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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베이비부머, 멈추지 못한 세대의 자화상

내 삶은 쉼 없이 견뎌낸 시간의 연속이었다

  • 입력 2026.02.16 08:07
  • 기자명 정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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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쳇지피티 그림 ⓒ정영우
▲ 쳇지피티 그림 ⓒ정영우

한때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 제목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곧이어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냐.”, “청춘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 같은 패러디가 뒤따랐다. 그 말들에는 웃음과 함께 묵직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 우리 사회에는 청춘만 아픈 것이 아니다. 베이비붐 세대인 중년도, 한국전쟁의 그늘을 통과해 온 노년도 각자의 자리에서 오래도록 아파 왔다.

한국의 베이비부머는 6・25 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다. 가난 속에서 태어나 산업화의 거친 숨결을 온몸으로 견디고,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통과하며 쉼 없이 달려왔다. 부모에게는 순종했고, 자식은 황제처럼 떠 받들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늘 한 발 물러나 있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했지만 구조조정의 칼날 앞에서 거리로 내몰리기도 했고, 자식들의 삶을 떠받치느라 자신을 돌볼 여유를 갖지 못한 세대다.

나는 그 베이비부머의 막내이자, 386세대의 문턱에 걸친 1963년생이다. 같은 해에 태어난 이재명 대통령의 삶을 들여다보며 묘한 동질감을 느낀 적이 있다. 시대가 개인의 삶에 얼마나 깊게 새겨지는지를 생각하게 됐다.

어릴 적 나는 늘 우울했다. 고성이 오가던 집 안의 공기는 어린 마음에도 무겁게 내려앉았다. 빚쟁이들은 사흘이 멀다 하고 들이닥쳤고, 가난한 살림살이 곳곳에 붙은 빨간 딱지는 어린 나의 눈에도 선명했다. 농사일은 너무 일찍부터 일상이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논밭으로 향했고, 방학이면 머슴처럼 일했다. 겨울에는 땔나무를 구하러 이 산 저 산을 헤매야 했다. 공부는 사치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부모님은 자식들이 글을 통해 신분을 바꾸길 바랐다. 공부 못 하면 평생 부모처럼 산다던 말은 어린 가슴에 깊이 박혔다.

▲ 쳇지피티 그림 ⓒ정영우
▲ 쳇지피티 그림 ⓒ정영우

그래서 나는 산골 마을을 떠나 도시의 고등학교로 갔다. 진학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실은 농사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교실은 또 다른 벽이었다. 기초학력이 부족해 하위권을 맴돌았다. 자취방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나는 죽기 살기로 책을 붙들었다.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는 막연한 다짐 하나가 나를 버티게 했다. 계획한 분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늦잠을 잔 날이면, 큰 죄라도 지은 듯 눈물이 났다. 절박함이 나를 밀어붙였고, 그 끝에서 서울의 중상위권 대학에 합격할 성적을 얻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은 꿈보다 단단했다. 결국 등록금이 저렴한 지방 국립대를 선택해야 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낮에는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고, 밤에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했다. 장학금을 놓치면 생활이 무너질 것만 같아 이를 악물어야 했다. 친구들이 당구를 치고 막걸리를 기울이는 풍경은, 나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대학 재학 중 입대한 군대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편안한 시절로 기억된다. 몸은 고됐지만 마음은 잠시 놓였다. 최소한 먹고사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졸업 후 교사가 되어 30년 넘게 교단에 섰다. 교직 생활 역시 녹록지 않았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생각보다 넓었고, 아이들과의 관계는 늘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모질지 못한 성격 탓에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그 시간들 역시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결혼해 아이들을 키우고, 부모님을 돌보며 살았다. 직접 모시지는 못했지만 가까이에서 챙겼고, 본가와 처가 부모님의 마지막 시간도 함께했다.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일까지 더해지자 삶은 점점 빽빽해졌다. 그 무게가 결국 몸을 먼저 무너뜨렸다. 질병과 싸우며 버티다 60세에 명예퇴직을 선택했다. 정년을 2년 남기고 물러나는 순간, 오래 붙들고 있던 무언가를 놓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는 다행인 편이다. 자녀들은 모두 독립했고, 연금도 나온다. 그러나 주변 친구들 대부분은 퇴직 후에도 여전히 일터를 전전하거나 일자리를 찾고 있다. 자녀 뒷바라지는 끝나지 않았고, 집 마련을 도와야 하는 경우도 많다. 남은 자산이라 해봐야 집 한 채와 퇴직금, 소액의 개인연금이 전부다. 국민연금 수령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하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문턱에서 돌아서기 일쑤다. 예전 직장에서 임시직으로라도 불러주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얼마 전 다큐멘터리 영화 《괜찮아, 앨리스》를 보았다. 제도권 학교를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는 청소년들의 이야기였다. ‘쉬어도 괜찮아’,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른 길로 가도 괜찮아’라는 말이 이상하리만큼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에게는 그런 말이 허락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항상 부지런해야 했고, 뒤처지면 안 된다고 믿으며 살았다. 다른 길은 선택지가 아니라 실패로 여겨졌다. 아마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비슷한 시대를 건너온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버티며 살아왔을 것이다.

돌아보면 내 삶은 쉼 없이 견뎌낸 시간의 연속이었다. 잘 살아야 한다는 압박과 뒤처지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 덕분에 가족을 지켰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책임을 다하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한 번쯤은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청춘만 아픈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시대를 건너온 모든 세대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픔을 안고 살아왔다. 남은 시간만큼은 경쟁과 생존이 아니라 이해와 위로 속에서 서로의 삶을 인정해 주는 사회이기를 바란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지나온 고단함을 조금은 따뜻하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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