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④
상태바
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④
  • 편집국
  • 승인 2020.10.24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 함성으로 가득한 여수 시내

봉기군 북상 후 진공상태 10월 20일, ‘여수군 인민대회’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은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달라
봉기군 출신 지창수는 인민대회에서 연설하지 않아
지창수 무대로 등장시켜 민간 좌익 연결에 꿰맞춰
민간에게 책임 전가시켜 ‘반란’,‘빨갱이’ 굴레 씌워
‘여수군 인민대회’ 안내판의 현 위치는 잘못, 옮겨야

 

현재 여수 중앙동 로터리에 세워진 인민대회 안내판.    ⓒ박성태  2020
현재 여수 중앙동 로터리에 세워진 인민대회 안내판.  정확한 지점이 아닌 곳에 안내판이 세워졌다. 이곳 안내판 지점은 당시 바다였다. ⓒ박성태 2020

 

여순항쟁 72주년 특집 "1948,그때 그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는 10편에 걸쳐 연재됩니다. 
(1) 봉기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진 14연대
(2) 봉기군, 여수역으로 향하다
(3) 북상길에 오른 봉기군
(4) 함성으로 가득한 여수 시내
(5) 바다로 들어오는 토벌부대
(6) 굽이친 길에서 만난 전투
(7) 포격으로 불타는 여수시내
(8) 남녀노소 학교로 모여들다
(9) 손가락총에 피로 물든 여수
(10) 만성리 형제묘의 진실

여순항쟁은 제14연대 군인의 궐기로 시작했다. 민중의 합세와 지지가 이어지면서 대중적 실천 저항으로 발전했다. 여기에는 1948년 10월 20일 오후 3시에 있었던 여수군 인민대회가 큰 역할을 했다. 대부분 언론이나 당시 기록에서 ‘인민대회’라고 기록했지만, 일부에서는 ‘시민대회’, ‘읍민대회’라고도 기록했다.

제14연대 봉기군이 여수시내로 진입하면서 경찰은 대응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물러났다. 여수 주요 기관은 말 그대로 텅텅 비어있는 진공상태가 된다. 미군정의 비합법화로 지하에서 활동하던 여수군 인민위원회는 20일 오전 10시경부터 조직을 정비하고 재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오후 3시 시민 3천~5천 명이 운집한 가운데 여수군 인민대회가 진남관 앞에서 열린다. 즉 현재 여수군 인민대회 안내판이 중앙동 로터리에 세워져 있고, 그곳에서 인민대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많다. 그러나 1948년 당시 그곳은 바다였다. 당시 지리(공간)와 도로를 이해하지 못한 상황의 안내판이다.

당시 '여수군 인민대회'가 열린 곳은 이 지점 진남관 앞이었다.  ⓒ박성태 2020
당시 '여수군 인민대회'가 열린 곳은 '소산상회'가 있던 지금의 진남관 앞 여수시 동문로10(진남마취통증의학과의원)이다. ⓒ박성태 2020

당시 진남관 앞은 시내(현 중앙동과 교동의 진남상가)와 연결되며, 서정을 잇는 도로이다. 또한, 여수에서 순천으로 북상하는 차량이 다니는 길(충무동, 연등동, 미평)과 연결되는 지점이며, 반대편으로 여수경찰서, 읍사무소, 여수역과도 연결되는 여수의 중심지이다. 그래서 여수군 인민위원회는 소산상회(현, 진남마취통증의학과의원)에 무대를 설치하고 인민대회를 개최한다.

 

여수군 인민위원회, 인민대회 개최하다

인민대회는 이용기, 유목윤, 박채영, 문성휘, 김귀영 등 5명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보안서장에 유목윤을 임명했다. 대회에서는 이용기의 인사말 등과 축사에 이어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일부에서는 ‘6개항 결의문’을 ‘혁명과업 6개항’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혁명’이란 말을 강조한 것은 ‘반란’이라는 인식을 주입하여 여순항쟁을 왜곡하기 위한 표현이다.

인민대회와 관련한 1948년 10월 31일 경향신문 기사
인민대회와 관련한 1948년 10월 31일 경향신문 기사

여수군 인민대회와 관련해 당시 경향신문 1948년 10월 31일자에는 “여수 점령일인 20일 개최된 인민대회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고 있는데 동 대회의 장관은 이용기(李容起) 외 5명이었다 한다. 대회 결의문은 인민위원회의 행정기관 접수 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 맹서 등의 여섯 가지 항목이었다”고 보도됐다. 인용문은 경향신문이 여수군 인민위원회가 10월 24일 발행한 <여수 인민보>를 입수해, 그 신문에 내용을 분석해 10월 31일자에 일부분 인용했다.

경향신문에는 “인민위원회의 행정기관 접수, 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 맹서”만 보도했지만, 인민위원회의 결의안은 6개 항이었다. 아래 「결의안 6개항」은 당시 미국의 한국 주재 최고대표(현 미국 대사)이었던 무쵸(John Joseph Muccio)가 발굴하여, 「여수반란의 개요와 관찰(Review of and observation on the Yosu Rebellion)」에 실었다. 그 외의 여러 자료에도 「결의안 6개항」의 일부가 기록됐다.

1. 오늘부터 인민위원회가 모든 행정기구를 접수한다.
2. 우리는 유일하며 통일된 민족 정부인 조선인민공화국을 보위하고 충성을 맹세한다.
3. 우리는 조국을 미 제국주의에 팔고 있는 이승만 정부를 분쇄할 것을 맹세한다.
4. 무상몰수・무상분배의 민주주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5.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모든 비민주적인 법령을 무효로 한다.
6. 모든 친일 민족 반역자와 악질 경찰관 등을 철저히 처단한다.

인민위원회는 「결의안 6개항」을 실천할 6개항 정책을 발표한다. 첫째, 친일파와 모리상간배 등의 악질적인 간부를 엄정하게 조사한다. 둘째, 인민의 고혈을 빨아 모은 은행 예금 동결하고 재산을 몰수한다. 셋째, 적산가옥과 관권을 이용하여 억지로 빼앗은 집들은 연고자에게 돌려준다. 넷째, 매판자본가들이 세운 사업장의 운영권을 종업원에게 돌려준다. 다섯째, 식량영단의 문을 열어 굶주리는 인민 대중에게 쌀을 배급해 준다. 여섯째, 금융기관의 문을 열어 대중에게 돈을 빌려준다.

당시 식량영단창고 자리였던 진남로길43 일대. 한때는 시민극장이기도 했다. ⓒ박성태 2020
당시 식량영단창고 자리였던 진남로길43 일대. 한때는 시민극장이기도 했다. ⓒ박성태 2020

인민위원회 6개항의 정책은 해방 이후 인민이 그토록 염원했던 문제이다. 10월 21일 인민위원회는 여수 식량영단 창고의 문을 여는 것을 시작으로 정책을 실천했다. 당시는 배급제(미곡수집령으로 쌀과 보리를 공출함)였다. 그러나 7월 말부터 8월까지 식량이 배급되지 않아 시민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정부 관료들은 쌀이 없어 배급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창고에는 쌀이 가득했고, 밑에는 썩고 있었다. 천일고무공장을 노동자에게 돌려주고, 신발을 시민에게 나누어줬으며, 은행 문을 열어 서민들에게 대출을 해줬다. 인민위원회가 제시한 정책이 실현되는 것을 본 시민들은 그들을 신뢰하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천일고무공장 자리에 들어선 서교동 공립주차장.  가로수가 있는 곳 까지 전체가 공장이었다. ⓒ박성태 2020
당시 천일고무공장 자리에 들어선 서교동 공영주차장. 가로수가 있는 곳 까지 전체가 공장이었다. ⓒ박성태 2020

앞서 살펴본, 「결의안 6개항」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2항이다. 2항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이 등장한다. 많은 자료에 조선인민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기록한다. 여순군 인민위원회는 분단되기 전 통일된 민족 정부인 여운형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조선인민공화국에 의해 조직된 인민위원회이다. 그런데 여기에 민주주의란 단어를 중간에 삽입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기록함으로써 여순항쟁이 북쪽과 연결되어 있고, 그들을 지지하는 것처럼 왜곡하고 조작한다.

지창수 상사, 인민대회 연설은 사실인가?

이날 인민대회의 또 하나 논란은 '제14연대 특무상사였던 지창수가 인민해방군 연대장으로 연설을 했다'는 주장이다. 지창수 상사가 제14연대 연병장에서 연설했다는 주장과 함께 대표적인 왜곡이다. 지창수가 여수 인민대회에서 연설했다는 주장은 향토사학자 김계유에서 비롯됐다. 김계유는 “그의 연설은 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낮지도 않고 그야말로 도도한 냇물이 흘러가는 것 같은 현하지변”이었다고 격찬하면서 연설 내용을 수록했다.

당시 인민대회와 관련하여 글을 남긴 무쵸를 비롯하여 박찬식・고영환・김형도 글에는 지창수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언론에서도 지창수는 언급되지 않는다. ‘인민해방군 연대장’이란 김계유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여순항쟁 발발 당시 정부와 국군은 지창수를 체포 또는 사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와 국군의 관심은 ‘김지회’였다. 김지회와 그의 처 조경순에게는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1967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한국전쟁사1:해방과 건군>이 발행되기 전까지 지창수는 한 차례 언급은 있었지만, 김지회나 홍순석만큼 관심을 받지 못했다. 김계유는 <한국전쟁사1:해방과 건군>의 내용을 마치 자신이 본 것처럼 기록하고 증언했다.

당시 인민대회의 모습을 그린 박금만의 작품  ⓒ박금만
당시 인민대회의 모습을 그린 박금만 작가의 작품  ⓒ 박금만

이날 인민대회에서 연설한 사람은 다섯 명이다. 인민위원장 이용기의 개회 인사말, 남조선노동당 여수군위원회 대표 문성휘의 격려사, 전국노동조선평의회 전라남도 여수지구 평의회 홍기환, 민주학생연맹 대표 김인옥, 여성동맹 정기순 등이다. 여성동맹 정기순은 당시 여맹위원장이었던 이춘옥의 글을 대독했다. 당시 여맹을 대표해서 연설했던 정기순도 지창수의 연설을 부인한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지창수가 여수군 인민대회에서 연설했다는 주장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순항쟁이 남로당의 지령에 따른 ‘반란’이란 프레임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 지창수여서다.

‘반란’이 남로당 지령이라는 것은 지방 좌익과 연계되었다는 것이다. 장교 대다수는 이 지역 출신이 아니었기에 지방 좌익과 밀통하고 계획했다는 프레임이 작용할 수가 없었다.

반면, 지창수는 제14연대 인사계 특무상사라는 하사관 중 가장 선임 계급이면서, 이 지역(전남 광산군) 출신이다. 정부가 설정한 의도에 가장 부합했다. 이를 적절하게 정부와 국방부(국군)가 악용했음에도, 지역사회에는 여전히 이를 사실로 인식한다.

여순항쟁의 주요한 왜곡 중 또 하나가 인공기 문제다. (인공기와 관련된 내용은 별도로 7편 '포격으로 불타는 여수시내' 참조 바람) 

주철희 (역사학자)

* 본기사의 내용과 사진은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인용할 수 없습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