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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⑤

(5)바다로 들어오는 토벌부대

10월20일 정부, 긴급대책회의 열어 '토벌사령부' 광주에 설치
정일권,백선엽 등 참여..박정희도 작전참모 보좌 역할로 참여
3.8선 경비 제외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 토벌작전에 투입
해군,부산5연대 여수 상륙 작전 감행... 시민군 총력전 저지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 여수여중학교 주둔, 살육 본격
소련군이 노획해 공개한 당시 영상에는 공격, 피난,불타는 장면 등 담겨

  • 입력 2020.10.28 10:15
  • 수정 2020.10.28 22:14
  • 기자명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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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인물이 송호성 사령관, 그 왼쪽 박정희, 오른쪽은 풀러 대령. 칼 마이던스의 사진 자료 주철희 제공

여순항쟁 발발. 일명 ‘반란’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입수한 정부와 국방부는 10월 20일 미 임시군사고문단 단장 로버츠 준장의 요청으로 이범석 국방장관 등이 참석한 긴급대책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10월 21일 광주에 반군토벌전투사령부(이하 토벌사령부)를 설치한다. 토벌사령부의 사령관은 송호성이다. 대다수 기록에 송호성의 계급을 준장으로 표기한다.

당시 국군의 지휘부는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장교가 장악하고 있었다. 송호성은 보기 드물게 광복군 출신이다. 광복군 시절 ‘장군’이란 호칭을 국군에서도 그대로 불렀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계급을 준장으로 표기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에는 별을 단 사람이 없었다. 즉 준장 이상 계급이 없었다. 1948년 12월 10일 최초의 준장이 탄생한다. 김홍일, 채병덕, 이응준, 송호성, 등 육군 4명과 해군의 손원일 등 대령 5명이 준장으로 진급했다.

여순항쟁 72주년 특집 "1948,그때 그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는 10편에 걸쳐 연재됩니다. 
(1) 봉기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진 14연대
(2) 봉기군, 여수역으로 향하다
(3) 북상길에 오른 봉기군
(4) 함성으로 가득한 여수 시내
(5) 바다로 들어오는 토벌부대
(6) 굽이친 길에서 만난 전투
(7) 포격으로 불타는 여수시내
(8) 남녀노소 학교로 모여들다
(9) 손가락총에 피로 물든 여수
(10) 만성리 형제묘의 진실

38선 경비병력 제외, 가용 모든 병력 토벌작전 투입

토벌사령부(사령관 송호성 대령) 휘하에 제2여단(사령관 원용덕 대령)과 제5여단(사령관 김백일 중령)을 배속시켜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나선다. 비행대(L형 연락기 10대) 김정렬 대위와 수색대(장갑차) 강필원 대위도 배속된다. 제5여단 김백일 중령은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당시 비리 연루 혐의로 보직이 없었으나, 여순항쟁이 발발하면서 제5여단장에 부임한다.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한 경험이 작용했다.

비행정찰대(1948년 10월 27일 촬영된 영상에서 갈무리) 자료 주철희 제공

제2여단에는 대전 제2연대(이명재 소령) 2개 대대, 대구 제6연대(연대장 김종갑 중령) 1개 대대, 군산 제12연대(연대장 백인기 중령, 부연대장 백인엽 소령) 3개 대대, 마산 제15연대(최남근 중령) 1개 대대 등이 배속된다. 제5여단에는 전주 제3연대(연대장 함준호, 부연대장 송석하 소령) 2개 대대, 광주 제4연대(연대장 이성가 중령) 3개 대대가 배속되어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또한, 토벌사령부에서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정일권 대령,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 정보과장 김점곤 소령 등이 참모로서 사령관을 보좌하면서 토벌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박정희는 작전참모를 보좌하는 역할로 작전에 참여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전투사령부에 배속되지 않은 별도의 부대가 있었다. 여수의 어르신들이 기억하는 김종원 부대이다. 봉기군과 시민의 대응이 정부가 예측한 것보다 강력해지자 10월 22일에 부산 제5연대를 추가 배치한다. 이는 38선 경계부대인 서울 주둔 제1연대, 춘천 제8연대, 강릉 제10연대와 제주도 진압작전 중인 제9연대와 제11연대 그리고 봉기를 한 제14연대를 제외하면 총 10개 연대 중 대전 이남의 거의 모든 가용 병력을 토벌작전에 투입했음을 의미한다. 제5연대 1개 대대는 김종원 대위의 지휘아래 해군 함정을 타고 작전에 나선다.

상륙작전에 나선 해군 함정(1948년 10월 27일 촬영된 영상에서 갈무리) 자료 주철희 제공

당시 대한민국 국군 작전통제권은 미국에 있었다. 따라서 토벌사령부에는 작전ㆍ정보ㆍ군수업무를 지원하는 미군 군사고문이 배치되면서, 토벌작전은 완전히 미군의 통제로 이루어졌다. 당시 미국 임시군사고문단의 주요한 임무는 장비를 비롯한 병참물자 지원이었다. 토벌작전에 관여한 미군 주요 고문은 할리 풀러(Harley E. Fuller) 대령, G-3의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 G-2의 존 리드(John P. Reed) 대위, 트리드웰(J. H. W. Treadwell) 대위, 프례(Robert F. Frey) 대위 등이다.

 

해군,부산5연대 여수 상륙 작전 감행... 시민군 총력전 저지

이와 함께 정부에서는 10월 22일 여수․순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를 위반할 시에는 군법에 의해 사형 및 기타에 처한다고 밝혔다. 이 계엄령은 제5여단 김백일 중령의 명의로 되어 있다 보니 김백일이 독자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계엄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25일 정부는 계엄령을 차후 승인한다.

계엄령 선포문 자료 주철희 제공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이범석은 10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라는 포고문에서 제14연대 ‘반란’은 국법상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며, 총살당하지 않으려면 즉시 투항하라고 명했다. 10월 23일 이승만 대통령도 일반 국민에게 경고문을 발표했다.

토벌사령부가 먼저 공격에 나선 곳은 순천이다. 10월 22일 순천의 주요 거점 장악하고, 23일 순천을 완전점령한다. 이 시간 해군과 부산 제5연대는 여수 상륙작전에 나선다. 당시 부산신문 정영모 기자는 “23일의 제1차 상륙기도 시는 반항도 맹렬했을 뿐 아니라 해안지대에 모자를 씌운 「허수아비」를 내세워 관군의 공격 목표를 교란할 전술을 썼다”(1948년 10월 30일)고 보도했다. 이 전투는 해군 이상규 소령이 지휘하는 충무공호 외 6척의 해군부대와 제5연대에서 선발된 중화기 부대가 주동이며 김종원 대위가 지휘했다.

해군과 제5연대가 제1차 상륙작전을 시도했던 종포 앞바다 ⓒ박성태 2020

해군과 제5연대가 상륙작전을 시도했지만, 시민군의 맹렬한 대응에 실패한다. 1차 상륙작전에서 국군은 부산 제5연대 소속 중위 박태서(군번 10661, 일명 박타조)와 사병 2명이 전사하고, 사병 2명이 부상 당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호국전몰용사 공훈록>에는 당시 전사한 박태서는 일계급 특진으로 수록되어 있으나, 사병 2명은 없다. 1차 상륙작전에 실패한 해군과 제5연대는 25일 다시 상륙작전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박금만 작가가 그린 해군과 5연대의 제1차 상륙작전의 전투장면 ⓒ박금만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 여수여중학교 주둔, 살육 본격

10월 26일 토벌사령부가 여수 총공격에 나서고, 오후 늦은 시간에 구봉산․장군산․종고산 등 주요 거점을 장악하고 서국민학교에 본부를 설치한다. 그리고 27일 여수 시내 주요 지점에 공격에 나선다. 해군과 제5연대도 합세하여 27일 새벽에 공격에 나선다.

당시 해군과 제5연대 공격을 인용하면 “여수방면에 집결된 해상국군은 10월 27일 새벽부터 여수에서 4키로 떨어진 돌산부근 지점에서 행동을 개시하고 이상규 소령이 지휘하는 충무공 외 6척의 해군부대와 공동작전을 하는 한편 육상 관군과 밀접한 연락하에 상오 8시 45분을 기하여 전 여수의 반란군에 대한 총공격에 들어갔다. 이 관군부대는 제3여단 제5연대에서 선발된 기관총수로서 조직된 중화기부대가 주동이며 김종원 대위가 지휘하의 관군부대는 방금 LST 2호함에서 함포사격 중에 있다.”

이날 김종원 대위는 함상에서 조준기 없는 81밀리 추격포 2문을 갑판 위에서 설치하고 포격을 했다. 이 포격으로 토벌부대 제12연대 5중대 중대장(안정수 중위, 군번 12452)과 이공윤 이등중사(군번 0402860)가 전사했다. 제12연대 병사들은 상륙 대원들에게 죽일 놈들이라고 아우성을 쳤다. 제5연대는 10월 27일 상륙에 성공 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여수여중학교에 주둔한다. 제5연대는 여수여중학교(현 여수여자고등학교)에 주둔하면서 종산국민학교에 설치된 군기사령부의 협력자 색출에 관여하며 김종원은 악랄한 악행을 자행한다.

해군 함정에서 여수시내로 함포를 쏘는 장면, 멀리 또 다른 함정이 보인다.(1948년 10월 27일 촬영된 영상에서 갈무리) 자료 주철희 제공

해군과 제5연대가 10월 27일 상륙작전 공격은 영상으로 촬영됐다. 여수신항에서 여수구항으로 이동하면서 공격한 영상이다. 촬영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6․25전쟁 중 소련군이 노획하여 공개됐다. 이 영상에는 여수시민들이 피난하는 장면, 시내가 불타는 장면, 해군 함정 공격 장면, 토벌군의 시내 수색 장면, 체포된 시민의 모습 등이 담겼다.

주철희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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