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우리한테 식량도 주고 고거로 피난민들 밥도 해 줬는디 왜그쓰까이…….”
이야포 할머니는 파괴와 구원의 신화를 말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역사학자 김학재의 말을 빌려보자.
파괴가 잔인할수록 구원의 이미지는 신격화 된다. 한국사회에서 한국전쟁의 이미지는 매우 선명하고 극도로 협소한 이미지에 고착되어 있다. 구원자로서의 미국과 유엔이라는 이미지가 그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받았다는 구원도 순수한 선의의 산물이 아니었다. 한국의 내전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려던 사람들을 구원했을 뿐이다.
신생국가에 불과했던 미국은 이차 세계대전을 통해 근육을 키우고 실업률 제로신화를 썼다. 그러나 곧 경제공황이 닥쳤다. 이때 구원처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이에 당시 미국무장관 에치슨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우리를 구했다."
한국전쟁 파괴를 통해 미국의 경제공황은 구원되었다. 한국에서의 구원이란 파괴의 이면이자 사후 수습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구원의 실체를 들여다보면서 파괴와 절명을 초래한 행위자들이 동시에 자신들의 행위로 발생한 전쟁피해를 사후 수습하는 장면을 목도한다.
그리고 파괴하는 동시에 수습하는 양상이 전쟁에서 파괴와 원조가 서로를 정당화하며 가장 잔혹한 파괴자가 가장 숭고한 구원자는 되는 기묘한 현상을 이야포 할머니를 통해 듣게 된다.
우리는 파괴를 통한 구원의 이미지 미국에 대해 지나치게 신격화 할 필요는 없다. 구원의 이미지를 통해 파괴가 가려지면 안 되는 것이다. 지나치게 과공비례(過恭非禮)하여 시쳇말로 호구 잡히지는 말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야포 원통한 죽음이 나쁜 죽음으로 내몰린 것도 추도식을 통해 바로 잡아야 한다.
“할매, 근디 누가 피난선 선장이 빨갱이라고 소문 냈다요?”
“글씨……나도 그 말은 나중에서야 듣기 했는디 난 그때 쬐간했을 땐께 잘 모르것네.”
피난민들 원통한 죽음은 누군가 피난선 선장이 빨갱이라는 소문을 내자 갑자기 나쁜 죽음으로 되어버렸다. 피난민들을 구조하던 마을청년들은 피난민들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서야 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때 빨갱이 사냥을 당했던 공포 때문이었다. 결국 피난민 시신들은 통통배를 타고 온 경찰에 의해 피난선과 함께 불살라져버렸다. 그 잔해로 추정되는 물체가 지금 이야포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생존자나 유족들이 이야포에 찾아와 제사도 제대로 지내지 못했다. 심지어 결혼소식을 알리려 무덤 없는 부모 산소에 온 유족 신혼부부가 간첩으로 오인 받아 조사를 받는 일도 있었다. 군사정권 시절도 아닌데 비극적 역사가 올라오지 않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여수시에 다시 묻고 싶다.
다행히 올해는 여수시와 함께 민관합동 추도식이 열린다. 우리가 추도식을 하는 까닭은 비통한 죽음을 당한 혼령을 위로하자는 것만 아니다.
한국전쟁을 다시 생각해 보고, 나쁜 죽음으로 내몰렸던 원혼들을 원통한 죽음의 자리로 옮겨놓자는 것이다. 추도식을 통해 신성하고 양지바른 조상 묘에 원통한 혼을 이장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후손이 이야포를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는 지금 우리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