이렇게 보도되었다.

▲서울신문은 당시 여순반란사건이라고 기사를 냈다.
▲서울신문은 당시 여순반란사건이라고 기사를 냈다.

신문기사와 달리 여수에서는 시민공동체 자치행정을 선포하는 인민대회가 평화롭게 열렸다.

지배자에 의한 억압통치가 없어도 서로를 위하고 도우며 자치적으로 행정을 꾸려나갔다. 무질서도 없고 그 어떤 약탈도 일어나지 않았다. 위대한 시민공동체 정신인 여순 아나키즘이 발현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계엄군 도살이 시작되었다. 친일세력과 결탁하여 권력을 다지려는 그들은 여순시민을 살육하기 시작했다. 이제 저항한 사람들이 여순 청년학생들이다.

▲박금만 작. 저항하는 여순사람들
▲박금만 작. 저항하는 여순사람들

저항하다 여순은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광주가 신군부에 저항하다 죽음의 도시가 되었듯이 여순도 반민족, 반인권, 친일세력에 저항하다 이승만 정부 계엄군에 최종해결책에 학살당했다.

학살당한 죽음은 한으로 남았다. 한은 승화되지 못하고 지금까지 곡소리로만 울려왔다. 해마다 10월 19일 오전 열시가 되면 여수에서는 조종처럼 사이렌만 울린다. 힘없는 해원 만장만 허공에서 나풀거린다. 항쟁으로 승화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한많은 노래라는 의례적 여순 10.19 추념식은 여순항쟁 기념식으로 탈바꿈되어야 한다. 힘없는 해원 만장에 ‘반민족 반민주 반인권 항쟁 여순 10.19’가 선명히 써져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한에서 긍지로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해원이 되는 것이다. 해원된 넋이 편히 쉴 수 있는 추모공간도 마련되어야 한다.

도대체 여순 10월 항쟁 긍지는 언제나 세워질 수 있단 말인가. 광주 5월이 중단 없는 싸움으로 민주화시민운동으로 자리매김 되었는데 여순10.19는 언제나 시민항쟁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단 말인가. 10월, 여수인민대회가 열린 중앙동에는 아직도 안식처를 찾지 못한 넋들이 구천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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