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반공주의'의 '여순항쟁 길' 찾아온 서울 답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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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반공주의'의 '여순항쟁 길' 찾아온 서울 답사팀
  • 전시은
  • 승인 2020.10.28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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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정보경제서비스노동조합연맹, 2박3일간 여수와 순천 답사
통일 역사기행 주제로 전국을 답사하며 이번엔 '여순항쟁' 길 선택
주철희 박사의 '역사공간 벗'에서 주관해 답사와 토론도 이어져
전국정보경제서비스노동조합연맹이 여수순천 일대를 사흘간 답사한다

민노총 산하기관인 전국정보경제서비스노동조합연맹이 28일부터 사흘간 여순항쟁유적지 답사에 나섰다.

이들은 네 번째 역사통일기행 주제를 여순항쟁으로 정하고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았다. 제주 4.3항쟁과 맞닿아 있는 여순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노동자가 앞장서서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기획했다고 소개했다.

답사를 앞두고 주철희 박사의 저서인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를 읽어오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총 사흘에 걸친 여순항쟁답사는 14연대주둔지에서 시작해 순천북초등학교를 거쳐 다시 여수로 돌아와 향일암에서 마무리된다. 첫날인 28일 일정은 14연대 주둔지에서 시작됐다. 이들의 이번 답사 일정 추진과 안내는 '역사공간 벗'(대표 주철희 박사)에서 맡았다.  

주철희 박사는 답사 내내 “역사를 해석할 때 당시의 지리적 공간에 대한 이해가 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그만큼 여순항쟁에 대해 알려진 말들이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주 박사는 “14연대는 반란을 일으키려는 게 아니라 단지 지리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러 여수역으로 가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여수시내 한가운데로 진입한 것이지 절대 시내 장악이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신월동 14연대 주둔지

답사가 시작된 신월동 14연대 주둔지는 1948년 10월 19일 저녁 봉기가 시작된 곳이다.

그렇다면 14연대는 어떤 부대일까.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하며 유엔은 미군에 철수명령을 내리고 그 공백을 메우려 만들어진 부대가 제10연대부터 제15연대다. 이중 광주에 주둔한 제4연대 간부와 병사들 중 1개 대대가 내려와 신월리에 창설한 것이 14연대다.

이들 14연대 군인들은 제주4.3항쟁 진압을 명령받지만 제주도 출동을 군인의 사명에 맞지 않는 명령이라며 거부한다. 군인들의 궐기로 시작된 여순항쟁은 쌀을 배급받지 못해 굶주리던 시민들이 합세하며 대중적 저항으로 번졌다.

당시 미군정은 쌀을 공평하게 배급해주겠다며 모두 거둬갔지만 제대로 배급하지 않아 시민들이 굶주리던 상황이었다. 결국 시민들의 불만은 14연대 봉기와 함께 폭발하고 만다.

14연대 군인 중에는 여수가 고향인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군인 신분이었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시민들 편에서 싸우기로 한다. 이것이 여순사건이 군인들의 반란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유다. 14연대는 당시 발행되던 신문 ‘여수인민보’에 항쟁을 일으키게 된 이유를 게재하기도 했다.

연등동에 위치한 잉구부 전투지

답사팀은 잉구부전투가 벌어진 연등동도 방문했다. ‘왼쪽으로 구부러진 도로’를 뜻하는 잉구부에서 벌어진 전투는 시민들이 가장 큰 승리를 전투다. 주 박사는 이곳을 두고 ‘당시 유일하게 북상할 수 있었던 도로’라고 설명했다.

10월 23일 순천을 가볍게 점령한 토벌사령부는 여수까지 밀고 내려오지만 여수점령에 실패했다. 서쪽 벌교, 동쪽 광양, 북쪽 구례 등 사통팔달로 다 트인 순천과 달리 여수는 북상할 수 있는 길이 이곳 잉구부전투가 벌어진 길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여수의 지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 토벌사령부는 24일 매복한 시민들에게 패배한다.

그러나 잉구부전투의 승리는 곧이어 비극으로 바뀐다. 잉구부전투에서 AP통신의 기자가 사망하자 미군이 26일 한국의 11개 연대 중 7개 연대와 해군함정, 비행정찰대까지 여수를 폭격해 도시는 쑥대밭으로 변했다.

비록 비극으로 끝났지만 잉구부전투는 한국의 육군전사에 기록될 정도로 유명하다. 한국에 육군이 생긴 후 일어난 최초의 패퇴전투이기 때문이다.

인민대회가 열린 중앙동로터리

다음으로 인민대회가 열린 중앙동 로터리로 향했다. 1948년 10월 20일 중앙동로터리광장에는 5천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인민대회가 열렸다. 인민대회에서 이용기를 위원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가 재조직되고 유목윤, 박채영, 문성휘, 김귀영 총 5명이 의장으로 선출되며 6개항 결의문을 채택한다.

결의문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현재 어떤 이들은 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해석하여 여순항쟁을 북한의 지령을 받은 사람들이 주도한 것이라고 믿고 있기도 한다. 또한 의장 중 남로당 출신도 포함되지만 이 역시 다양한 소속의 사람을 위원으로 뽑기 위함일 뿐이었다.

통일정부를 지향한 이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해석은 옳지 않음에도 한번 왜곡된 정보는 바로잡혀지지 않고 아직도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이것이 여순항쟁에 대한 온갖 해석이 난무하고 진실이 가려지고 있는 이유다.

주철희 박사는 여순항쟁의 궁극적 의미는 민족해방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14연대의 경례구호가 '통일'이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14연대 군인의 봉기로 시작된 여순항쟁은 억압된 민중들이 합세하며 이어질 수 있었다.

인민대회가 열린 오포대

이들은 오포대에서 답사를 마무리했다. 오포대는 여수 전체를 둘러보기 좋은 곳이라 일본은 이곳에 조망등을 만들어 도시를 감시했다. 감옥에 설치된 서치라이트와 같은 기능을 한 것이다. 오포대 옆에는 현재 기상청이 자리해있는데 이곳엔 100년 전부터 기상청과 같은 기능을 한 건물이 자리했다. 바다를 마주해 섬을 관리하기 쉽기 때문이다.

답사에 참여한 정보경제연맹 이상우 정책국장은 여수가 고향이다. 그는 “매년 우리 단체는 제주 4.3항쟁지를 방문하는데 이번엔 이와 관계있는 여순항쟁 유적지를 방문하기로 결정하였다”며 “답사 1일차인데도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남은 이틀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나주에 위치한 한국인터넷진흥원 노조 김인섭 사무국장은 여수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지만 이날 답사지 대부분을 처음 가봤다고 답했다.

김 사무국장 역시 4.3항쟁지를 다니면서 여순항쟁을 알게 됐다. 양기석 한국앱손노조 수석부위원장은 “단순히 군인 반란이라고만 알았던 여순항쟁에 시민들이 함께하였다는 사실을 새로 알았다. 14연대는 단순히 명령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부패한 정권 아래서 힘겨워하는 민중을 위해 봉기했다고 생각하니 매우 의미있는 항쟁이라고 여겨진다”고 말했다.

이들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여순항쟁을 주제로 한 강의를 듣고 답사 첫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29일에는 여수 서초등학교와 종포, 오동도 만성리, 형제묘를 답사하고 순천 여순항쟁기념탑과 장대다리, 순천북초등학교 방문 후 마지막 30일 향일암을 들르고 나서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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