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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②

(2)봉기군, 여수역으로 향하다

14연대 봉기군 부대장악 후 20일 새벽 여수역으로
시내 관통 여수역으로, 한재 넘어 미평역으로 각각 이동
역으로 가려면 지서와 경찰서는 필연적으로 지날 수 밖에
경찰과 봉기군과의 교전, 경찰관 모두 사살 기록 일부는 사실과 달라
시민들은 군.경 교전 전혀 몰라, 두 차례 군 훈련도 실시한 탓
봉기군 목적은 ‘북상?'.. 당시 빠른 교통수단은 철도가 유일

  • 입력 2020.10.21 15:00
  • 수정 2020.11.20 05:26
  • 기자명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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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 72주년 특집  "1948,그때 그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연재 순서
(1) 봉기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진 14연대 
(2) 봉기군, 여수역으로 향하다
(3) 북상길에 오른 봉기군
(4) 함성으로 가득한 여수 시내
(5) 바다로 들어오는 토벌부대
(6) 굽이친 길에서 만난 전투
(7) 포격으로 불타는 여수시내
(8) 남녀노소 학교로 모여들다
(9) 손가락총에 피로 물든 여수
(10) 만성리 형제묘의 진실

14연대 정문에서 시내로 가는 길. 이들 주력부대가 가는 방향은 '여수역'이다. ⓒ 박성태 2020

10월 19일 밤 9시경 봉기를 시작한 제14연대 병사위원회는 20일 새벽 1시경 부대를 장악하고, 여수역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왜 출병 명령을 거부하고 궐기를 했는지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성명을 통해 밝힌다.  제1편 '봉기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진 14연대'에서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의 성명서를 소개했다.[관련기사 바로가기>>>>  '봉기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진 14연대']

봉기군 주도세력은 지리산으로 입산을 결정한다. 당시 남단 여수에서 북상하기 위한 유일한 교통수단은 철도였다. 봉기군은 북상하기 위해 여수역으로 곧장 이동을 시작했고, 그 경로는 세 갈래였다.

구봉산을 넘어 가는 길. 일부 14연대 병력은 구봉산에서 봉강동 거쳐 시내로 진입했다. ⓒ 박성태 2020

첫째, 봉기군 주력부대는 신월리에서 여수역으로 연결된 도로를 이용했다. 경로는 신월리에서 출발하여 국동, 봉산동, 서교동, 교동, 중앙동, 관문동, 공화동, 여수역에 도착한다.
둘째, 일부 병사는 신월리에서 구봉산을 넘어 사철고개(봉강동)를 거쳐 시내를 진입해 여수역까지 걸어서 이동했다.
나머지 일부 병력은 여수 시내로 진입하지 않고, 동이 틀 무렵 신월리에서 한재(대치마을)를 넘어 여서동, 미평을 거쳐 미평역으로 이동하여 북상했다.

구봉산과 한재를 통해 이동했다는 것은 당시 모병제인 탓에  이 지역 출신 병사가 많아 지리(공간)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병력이 이용한 미평으로 가는 길. 이들은 한재 넘어 여서동 지나 미평역으로 향했다. ⓒ 박성태 2020

여수경찰,봉기 소식을 듣고 비상소집

제14연대의 봉기 소식을 처음 접한 곳은 여수경찰서이다. 19일 밤 11시경 여수경찰서 고인수 서장은 제14연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정보를 입수할 때까지만 해도 ‘봉기’인지 ‘경찰과 충돌’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비상소집령을 내렸다.

여수경찰은 제8관구 경찰청(전남경찰청)과 전라남도에 보고했다. 당시 이남규 도지사는 부임 하루 만에 여순항쟁을 맞는다. 이남규 지사는 경찰과 충돌로 인지하고 상황을 예의주시하다가 20일 새벽 1시 30분경 단순한 ‘군과 경찰의 충돌’이 아니라는 것을 감지하고 제5여단에 보고한다.

당시 제5여단장 김상겸 대령은 제주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을 겸임하고 있었기에 제주도에 있었고, 참모장 오덕준 중령은 여수에서 제주도 출병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4연대 연대장 이성가 중령은 서울에 출장 중이었기에 제4연대 부연대장 박기병 소령에게 상황이 전달됐다.

다음날 복귀한 연대장 이성가 중령은 부연대장 박기병에게 군과 경찰의 충돌에 부대원을 보낸 것에 노발대발했다. 이처럼 초기에는 군과 경찰의 충돌로 인식이 강했다. 이는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10월 20일 미 임시군사고문단 단장 로버츠 준장의 요청으로 이범석 국방장관 등이 참석한 긴급대책회의를 개최했고, 반군토벌전투사령부를 10월 21일 설치한다.

봉기군 주력부대가 신월리에서 여수역까지 이동하는 경로에는 봉산지서(국동지서), 서정지서(충무지서), 여수경찰서가 있었다. 정부와 국방부 대다수 기록에는 봉기군이 여수 시내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지서와 경찰서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경찰관을 모두 사살했다고 기록했다.

제14연대가 여수 시내로 향하는 과정에서 처음 마주한 봉산지서에 대한 기록을 보면, <한국전쟁사1 : 해방과 건군>에는 “반군 3,000여명은 지창수 상사 지휘하에 모든 차량을 동원하여 여수 시내로 들어오면서 봉산지서출장소를 습격하여 이곳 경찰관을 사살하였다”고 기록했다.

 

여수경찰, 봉기군과 교전

옛 봉산지서가 있던 곳  ⓒ박성태 2020

제14연대가 여수 시내로 나가면서 처음으로 마주한 “봉산지서의 경찰관을 사살했다”는 것은 사실일까. 위 사진은 당시 봉산지서가 있던 곳이다. 당시 여수경찰서 봉산지서 지서장 서리를 역임했던 신영길은 『신영길이 밝히는 역사현장』이란 책에 당시 봉산지서 상황을 자세하게 밝힌다.

당시 봉산지서 근무자는 6명인데, 군인들의 ‘반란’이란 정보를 입수한 본서에서 파견 온 8명과 함께 14명이 있었다. 이들은 21일 오전 11시경 경도로 피신하여 아무 탈이 없었으며, 지서도 불이 타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신영길 일행이 오전 11시에 피신을 했다는 것은 봉기군이 봉산지서에 총격 등 어떠한 공격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반란군’의 잔인성을 알리기 위해 경찰을 모두 죽였다는 조작된 당시 상황은 지금도 여전히 사실처럼 전해지고 있다.

봉산지서를 지난 봉기군은 서교동 로터리에서 광무동 방향으로 이동하여 한재 사거리에서 충무동 로터리 방향으로 이동한다. 충무동 로터리 가기 전에 마주한 곳이 천일고무공장(현 서교동 공영주차장)이다. 천일고무공장은 일제강점기 비행기를 헌납했으며, 대표적인 우익인사였던 김영준이 운영했다.

당시 서정지서가 있던 곳. 충무지서로 더 알려져 있다. ⓒ박성태 2020

서정지서의 경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서정지서는 여수 시내 중심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다. 2000년까지는 충무파출소가 있었으며, 지금 충무동 로터리이다.

서정지서에 봉기군이 도착한 시간은 새벽 2시경이다. 서정지서에는 본서에서 지원나온 경찰을 포함하여 20여 명과 제14연대 군기대(헌병) 등 70여 명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봉기군의 병력과 화력을 막아낼 수 없었다. 서정지서 교전에서 경찰 1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피신했다. 제14연대 군인의 사상자도 속출했다.  서정지서는 여수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시내와 서정을 잇는 곳이었기에 교통요충지였다.

서정지서를 통과한 봉기군은 교동오거리를 지나, 진남관 앞으로 이동하여 여수경찰서 방향으로 향한다. 당시 여수경찰서의 경찰관 200명 정도였는데 제주4.3 지원으로 70명이 차출되어 남은 인원은 130명 정도였다. 고인수 서장이 비상소집했으나 50명 정도만 소집됐다. 봉기군이 여수경찰서 방어망을 구축한 인근(현, 여수등기소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3시경이다. 경찰은 방어망을 구축하고 교전을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경찰 대부분은 피신하고 최후까지 버틴 경찰은 22명이었으며, 5명이 전사했다.

당시 여수경찰서. 본관과 연무장의 일부가 불에 탄 모습이다. 1933년에 건축했다. 현재 여수경찰서 자리이다. 자료 주철희 제공

당시 여수경찰서는 현재도 여수경찰서 자리이다. 사진에는 본관과 연무장의 일부가 불에 탔다. 당시 고인수 서장을 비롯하여 사찰계 형사 등 10명은 10월 21일 여수군 인민위원회를 주도하에 처형된다. 이는 10월 23일 우익인사의 처형도 마찬가지이다. 즉 경찰과 우익인사를 처형을 봉기군(반란군)이 한 행동으로 말하지만, 실제 그렇지 않다.

10월 20일 새벽에 봉기군과 경찰이 교전이 있었지만, 당시 여수읍 시민은 군인 봉기를 알지 못했다. 이미 두 차례나 제주도 출병을 예행연습하는 시가전이 있었기에 그러한 일환의 훈련으로 인식했다. 이는 당시 남로당 여수군당(위원장 유목윤)도 그래했고, 여수군 인민위원회(위원장 이용기)도 마찬가지였다.

봉기군은 곧장 여수역으로 향한다. 북상 길에 오르기 위해서…….              글  주철희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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