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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안도 이야포 빨갱이 사냥의 공포

[이야포 특별기고] ➄ 2부 학살 진실을 밝힐 결심

  • 입력 2022.07.27 09:25
  • 수정 2022.07.29 11:09
  • 기자명 양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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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경찰주둔과 폭격상황을 증언한 어르신 
▲연도 경찰주둔과 폭격상황을 증언한 어르신 

밤이 깊을수록 여수바다는 더욱 빛나고 아름다웠다.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은 여수 밤바다에 연신 감탄하고 있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수바다에서 그토록 참혹한 역사비극이 현재와 과거로 엇갈리면서 희비쌍곡선을 긋고 있었다. 나는 어르신이 구술하는 증언을 녹취하면서 노트에 받아 적고 있었다. 그러다 볼펜을 탁자에 내려두고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을 바라보았다. 안도에서 부모형제를 잃고 연도로 이동하고 연도에서 군함을 타고 부산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과정에서 생존자 어르신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억울합니데이. 정말 너무 억울합니데이. 우린 정부가 이동해라 해서 이동했는데 와 고아가 됐심니꺼.”

그동안 여러 밤을 생존자 어르신과 함께 잠을 자면서 증언을 녹취하는 것 중 내가 정말 알고 싶은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부산 성남초등학교에 수용되어 있던 서울 피난민들이 정부의 이동명령을 받고 떠났다는 부산 제 3부두와 쌀 배급을 받았다는 충무(현 통영) 그리고 거문도 방향으로 피난선이 떠난 욕지도 현지 주민들에게서 서울피난민들이 머물렀다는 증언을 확보한 상태였다.

여기서 당시 전선 상황과 한국과 미국의 피난민 정책을 설명해야겠다. 1950년 8월 3일 기점은 낙동강 방어선을 두고 치열한 피아간에 공방이 펼쳐지던 시기다. 전남지역은 인민군 6사단 방호산 부대가 순천을 거쳐 바로 낙동강 방어선을 무너뜨리려 진주로 진군했고 여수는 소수부대만 보내 무혈점령한 상태였다.

유엔군의 폭격도 포항, 왜관, 마산 등 낙동강 방어선 사수에 투입되었다. 즉 이날 여수는 미군 폭격기가 날아올 일이 없는 피아간 교전상태지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미군기가 피난선을 적으로 오인해서 비극이 일어났다는 국내 언론들의 보도는 맞지 않다. 피난민 중에 적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염려가 방아쇠를 당기게 했다는 노근리 학살 기사들도 미국의 부수적 살인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기사에 불과하다.

미군 폭격기는 과연 피난민들 중에 인민군이 섞여 있다고 오인하여 학살 했을까. 그래서 노근리 학살을 부수적 피해라고 변명하는 것일까. 만약 이야포 피난민 학살이 세상에 드러나면 미국은 폭격기가 지나가다 적이 은신처로 오인하여 폭격했다고 얼버무릴까. 그리고 한국정부는 또다시 침묵할까. 이전 글에서 말했다시피 이건 부수적 살인이다.

이점은 매우 중요하므로 근거를 대야겠다. 성공회대 강선현 교수가 발굴한 사료를 게재한 논문 ‘한국전쟁기 한국정부와 유엔군의 피난민 인식과 정책’에 의해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공식적인 피난민 대책회의는 1950년 7월 25일 대구의 한국정부청사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는 노블(Harold J. Noble) 미대사관 1등 서기관, 미 8군 헌병사령부 삭스(Sachs) 대령, 미8군 첩보부 타키스톤(Tarkinston) 대령, 미8군 인사부 맥거번(McGovern) 소령 그리고 한국은 김갑수 내무부 차관, 최창순 사회부 차관, 김태선 치안국장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맥거번 소령이 피난민 통제와 이동에 관한 문제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이것은 노근리나 이야포나 진실을 밝힐 중요문서이므로 아래 항목을 주목해야 한다.

2항. 한국경찰의 소규모 연락단이 모든 피난민의 이동 및 흐름 통제에 관해 지휘관을 지원하기 위해 미 8군사령부와 각 사단 사령부에 배속된다.

3항. 집단이나 개인별로 도시, 마을 그리고 지역으로부터의 이동은 권한을 가지 지휘관의 허락 없이는 금지된다.

4항. 피난민의 이동(도시 소개)은 미8군사령관이나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실시된다. 이러한 이동은 다음과 같이 실시된다.

1)한국경찰 연락관실과 접촉하고 그 지역 사무실(경찰서)에 소개를 통보하며, 소개부대, 시기, 지역을 분명히 한다.

2)한국경찰 연락장교는 경찰채널을 통해 정보를 제공해 피난민의 이동을 원활하게 한다. 사전에 선택된 집결지로 향하는 도로상의 피난민을 통제하고 검문소도 설치한다.

워커(Walton H. Walker) 미8군사령관은 이 합의사항을 승인하고 한국정부 신성모 국무총리에게 서한을 보내 공식 협력을 요청했다. 그리고 7월 26일 군사고문단 (KMAG)을 포함해 각 부대 지휘관에게 피난민 대책을 지시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어떠한 피난민도 전선을 통과하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 -

여기에 7월 25일 무쵸 한국대사는 러스크(Dean Ru나) 미국무부 동북아시아차관보에게 피난민 대책회의 결과를 다음과 보고 한다.

-만일 피난민들이 미군전선의 북쪽에서 나타난다면 위협사격을 할 것이며, 그래도 계속 이동한다면 피난민에게 사격한다. -

이 피난민 대책회의 사료에 바탕 하면 노근리 피난민 학살사건이 부수적 피해가 아닌 부수적 살인이었음이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영동 주곡리 마을사람들은 미군 소개명령으로 노근리로 이동 중이었고 노근리에는 미 1 기병사단이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여기에 학살의 진실이 있는 것이다.

이야포 피난민 학살사건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피난선을 누가 왜 정지시켰고 누가 폭격요청을 했냐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알기 위해 금오도, 안도, 연도에서 예부터 살고 계신 어르신들 백여 명 가까이 1950년 8월 3일 전후 정찰기를 본 적 있냐고 물어봤다.

왜냐면 당시 미군폭격기 폭격요청 시스템은 두 가지 방식이었다. 하나는 지상군이 적을 발견하고 지상통제소에 좌표를 불러주면 폭격기가 날아와서 목표물을 폭격하는 것 하나와 모스키토라는 정찰기가 날아다니면서 적이 은신해 있을 만한 곳을 발견해서 폭격요청을 하는 것이다.

안도에는 미군 지상군이 없었다. 연도에 영암 나주 경찰이 주둔해 있었고 이야포 곶머리를 경계하고 있던 경찰이 지나가는 피난선 검문을 한다고 강제정박 시켜 놓고 나타나지 않았다. 정작 나타난 것은 다음날 오전 아홉 시경 미군 폭격기였다.

미군 폭격기는 이야포로 정확히 날아와 해상에 떠있는 배들 중에 피난선만 육안 확인 후 폭격하였다. 이게 과연 부수적 피해인가. 폭격기는 누가 요청했는가. 안도 금오도 연도 주민들 중 정찰기를 본 사람은 없다. 정찰기가 폭격기에 좌표를 불러주지 않았다면 누가 좌표를 불러 주었는가. 여기에 이야포 피난민 학살이 노근리 피난민 학살과 다른 점이 있고 진실이 있는 것이다.

나는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포 건너편 연도(소리도)에는 영암 나주 경찰 병력이 주둔하면서 해상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방어선 전초기지로 안도 성산과 곶머리에 경계병을 세웠던 것이다. 이것은 이야포 주민들 증언과 생존자 고 이춘송님의 육필증언에서 공히 일치한다.

연도(소리도)에 정말 경찰이 주둔하고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안도에서 배를 타고 연도로 건너갔다. 이리 묻고 저리 알아보고 하여 연도에서 한 평생 살아오신 어르신을 어렵사리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연도 어르신은 좀처럼 증언을 해 주지 않고 몸을 떨고 계셨다. 공포, 그때 그 시절, 빨갱이 사냥을 하던 공포가 아직도 남아 있던 것이다.

연도 역포마을 어르신은 떨리는 목소리와 손가락으로 역포마을 언덕을 가리키며 이렇게 증언해 주었다. 성함은 극구 밝히지 말아달라는 부탁으로 어르신으로 칭한다.

“긍께… 이런 말해도 별 일 없을랑가 모르것는디… 저그 심상소학교 자리에 경찰들 본부가 있었고….”

지금은 없어진 심상소학교는 일본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생존자 고 이춘송님 육필증언에도 안도에 경찰병력 이백 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 증언과도 일치한다.

나는 연도 어르신에게 물었다.

“그믄 어르신 그날 미군비행기가 폭격하는 것도 봤습니까?”

“글지 비행기가 요리 빙빙 두 바쿠 돌드만 그냥 내리 쎄려때려불데.”

미군폭격기 조종사가 이야포 상공에서 두 번 선회하면서 피난선을 육안으로 내려 봤다는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 증언과도 맞아 떨어진다. 피난선 생존자들이 연도 역포마을에 와서 수용되어 있다가 군함을 타고 떠났다는 증언도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 증언과도 일치한다.

▲ 증언록
▲ 증언록

이야포에서 폭격 맞고도 살아남은 이백 여 피난민들을 일몰을 택해 안도 서고지에서 여러 척 배로 연도로 이동 시키고, 연도에서 또다시 군함에 태워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로 다시 이동시킬 수 있는 조직적 힘을 가진 집단은 누구일까.

내가 가장 손에 쥐고 싶은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 한 개인 르포소설가로서는 증언 외 당시 경찰문서를 입수할 경로가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또 생존자 이춘혁 어르신이 폭격기 사진을 비교해서 지목하고, 고 이춘송님 육필증언에서 기록된 폭격기 F-80이 오키나와 기지에서 출격한 작전일지도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립 문서기록관리보관소 (NARA)에 가면 얻을 수 있다는데 이 역시 한 개인으로서는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말해야겠다. 작년 이야포 71주년 추념식 때 나는 여수시에 이야포 수중에서 발견된 피난선 유해 추정 물체를 인양해서 전문가 검증을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72주년 추모식이 되었는데 아직도 인양이 안 되고 있다. 왜 여수는 역사를 인양하여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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