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특별기획 10.19 여순사건] ① 다시 돌아오는 여순사건 그 날

여순사건조사단, 연구 센터 등 연구 기관 설치 절실
자유와 평화, 인권의 도시 여수로 오래 기억되었으면

  • 입력 2023.10.16 06:45
  • 수정 2023.11.18 15:33
  • 기자명 한창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여순사건 아카이브’ 홈페이지
▲ '여순사건 아카이브’ 홈페이지

여순사건을 겪었거나 겪지 않아도 1948년 10월 19일 그 날 이후를 지켜본 여수시민이라면 누구나 '격세지감'을 느꼈을 것이다.

​1948년 10월 19일 이전 여수는 수군 군사기지에 지나지 않았던 어촌 여수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시가지가 매립되고, 항구가 새로 생기고 철도가 다니면서 오동도가 방파제로 연결된 여수였다.

​해방된 여수도 잠깐, 피비린내 나는 살륙 현장, 시가지가 불에 타 참혹한 현장은 두 눈 뜨고 볼 수 없다. 부모 형제를 잃은 가족들은 드러내놓고 울 기운조차 없었던 무시무시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다.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를 말할 수가 없어

​여순사건 때 봉기를 하였던 군인과 시민군들은 북한 공산당 지령을 받아 봉기한 것도 아닌데, 하루아침에 부역자가 되어 즉결 처형에 넘겨져 목숨을 잃었거나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어 무서운 칼바람을 피했다고 안도의 한숨을 쉰 것도 잠시, 보도연맹에 가입하라고 해서 가입했는데, 6.25 전쟁이 일어나 애기섬 수장과 같이 억울하게 두 번째 참변을 당한 여수사람들이었다.

​그나마 간신히 살아남았어도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국가보안법에 따라 항상 감시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제삿날이 동네마다 똑같아도 누구 하나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를 말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빨갱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여수는 반란의 도시, 여수시민은 반란군의 자식이 되어버렸다. 사관학교 진학, 공직 등에 취업할 수 없었던 무서운 연좌제라는 올가미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제주 4.3사건 출병을 반대하고, 미군 철수를 요구했다는 것도 한참 후에서야 알았다. 단지 14연대 반란이라는 말만 알았을 뿐이다.

여순사건 유가족 밝힐 수 없어 고향 떠나 객지로

▲여순사건 유적지 방문   - 여수넷통뉴스 자료사진
▲여순사건 유적지 방문   - 여수넷통뉴스 자료사진

​드러내놓고 부모 형제 죽음과 고통을 말할 수가 없다. 당당하게 여순사건 유가족이라는 것을 밝힐 수가 없어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아다닌 남모른 아픔이 컸다. 그들에 비해 가해자였던 진압군과 경찰은 순직이고 유공자였다. 살아생전에 억장이 무너지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서글픈 것은 억울하게 희생당한 그들은 서서히 잊혀졌고, 아니 잊으려고 노력했다. 비로소 50년이 지나서야 시민회관에서 50주년 기념 추모식을 처음으로 개최하였다. 그것도 알려질까 봐 숨죽이며 여수 여천 지역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어렵사리 행사를 열었다. 대다수 유가족은 그 자리에 가는 것도 두려웠고 간다고 해도 엄청난 결단이 필요했다.

더 앞이 캄캄한 것은 같이 여수에 살아도, 반란군의 자식이 되어도 아무 생각 없이 '반란'이라는 말을 함부로 말하였고, 수없이 들어야 했다. 14연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없는데, 어찌 여수 순천 지역 시민들이 그 엄청난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겠는가? '소요', '봉기'라고 할 수는 있다. 국사 교과서에 단순한 '10.19여순사건'으로 봉합이 되었다. 이렇게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촛불 정부 2018년, 처음 정부 주관 70주년 합동 추념식

촛불 정부가 들어서 다시 돌아온 70주년, 2018년 처음으로 정부 주관 합동 추념식을 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이어서 2021년 국회에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법에 따라 2022년 74년 만에 ‘여순사건’ 피해자 45명 첫 공식 인정되었다. 감개무량한 역사적인 순간이다.

​2023년 여순사건 75주년을 맞아 전라남도는 오는 20일까지 도청 윤선도홀에서 여순사건 관련 전시회를 개최하는 것을 비롯해 전남 곳곳에서 사진전, 추모 플래카드 설치 등 제75주기 추념식 부대 행사를 개최한다. 고흥군에서 합동 추념식을 하고, 서울과 전남 각 지역별 따로 추모식을 한다. 전국적으로 문학상과 영상 작품 현상 공모, 다큐멘터리 상영, 뮤지컬 등 다양한 행사를 한다.

이제 더이상 '침묵'은 끝이 났다. 현충일처럼 추모 사이렌에 맞춰 묵념한다. 학교에서도 수업 시간에 여순에 대해서 알아보는 수업을 한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편하게 눈을 감지 못했던 조상들을 볼 면목이 생겼다. 떳떳하게 여순사건 피해자이고 유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증언자와 기록이 사라지기 전에 진실 규명하는 기초 작업해야

​시민 모두가 유가족으로 등록할 수 없어도 '빨갱이 도시'라고 취급받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다. 이제 더 이상 피해자를 찾을 수 없이 세월은 흘러갔어도 이 정도에서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특별법 명칭에서 볼 수 있는 진상 규명은 언제 이뤄질지 아득하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여수시가 먼저 나서서 증언자와 기록이 사라지기 전에 여순사건 진실을 규명하는 기초 작업을 해야 한다.

​여수시 산하에 상설 기구로 가칭 '여순사건조사단' 또는 '여순사건연구센터' 등 연구 기관을 설치한다. 정부 차원에서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서 기록과 영상, 녹취록, 사진, 문헌, 신문자료를 제공한다. 피해자 조사 작업이 끝나면 바로 진상 규명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강제한다.

▲ 여순사건 73주년 추모공연으로 열린 ‘1948 침묵’ 오페라 공연   - 여수넷통뉴스 자료사진
▲ 여순사건 73주년 추모공연으로 열린 ‘1948 침묵’ 오페라 공연   - 여수넷통뉴스 자료사진

무엇보다 14연대 군인들이 여수를 떠난 뒤에도 10월 27일까지 8일 동안 진압에 맞서 저항할 수 있었던 세력은 어떤 사람들이었고, 그 날까지 여수시 행정과 치안은 어떻게 이뤄졌는지, 시민들은 무엇을 하였는지 궁금하다. 빨치산들이 활약했던 지리산 주변이 아닌데, 어떤 부역을 하였기에 부역자들로 처벌받은 시민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27일 진압된 이후 여수는 어떻게 변하였는지 등 진실이 밝혀져야 홀가분해질 것 같다.

​여순사건이 발생한 날이 가까워져 오면 그때라야 여러 행사를 하고 추모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피해에 대한 울분에 그칠 수만은 없다. 우리 시대까지는 여순사건이 여수시와 여수시민에게 불명예스러운 올가미가 되었다면, 2018년 이후에는 분노를 떨치고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픈 역사는 잊지 않아야 하지만, 아픈 역사가 아픔을 기억하는 수준에서 머무르지 않고, 희생자의 희생과 유가족의 고통이 값진 가치로 남아야 한다. 그것들이 바로 여수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만들어, 고맙고 자랑스러운 가치로 남겼으면 좋겠다. 반란의 도시 오명에서 벗어나 시대 전환의 마중물이 되어 자유와 평화, 인권의 도시 여수로 오래 기억되었으면 한다.

저작권자 © 여수넷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