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역사의 호남 최초의 여학교가 나의 모교다. 금년 2월23일 총동문회장 이․취임식이 있었다. 우리 총동문회는 통상의 다른 학교와 달리 중․고등학교가 하나의 동문회로 구성되어 운영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전 인류가 고통받을 때 우리 총동문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 3년간은 코로나19로 인해 총동문회를 개최할 수도 없는 실정이었고, 이사회비도 걷을 수 없게 되어 재정이 바닥난 상태다 보니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임회장은 건강도 안 좋은 상태에서 그동안 사비를 털어가며 고생을 많이 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회장직을 맡을 만한 후배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고사했다. 전임회장과 선배들은 나만 바라보고 있었고, 임시 이사회에서 선출된 이상 나까지 거부하면 총동문회가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어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회장에 취임한 후 회칙을 일부 개정하여, 총무와 재무를 분리하는 등 이사회를 정비하고,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이사회 개최 등 행사가 있을 때마다 회의 자료에 구체적인 수입․지출 내역까지 공개하도록 했다. 이사회 단톡방을 개설하여 동문 정보를 공유하며 모교와 동문회에 관심 갖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갔다.
동문회 재정이 열악한 상황이지만 이제 다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는 시기이니 만큼, 이사회원들에게 처음부터 부담을 주면 불편해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기금모금을 급하게 하지 않고 달팽이가 기어가듯이 천천히 하려고 생각 중이었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 떡인가?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여고 9회 채 선배님이 “회장님, 집행부가 회계도 투명하게 공개하고, 열정적으로 잘하는데 동문회 잔고를 보면 애가 타서 오늘 동문회 발전 기금으로 천만원을 입금했어요. 십시일반 기금을 모았으면 좋겠어요.” 하시는 게 아닌가!
아니, 통 크게 일천만원을!
요즘은 경제 활동하는 남자들도 천만원 내는 게 부담되어 동문회장을 기피하는 추세라고 한다. 남학교의 경우 회장은 통상적으로 천만원의 찬조금을 내도록 되어 있다. 우리 동문회는 회장이 의무적으로 부담하는 것은 없지만 동문회를 운영하려면 사비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에 채 선배님께서 “십시일반 모금하면 좋겠다”고 말씀했기 때문에 약 50∼100만 원정도 예상했는데 너무나 뜻밖이었다.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선배님! 천사님! 동문을 사랑하는 마음 크게 받아 소중하게 잘 쓰겠습니다.”라고 몇 번이고 감사 전화를 드렸다.
이사회 단톡방에 ‘여고 9회 채 선배님이 천만원을 기탁했다는 내용과 천만원 중 4백만원은 장학금으로 6백만원은 발전기금으로 사용하겠다.‘라고 공지했다. 또한, 회장으로서 기부천사 채 선배님께 감사 인사를 댓글로 올렸더니, 이어서 ’감사합니다, 대박나세요!‘ 라는 감사와 축복의 댓글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송년회를 앞두고 십시일반 찬조금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물들어 올 때 노 저어라’ 라는 속담이 있듯이, 재무는 이사회 단톡방에 입금 내역이 표시된 통장 사본을 공개하며, 감사의 댓글을 달아주자 자연스레 찬조 분위기가 조성됐다.
단톡방은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정겨운 언어들로 감사와 축복의 댓글이 물결치듯 넘실대는 행복한 공간이 되었다. 나는 채 선배님께 ‘무얼 해 드려야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매년 입학식 때 중․고등학교에 지원하는 장학금과는 별개로 총동문회 송년회에서 「채 선배님 명의의 장학금」을 본인이 직접 후배 장학생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제1회 채 00 명의 장학증서 수여식’을 갖기로 결정한 후 선배님께 알려 드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고 뿌듯했다.
내가 채 선배님을 빛나게 해 드릴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는 없었다. 채 선배님은 “회장님이 알아서 하시지, 어째 그러세요?”하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휴대폰 너머로 전해 오고 있었다.
우리 총동문회가 재정이 열악하여 장학재단을 설립할 수는 없지만, 송년회에서 후배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새로운 전통을 세워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금년 송년회는 제1부, 저녁식사, 제2부로 구성하되, 제1부 주제는 <제1회 채00 장학금 장학증서 수여식>으로 결정하고, 채 선배님이 직접 중․고 후배 각 2명에게 장학증서를 수여하도록 했다.
또한 장학생들과 기념사진 촬영도 하고, 소감을 말씀하실 기회도 드렸다. ‘돈은 이렇게 써야 값어치 있는 거야.’ 라고 스스로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오롯이 채 선배님이 빛날 수 있도록 송년회 제1부 행사를 진행했다.
장학금 전달식에서 채 선배님께 한 말씀 하시라고 했더니, ‘채 선배님은 살면서 천사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면서, 매년 송년회 때마다 장학금을 계속 찬조하겠다’ 고 약속하시자, 장내에선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천사님! 이러셔도 됩니다, 그럼요 되고말고요."
나는 그 순간 마음속으로도 이렇게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가난한 동문회의 금년 송년회는 뜻 깊고 훈훈한 감흥의 시간들이었다.
채 선배님의 약속으로 내년 송년회 때도 <제2회 채00 장학금 장학증서 수여식> 행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일까지 술술 풀리게 되니,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되뇌고 있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