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곡조차 죄가 되던 세상, 떠도는 혼령이여! -
조 계 수 (시인, 방송작가)
시월이 오면
어혈을 풀지 못한
여수 앞 바다는
굽이굽이 갈기를 세워 달려든다.
신월리에서
만성리에서
가막섬 애기섬을 돌아오는
저 외치는 자의 소리여,
그 소리곁에
천년을 두고도 늙지 않는 바람이
오동도 시누대 숲을 흔들어 깨운다.
반세기 가려진 햇빛이
비늘을 벗는다.
살아서 죽은 자나
죽어서 산 자나
이제는 입을 열어 말할 때
오! 그날 밤
하늘마저 타버린 불길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었다.
눈먼 총부리에 쓰러진 그들은
제 살 제 피붙이였다.
밤 내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찾아
피묻은 거적을 들추는
어미의 거친 손
통곡조차 죄가 되던 세상
그 핏물 스며든 땅에
씀바귀, 지칭개, 민들레
들꽃들은 다투어 피어나는데
아직도
어두운 흙 속에 바람 속에
두 손 묶여 서성이는 혼령이여,
- 자유하라,
그대들을 단죄 할 자 누구도 없나니 -
허물을 털고 일어서는 진실만이
용서와 사랑의 다리를 놓는 법,
그 다리를 건너오는 아침을 위해
눈감지 못하는 하늘이여,
다물지 못하는 바다여,
50년 바람 속에 떠도는
호곡을 그치게 하라. (2000년 作)
20년 전의 이 시가 노래가 된다.
오는 10월 19일은 여순사건 72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전남 동부권과 지리산 인근에서는 1만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해서 관련 단체에서는 유가족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희생자들의 억울한 원혼을 달래기 위해 추모제를 열 예정이다.
10월 18일(일) 오후 4시 이순신광장에서는 여순사건희생자 합동추념식이 열린다. 추모 일정 중 하나는 추모음악회이다.
이날 추모 음악 중 조계수 시인이 쓴 위 시에 조승필 작곡가가 지은 <진혼>이라는 노래가 처음 발표된다. 또한 연주에 앞서 조 시인도 '진혼' 낭송으로 혼을 달랜다.
노랫말에서는 원래 시에서 한 단어를 바꾼다. '50년'세월이 이제 72년이 됐으니 '긴세월'로 노랫말에서는 고쳤다.
작곡가 조승필씨는 여도초등학교에 재직 중인 교사로 지역교과서 출판위원이다. 동요와 시 노래를 활용해 100곡 이상을 작곡한 그에게 여순사건 추모곡은 어떻게 나오게 됐을까?
"작년 제1회 여순항쟁창작가요제 이후 노래로 지역의 아픔을 함께하겠다고 다짐했어요. 광주 5.18에 <임을 위한 행진곡>, 제주 4.3에 <잠들지 않는 남도>가 있듯이 여순 10.19도 대표할 만한 노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9월 추석 전 여순사건 관련 지역교과서 신설단원 자료제작을 위해 시립묘지에 있는 희생자묘를 찾았어요. 비석 앞에 놓여진 2편의 시가 있었는데 한 편의 시를 읽고 머리를 얻어맞은 듯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그 시가 바로 조계수 시인의 <진혼>입니다. 그날 바로 곡을 만들어 시인에게 연락하여 이순신광장에서 열리는 72주년 추모음악회에 이 곡을 올리기로 하였습니다."
조승필 교사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조계수 시인을 소개해줬다. 단아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우수에 젖은 얼굴이다. "학창시절 시에 관한 상이란 상은 다 타봤지만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조용히 시를 쓰겠다"고 말한 그녀는 "마스크를 쓰기 전에는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남한테 독이 되는 줄 몰랐어요"라며 그녀의 시 <진혼>에 얽힌 사연을 들려줬다.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순사건 52주기 추모 시로 쓴 시 <진혼>에 곡을 붙이고 싶다는 작곡가 조승필 선생이었습니다. 20년이 넘은 시를 기억해 주는 분이 있어 반가웠어요. 그것도 노래로 만들겠다는 것, 나의 슬픈 시가 노래가 되어 상처와 아픔을 나눌 수 있다면 시 이상의 감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가 탄생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2000년 9월 어느 날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이환희(작고) 선생으로부터 여순사건 52주년 추모시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순간, 죄 없이 죽임을 당한 무고한 시민들의 영혼을 달래는 진혼곡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불행한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 희생자의 명예 회복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다.
몇 개의 상징적인 언어가 풀어지면서 단숨에 쓰게 되었다. 이 시가 김금수 선생(한국노동사회 연구소 이사장)에 의해 <한겨레신문> 컬럼(2000년 9월 15일)에 소개되면서 유족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족은 아니었지만 그 아픔이 그녀의 아픔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안에 잠재되어 있는 슬픔의 근원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시를 쓴 지 이십 년이 흘렀지만 떠도는 원혼을 달랠 수 있는 것은 없다. 진실 규명도 명예회복도 되지 않았다는 게 더없이 안타깝다.
"슬프다! 긴 세월이 짧아져 진혼을 노래하지 않아도 될 그런 날을 간곡히 기대한다"며 그녀는 소망을 말했다.
"72주기가 되니 52주기 때의 시 내용을 고쳐야 할 부분이 있었어요. '반세기 가려진 햇빛이니', '50년 바람 속'이라는 표현이 맞지 않았는데 악보가 나왔을 때 작곡자에 의해 그 부분이 '긴 세월'로 바뀌어 있었어요. 그래도 좋았어요. 진혼은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불리어져도 될 듯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