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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맺힌 절규... 이춘혁,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전말을 세상에 알리다

[이야포 특별기고] ⑭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민간인 희생자 유족 이춘혁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 쫌, 명예회복과 보상 좀 받게 해주세요”

  • 입력 2022.08.03 05:05
  • 수정 2022.08.03 05:23
  • 기자명 조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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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남면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민간인 희생자 유족, 이춘혁 어르신이다. ⓒ조찬현
▲ 여수 남면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민간인 희생자 유족, 이춘혁 어르신이다. ⓒ조찬현

“비행기가 4대 날아왔어요. 기관사하고 저하고 눈도 맞췄어요, 이렇게 보고... 이 분이 한 바퀴 삥 돌아서 이렇게 돌아오자 비행기가 오자 그 다음부터 막 배에다가 총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우성이죠. 또 돌아서 또 와서 총을 쐈어요.”

16살 소년의 증언... 350명 탄 피난선 미국 제트기로부터 무차별 총격 받아

피난길에 나선 16살 소년은 350명 탄 피난선이 미국 제트기로부터 무차별 총격을 받았다고 했다. “비행기가 오자 그 다음부터 막 배에다가 총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우성이죠. 또 돌아서 또 와서 총을 쐈어요.”라며 당시 실상을 증언했다. 지난달 11일 여수 학동‘ 2012 포토그라피 스튜디오’에서다.

어르신은 16살 되던 해(1950년) “6월 28일 날 거기(서울 마포구 염리동)서 피난 나왔습니다. 그 당시에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내(나), 여동생 또 여동생, 또 남동생, 꽃다운 일곱 식구가 살았습니다.”라며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이춘혁(88) 어르신은 여수 남면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민간인 희생자 유족이다. 그는 증언 마지막에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 쫌, 명예회복과 보상 좀 받게 해주세요.”라며 울먹였다.

다음은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민간인 희생자’ 유족인 이춘혁 어르신의 증언 내용이다.

“저는 부산시 금정구 부곡동 sk아파트 사는 이 춘혁입니다. 그 당시 제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16살인데 우리가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살았습니다. 6월 28일 날 거기서 피난 나왔습니다. 그 당시에 아버지, 어머니, 누나, 내(나), 여동생 또 여동생, 또 남동생, 꽃다운 일곱 식구가 살았습니다.

살다가 피난 와가지고 우리 배는 약 한 350명 탔다 했습니다. 선장 꼭대기, 선장 앞에, 밑에 기관실, 막 쫙 타가지고 350명 탔다 했는데 배가 떠났습니다.

어디 가는 것도 몰랐습니다. 누가 인솔자도 없고 그냥 배 타고 갔습니다. 어딘지, 가다가 해가 저물어서 여수 이야포 그 항구지요 지금, 이야포 항구에 와서 8월 2일 날 거기서 배에서 350명이 전부 누워서 잤습니다. 누워 자고 아침 돼가지고 누군가 모르겠지만 갖고 온 주먹밥을 일찍 탄 사람들이 먹는 중에 미국 제트기가 바로 왔어요.

저희 식구들은 선장 바로 밑에 거기 자리를 잡았습니다. 비행기가 4대 날아왔어요. 기관사하고 저하고 눈도 맞췄어요, 이렇게 보고, 이 분이 한 바퀴 삥 돌아서 이렇게 돌아오자 비행기가 오자 그 다음부터 막 배에다가 총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우성이죠. 또 돌아서 또 와서 총을 쐈어요.

제일 처음 온 한 대는 한 번 쏘고, 그다음부터 온 비행기는 두 번씩 쐈어요. 결국은 일곱 번 왔죠. 일곱 번 만에 배가 갔습니다. 그래서 나도 기관실로 쫓아 내려오니까 어머니가 막내동생 세 살짜리 업고 기관실로 먼저 와 있었어요. 어머니가 이래도 나가 살라는 거라요. 제가 나이 아홉살부터 수영을 했습니다. 거기서 옷 입은 채로 안도 이야포에 가서 바로 뛰어 내려가서 헤엄치고 나왔습니다. 나와가지고 각자 숨어 있었죠.

저는 그렇습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 쫌, 명예회복과 보상 좀 받게 해주세요.”

이야포 미군폭격사건은 1950년 8월 3일 여수시 남면 안도 이야포 해상에서 미국 공군기의 발포로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

1950년 8월 3일 안도 이야포해상 미공군기 발포... 피난민 150여 명 숨져

▲한반도 상공을 비행중인 미해군 밸리포즈의 함재기 F9-F Panther)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박종길 제공
▲한반도 상공을 비행중인 미해군 밸리포즈의 함재기 F9-F Panther)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박종길 제공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50년 8월 2일 저녁 이야포에 피난선이 도착했다. 부산에서 출발 통영과 욕지도를 거쳐 안도에 오게 된 것이다.

1950년 8월 3일 여수시 남면 안도 이야포 해안에서는 미군기에 의한 기총사격으로 150여 명의 피난민이 숨졌다. 이 사건을 두고 미군의 폭격을 오폭이라고 규정짓기도 한다.

피난민 수송선에 왜 포격을 가했는지, 유족들은 얼마나 살아있는지, 안도 이야포 사건은 진상규명과 피해자 확인 등 역사적 진실을 살펴야 할 많은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다.

한편, 제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미 해군 함재기의 기록을 조사하였는데 당시 포항 앞바다에 있었던 항공모함 밸리 포즈의 항해일지에서 7월 말에서 8월 초 기간에 서남해안을 정찰하고 공격한 기록을 확인하고 있다.

여수 지역사회연구소 박종길 소장이 전하는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박종길 부소장이 관련 신문기사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자료사진)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박종길 부소장이 관련 신문기사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자료사진)

이와 관련 남면 안도 이야포 미군 폭격기에 의한 피난민 희생 사건에 대해 여수 지역사회연구소 박종길 소장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춘송(이춘혁 동생)씨 진술에 따르면, 부산진구 성남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피난민 350여 명은 아군의 지시에 의해 1950년 7월 21일 부산연안부두에서 여객선을 타고 경남 통영군 충무동으로 이동하여 학교에 수용되었다. 당일 오후 2시경 피난민들은 다시 화물선에 태워져 통영군 욕지도로 이송되어 이곳 학교에서 5일간 머물렀다.

8월 2일 피난민들은 다시 목선에 태워져 욕지도를 출발하여 8월 2일 저녁 무렵,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해안에 접근하였다.

사건 당일인 8월 3일 오전 9시경, 이야포 상공에 미군 전투기 4대가 나타나 먼저 전투기 1대가 기관총 두 발을 신호처럼 쏘고 난 뒤, 나머지 전투기들이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날아와 피난민 배를 향해 기총사격을 하였다. 피난민 배에 대한 폭격은 한차례에 끝나지 않았고 전투기들이 안도 이야포 해상을 선회하면서 총 4차례에 걸쳐 기총사격이 이루어졌다. 이 폭격으로 배를 타고 온 피난민 약 150여 명이 사망하였고, 50여 명이 부상하였다.

* 참고 자료 (제 1기 진실화해위원회 발행, 2010년 상반기조사기록 7권 437페이지 )

미해군 밸리포즈의 함재기 F9-F Panther

 1950. 8. 3 이야포 공격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트기이다. 당시 주민들이 호주기로 기억하는 비행기는 제트기를 말하는데 F-80 슈팅스타는 하얀색 동체 F-9 팬더는 검은색 동체가 특징이었다. 안도의 주민의 증언은 검은색 동체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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