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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이야포 학살은 드러나야 한다.

소설가 양영제 특별기고

  • 입력 2018.09.13 14:24
  • 기자명 양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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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라고 할 것 까지 없는 간지러운 물살이 몽돌 해안으로 올라 온다. 물살은 무엇인가의 거대한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다시 밀려 나간다. 그럴 때 마다 물살이 우성치고 몽돌들이 절규한다. 조그만 관심을 갖고 가만히 귀를 기우려 보라. 아직도 미군 폭격기가 학살한 피난민 비명소리가 들릴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 해 여름, 여수 남면 안도 이야포에는 부산에서 출발한 피난민선 한 척이 기관고장으로 정박하고 있었다. 거문도로 갈 예정이었다. 350여명 피난민이 타고 있었다. 땡볕이 바다로 내리꽂기 시작하는 아침나절, 미군의 전폭기가 이야포에 나타났다. 전폭기 꼬리부분에 선명한 별모양을 보고 안도 사람들은 호주기가 대한민국을 지켜주려고 날아왔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랜채스카 여사가 호주사람이라 전폭기를 보내주었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호주기로 불렀다. 실은 슈팅스타라고 불리었던 미군 전폭기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전폭기 슈팅스타

슈팅스타는 이야포에 정박한 피난민선을 한 바퀴 선회하고 사라졌다. 피난민선 꼭대기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윽고 다시 나타난 미군 전폭기는 느닷없이 피난민선을 향해 기총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면서 피난민들은 쓰러져 갔다. 슈팅스타가 기총을 쏟아 붓고 사라진 후 이야포 몽돌 밭에는 150여구 시신이 널려 있어야 했다. 그 시신 중에는 엄마 등에 포대기에 업혀 있던 세 살 박이 아기도 있었다.

미군전폭기에 의해 집단학살 당 한 시신들은 그 해 여름 안도로 내려와 있던 영암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다시 피난민선에 실렸다. 그리고 경찰은 시신이 가득한 피난민선에 기름을 붓고 태워 수장시켜 버렸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이야포 피난민 미군 전폭기 집단학살 사건이다. 그날이 1950년 8월 3일 아침이다.

자신의 부모가 수장되는 모습을 뭍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던 생존자 이춘석(당시 16세)과 안도 목격자 이서연(당시 13세)이 팔순 노인이 되어 이야포에 함께 자리했다.

 

인터넷 신문사 여수넷통이 주최한 조촐하고 비통한 추모식이 68년 만에 최초로 열리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유족이 아닌 민간기관이 대낮에 대놓고 이야포에서 추모식을 갖은 것은 처음이다.  비통한 죽음들과 살아남은 사람의 비애를 달래기에는 너무나 외롭고 쓸쓸한 추모식이었다. 그러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채 살아와야 했던 개인의 잔인한 기억이 공적 기억으로 전환되는 날이었다. 이제 개인의 비통한 기억은 이 땅에서 일어난 공적 역사로 기록되어야 한다.

추모식에는 열강들의 패권 대리전쟁도, 이데오르기에 의한 혼돈의 시기도 겪지 않았을, 그래서 어떤 연관된 의식과 감각도 없을 여고생이 추모사를 낭독한다.

“폭력의 가해자인 미국, 이를 묵인한 지난 정부, 관심 갖지 않았던 모두의 책임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몰랐던 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여고생의 추모사는 학살 그 이후에 대해 너무나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마치 인권문제에 세계적 권위를 받고 있는 스텐리 코언(Stanley Cohen 런던 정경대학 명예교수)이 집필한 명저 ‘부정하는 국가 외면하는 대중’을 몇 한 문장으로 압축한 것 같았다. 여고생은 또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무고한 죽음과 전쟁이 이 땅에서 없기를, 평화만 가득하기를, 억울한 죽음을 기리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왜 이런 절실한 기도를 68년 세월동안 침묵하거나, 외면했던 기성세대와 부정했던 국가 대신 여고생이 올리게 되었을까. 부끄러워야 할 사람은 여고생이 아니라 외면하고 묵종했던 이 땅의 기성세대다. 그리고 사건이 드러나지 않게 은폐했던 잔인한 국가다.

스텐리 코언은 집단적 부인은 공적 역사임을 역설적으로 반증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코언은 진실을 부정하는 국가주도 고전적 은폐 방식은 첫째로 ‘부정’ 이 동원된다고 한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사실이 드러나면 다음으로는 이데오르기를 내세워 가린다고 한다. 당시 북한 인민군에 밀려 안도에 주둔한 영암 경찰서 경찰들이 시신들을 피난민선에 다시 실어 넣고 배에 불을 질러 침수시켜버린 것은 피난민선 선장이 빨갱이였다는 소문을 안도 주민들과 살아남은 피난민들에게 퍼트린 뒤였다.

미군 전폭기의 피난민 학살을 정당화 시킨 것이다. 학살 당 한 피난민들은 뭍에 묻히지도 못한 채 그렇게 수장되었다. 경찰의 이런 이데오르기 조장은 안도 주민들로 하여금 학살 당 한 피난민 시신들을 뭍에 묻지 않고 피난민선에 다시 실어 수장시키는데 돕게 만들었다.

국가주도 은폐행위 다음에는 종교가 투입된다. 밑도 끝도 없이 마음의 평화와 미래 피안의 세계를 주술 함으로써 사실을 외면하고 도포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설혹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진실은 가리고 오로지 기도만을 종용한다. 

결과적으로 부인이고 그리함으로써 진실은 은폐된다. 이야포 학살사건 진실은 미국의 한반도 패권을 위해서는 피난민이든 무엇이든 움직이는 모든 것은 사살하여 저지하는 것이었다.

미군 전폭기의 무차별 학살은 이야포 뿐만 아니었다. 전선이 형성되는 곳이면 피난민이든 누구든 움직이는 모든 것에 폭격을 해댔다. 

서울 영등포역 대전역 경남 창녕 경북 포항 등 미군 전폭기에 희생된 민간인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성격을 여실히 반증하는 증거들인 것이다.

미국은 북한 공산군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주려고 참전한 것이 아니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소련으로부터 동남아시아 패권을 지키려 즉각 대응했다. 

유엔결의에 의해 유엔 지상군이 파견되기 전부터 이미 미군 전폭기를 투입했던 것이다. 지상에는 38선 이남으로 남하하는 모든 물체에 대해 사격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그렇게 발생한 학살이 1950년 7월 26일 충북 영동 황간면 노근린 피난민 학살사건이다.

노근리에서 피난민 학살을 한지 불과 며칠 뒤 미군은 또다시 여수 남면 안도 이야포 및 횡간도에 떠 있는 모든 물체에 대해 전폭기 기총을 퍼부은 것이다. 미군 전폭기에 의한 이야포 학살 사건은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 성격을 극명하게 대변하는 사건인 것이다. 

노근리 학살사건은 한국정부가 부정 은폐하다가 주민과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미국의 학살 시인과 클린턴 대통령 사과를 받아냈다. 그리고 지금은 억울한 죽음들을 위로하는 추모관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야포 학살사건은 아직도 진실규명은커녕 학살사건 조차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추모사를 낭독한 여고생이 답을 말 한다.

“관심 갖지 않았던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학살사건에 대해 외면하는 대중을 지적한 것이다. 국가주도 부정 은폐 호도는 종국적으로 국민 대중의 무의식에 이식시켜 망각이라는 집단무의식을 형성하게 만드는데 그 최종목적이 있다. 

이 단계에 이르면 국가가 주도하지 않고 사회 전면적 사상통제를 하지 않아도 전사회가 집단적 ‘부인‘ 이나 ’외면‘을 하게 만든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에 따라 처벌하지 않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를 받지 않아도, 어느 선까지 기억하고 시인할 것인가에 대한 묵시적 합의에 이르게 된다. 

이른바 집단 반공무의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프로이드(Sigmund Freud) 식으로 하자면 개별 자기방어기제가 동원되는 것이고, 융(Carl Gustav Jung) 식으로 하자면 집단무의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지배 권력에 의한 지배 이데오르기에 의해 대중의 기억을 망각이라는 자기방어기제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필자는 학살사건을 취재하기 안도를 돌아다니면서 나이든 어르신들을 만나기만 하면 미군 폭격기 학살사건에 대해 물어보았다. 안도에서 살아오신 분들 중 학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 있거나 알려고 하는 주민 또한 없었다.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개인 성격의 산물이 아니다. 설혹 인간의 내면에 부인기제가 작동하고 있음을, 그리고 골치 아픈 기억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욕구가 자리 잡고 있음도 아니다. 

잔인한 국가가 조장해 놓은 집단 반공 이데오르기에 의한 무의식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멸치 황금어장인 이야포에서는 어민들이 멸치잡이도 하지 않았고 해녀들도 물질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혹한 사건에 대한 외면으로서 망각하고 싶은 것이었다. 

잔인한 국가의 폭력적 부인 조장에 의해 외면이라는 대중 무의식으로 형성된 것이다. 결국 비통한 기억은 피해 당사자 개인의 기억으로만 가슴에 박히게 되었다. 설혹 집단학살 사건 일부가 드러나면 국가는 대중을 더 높은 대의명분 즉 자유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투과정에서 일어난 우발적 오인폭격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들여다봐야 한다. 누군가 식사하거나 창문을 열거나 아니면 그저 어슬렁거리고 다닐 때에도 고통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남 고등학교 여학생은 추모사를 이어서 이렇게 낭독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에게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줍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이래저래 상처를 입게 된다. 그것이 가슴에까지 파고들어 상흔을 남겼을 때 삶의 생채기라고 표현한다. 생채기는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아물어지거나 잊혀 지기도 한다. 

생채기에 의한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세월이 가져다주는 망각이다. 그래서 까뮈는 산 사람을 위해 망각이 존재한다고 말 했다.

그러나 피고름 주머니처럼 까뮈의 말이 들어맞지 않는 생채기들이 있다. 생을 마감할 때 까지 고통만 더 해가는 상처도 있는 것이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상처를 상흔이라고 부른다. 그런 상흔을 가져다 준 것이 나의 잘못이 아닌 타자의 폭력에 의한 것이라면 그렇다. 

비통함을 아무도 위로나 공감해 주지 않을 때, 비통함은 자신을 둘러싼 것을 부정하게 된다. 그 타자가 국가이라면 국가의 존재이유는 부정될 수밖에 없다. 국민이 공감하지 않고 외면할 때 상흔의 주머니를 고스란히 가슴에 담고 있어야 할 피해자는 국민이기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국민이 없는 국가는 결국 없는 것이다.

학살이 일어난 후 68년 동안 누구도 감히 미국과 정부 그리고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 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국가주도의 반공 이데오르기에 의한 부정과 은폐 호도에 감염되지 않은 여고생이 담담히 말하는 것은 참으로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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