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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이슈] ① 72년의 恨, 이야포의 진실

제2의 노근리로 불리는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심명남 추진위원장 토론 내용)

  • 입력 2022.08.16 15:00
  • 수정 2022.09.14 12:41
  • 기자명 조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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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말

본문 문답 내용은 지난 8월 14일(일) 오전 8시~9시에 방영된 여수MBC 토크쇼, 뉴스&이슈 <72년의 恨, 이야포의 진실> 방송 내용을 정리했다. 심명남 추진위원장과 김주희 여수MBC기자, 박성미 의원의 토론 내용을 4회에 걸쳐 지면에 싣는다.

▲ 여수MBC 토크쇼, 뉴스&이슈 '72년의 恨, 이야포의 진실'에 출연한 심명남 추진위원장과 김주희 여수MBC기자, 박성미 시의원이다. ⓒ여수MBC 캡처
▲ 여수MBC 토크쇼, 뉴스&이슈 '72년의 恨, 이야포의 진실'에 출연한 심명남 추진위원장과 김주희 여수MBC기자, 박성미 시의원이다. ⓒ여수MBC 캡처

- 제2의 노근리로 불리는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아직 잘 모르는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요, 어떤 사건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이 사건은 1950년 8월 3일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인근 해상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부산에서 남해안 도서로 소개되어 피난민 배에 탑승 중이던 민간인들을 미군전투기 4대가 폭격해 민간인이 희생된 아직 종결되지 않은 대규모 ’민간인 집단 학살사건‘입니다.

이날 이야포에 정박 중이던 350여명이 탄 피난선은 미군폭격으로 150여명이 사망했고 50여명이 다치는 아비규환의 아침으로 변했습니다. 이후 폭격을 받은 피난선과 총에 맞아 희생된 시신에 기름을 부어 3일 밤낮이 불탔고, 일부는 산에 매장된 것으로 조사보고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피난선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었고 흰 옷 입은 다수의 피난민만 있었고 인민군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피난민 배가 전투의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에 정박해 있어 미군 전투기는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피난민임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피난선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해 무고한 민간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벌써 강산이 일곱 번이나 바뀐 긴 세월이 흘렀지만 이야포의 시간은 아직 그대로 멈춰있습니다. 마지막 생존자들은 여전히 고통의 세월 속에 삶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이야포 사건이 올해로 72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지역사회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뭔가요?

"혹자는 그동안 지역민이 아니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그렇다면 미군폭격으로 지역민들이 많이 희생된 두룩여와 여자만은 진작 알려졌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잖아요.

그럼 진짜 이유는 뭐냐? 바로 안도에서 발생한 여순사건으로 인한 '빨갱이 컴플렉스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안도가 반공섬이 되었던 점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안도의 불행한 역사를 잠시 거슬러 올라가면 1948년 10월 여순사건때 백두산호랑이로 불리는 김종원부대가 안도에서 10여명을 처형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그 배경에는 안도는 왜정시대때 일본인이 많이 살았던 황금어장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해방 후 일본인이 물러나고 일본인 어장을 관리했던 사람이 어장을 자기 것이라 하니 그동안 일제에 눌러 살았던 성난 주민들이 빼앗아 버립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앙심을 품고 여순사건때 진압군으로 들어온 김종원에게 찾아가 ’안도에 가면 빨갱이들이 있다‘고 꼰질러 버립니다. 한마디로 밀정을 짓거리를 한 거죠. 이후 김종원 부대가 여객선을 타고 섬에 들어오자 주민들은 순식간에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럼 당시 여수사건에 급파된 김종원의 진압군 부대는 어떤 상태였을까요. 우선 시민군에게 막혀 버렸고 선상에서 박격포를 쐈는데 진압군에게 떨어져 아군인 진압군이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러자 미군의 지휘를 받던 김종원이 작전에서 배제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마침 안도에서 온 밀정에게 이같은 소식을 듣고 섬으로 달려가 분풀이가 시작됩니다.

여안초등학교에 집결한 김종원은 집집마다 학생이나 청년들이 한명씩 나오지 않으면 ’다 죽여버린다‘라고 하니까 집안에서 한명씩 학교에 모입니다. 그때 초등학교 교사 1명은 빨갱이라고 죽였고, 청년들 11~12명이 두멍안 조개무지에서 총살당하는 끔찍한 학살이 자행됩니다.

지금도 안도 입구에는 여순사건 희생자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후 마을에 작은 사건이 일어나도 주민들이 굉장히 겁을 먹게 되었고 이는 빨갱이 컴플렉스로 이어졌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 이야포 미군폭격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마을에는 '피난선 선장이 빨갱이'라는 소문이 돌게 되고 피난민을 도와준 청년들은 ”마을에 들어오면 당신들도 죽고 우리도 죽으니까 산으로 숨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서고지 사람 그리고 주민들과 몰래 물건과 음식을 교환해 목숨을 연명했고 8월 9일까지 산에서 숨어살다가 피난민들은 소리도로 이동합니다.

피난선 선장이 빨갱이였다는 후유증은 오래 갔습니다. 1960년대~80년대까지 군부독재 시절에는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했고 살아남은 생존자 유족들은 안도에 찾아와 절도하고 몰래 제사도 지내다 고초를 당합니다. 심지어 결혼 후 부모님 산소에 들러 결혼반지를 묻었더니 섬주민의 신고로 간첩으로 오인 받아 지서로 끌려가서 조사받는 웃픈 사건도 벌어집니다.

1980년~90년대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유족인 이춘혁씨와 이춘송씨 형제가 마을사람들을 만나며 이야포 주민 증언이 시작됩니다. 이후 두 형제는 1998년 여수지역사회연구소를 찾아가 자신의 일을 털어 놓았지만 당시 여수지역사회연구소가 지역에서 공론화를 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2010년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 이야포• 두룩여사건은 '진실규명'이 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유족들은 지역사회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소송에 돌입했지만 소멸시효를 넘겨 배상을 받지 못해 이춘혁 어르신에게는 굉장히 큰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위령사업 추진위원회 심명남 위원장 ⓒ여수MBC 캡처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위령사업 추진위원회 심명남 위원장 ⓒ여수MBC 캡처

- 두 분은 생존자, 목격자, 유족들의 생생한 증언을 계속 청취해 오셨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던가요?

“제가 이춘혁 어르신을 만난 것은 2017년입니다. 추모제를 이어오면서 매년 만나고 있는데요, 어르신은 88세의 나이답지 않게 아직도 건강하십니다.

1기 진화위 조사결과와 어르신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국군이 낙동강까지 후퇴하자 부대를 수용할 장소로 운동장이 필요했습니다. 부산시는 운동장에 수용된 피난민들을 충무(현 통영)로 소개시켰습니다. 충무도 안전하지 않아 피난민들은 4대의 피난선이 출발했는데 이중 한대가 거문도로 향했습니다. 욕지도를 거쳐 이야포 해상에 정박된 이 피난선에 폭격기가 저공비행을 하며 무차별 폭격을 가한 학살이 시작됩니다.

어르신이 탄 피난선은 2일 이야포에 도착해 하룻밤을 평안히 보냈고, 다음날 아침을 먹고 난 오전 9시쯤 어디선가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어르신이 재빨리 배 앞쪽을 보니 쌕쌕이 비행기 편대(4대)가 나타나 총 두 발을 발사한 후 연속 배를 돌면서 폭격을 가해 한순간에 배 안은 피로 물들고 아수라장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어르신이 배 뒤에 숨어 주위를 둘러보니 오른쪽 왼쪽 할 것 없이 한쪽에서 7∼8명씩 배 안팎에서 쓰러져 주위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신음과 아우성은 하늘을 찔렀다고 합니다.

선장실 위에도 많은 사람이 쓰러지고 17∼18세 되는 청년 한 사람은 양쪽 엉덩이 살이 다 떨어져 무의식적으로 계단을 잡고 내려오고, 물통 뒤에 숨어 있던 이춘혁 어르신의 동생 이춘송 씨는 총맞은 사람들의 피가 흘렀는데 피가 뜨거워 누가 오줌 누는 줄로 착각했답니다. 이춘혁 씨는 자신에게 약을 준 고마운 부인이 팔과 볼에 총을 맞고 배 난간에 기대어 수건으로 피를 봉하고 있었으며 배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 엄마가 죽은 줄도 모르고 애처롭게 젖을 물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며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고 증언했습니다.

이춘혁 어르신 가족은 7명이 피난선을 탔는데 아버지와 여동생은 배 위에서 총에 맞아 돌아가셨고, 엄마는 막내아들을 등에 업고 종선으로 건너오다가 사람이 너무 많이 타 배가 뒤집어져 익사해 돌아가셨습니다. 7명 중 4명이 죽고 이춘혁 씨와 남동생 이춘송 씨, 누나 이경애 씨만 살아남았습니다. 이후 시집 간 누나 이애경 씨는 눈앞에서 총맞은 아버지를 목격해 전쟁 트라우마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동생 이춘송 씨도 2014년에 세상을 떠나 이제 어르신 혼자 남았습니다.

당시 폭격장면 증언에 나서주신 마을주민 이사연 어르신 뿐 아니라 장선자 할머니와 마을 주민들은 이 모습을 다 봤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 미국으로 이민 간 생존자 윤학제씨도 계시는데요. 윤 씨네 가족은 3명이 살아남았고 이분은 미국에 가서 식품회사 사업을 하다가 성공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미국에 항의하기 위해 20년 전 어르신과 6.25 당시 노근리, 거창, 창령 등지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 유가족 80여명과 함께 미국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하고 항의서한도 보내며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 답이 없다고 털어놨습니다.“

- 침몰한 피난선을 확인했는데 인양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추모제의 가장 큰 성과는 피난선으로 추정되는 잔해물 발견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추모제를 시작한 첫해부터 해양환경인명구조단 여수구조대 박근호 대장님을 비롯해 대원들이 수중탐사를 진행했습니다. 저 역시 수년간 다이빙을 해온 터라 여러 번 수중탐사에 참여했고 직접 현장을 확인했습니다.

수심 9~11미터 지점에 침몰선 잔해물로 보이는 보조엔진과 선체일부가 발견되었습니다만 2년째 방치되고 있습니다.

처음 수중탐사에 나설때만 해도 보여주기 활동만 한다고 여기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었습니다. 대원들은 2년째 탐사에서 허탕을 쳤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이후 남파선으로 보이는 침몰선이 있다는 해녀들의 목격담을 듣고 첫 수색 장소의 정반대쪽 포구에서 잔해물을 찾아 전국적인 방송을 탔습니다.

수중선체 일부는 99% 피난선 잔해물로 판단됩니다.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 수중에 있는 보조엔진과 목재 일부가 그 시절 것으로 추정되고 이야포어촌에서 80여년 이상을 살아온 주민들이 그곳에서 한번도 어선이 침몰된 적이 없었다고 증언한 것으로 미루어 이야포 침몰선이 확실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문기관이 조사하면 엔진이나 선체에 박힌 총알이 발견될 것으로 예상하고 잇습니다.

오늘 처음 드리는 말씀인데요 지난 8월 3일 행정선을 타고 추모제 현장을 가는 길에 선상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날 진실화해위원회 정근식 위원장님을 비롯 진화위 관계자와 엄길수 전 추진위원장님, 정기명 시장님과 김회재 국회의원님, 김영규 의장님, 이광일 도의원님과 박성미, 김철민 의원님이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정근식 위원장님과 정기명 시장님이 침몰선 잔해물 인양과 유해발굴을 하겠다고 약속하셨기에 조만간 피난선 인양은 속도가 붙을 거라 생각됩니다. 피난선 잔해물을 인양해 이야포 평화공원에 전시되길 희망합니다. 추진위는 그날의 진실이 인양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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