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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⑨

(9) '손가락총'에 피로 물든 학교

김형원에 의해 '반란' 총지휘자로 여수여중 송욱 교장 지목, 이후 여순반란사건 공식화
당시 일부 신문기사는 송욱의 '반란수괴' 지목에 의구심 나타내
서국민학교 집결시민에게 짧은 머리 등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협력자로 지목
공동체를 붕괴시킨 '손가락총'은 인권 말살, '빨갱이' 낙인으로 아직도 남아있어
여순항쟁 유적지 안내판 중 잘못 표기된 부분에 대한 정정작업은 필요해

  • 입력 2020.11.10 21:14
  • 수정 2020.11.14 09:18
  • 기자명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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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소개글

저희 신문사는 ‘여수뉴스타임즈’와 공동으로 여순항쟁 72주년 특집 "1948,그때 그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를 10편에 걸쳐 연재합니다.

(1) 봉기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진 14연대
(2) 봉기군, 여수역으로 향하다
(3) 북상길에 오른 봉기군
(4) 함성으로 가득한 여수 시내
(5) 바다로 들어오는 토벌부대
(6) 굽이친 길에서 만난 전투
(7) 여수시내,초토화 작전 시작되다
(8) 무차별 포격에 폐허가 된 여수
(9) '손가락 총'에 피로 물든 학교 
(10) 만성리 형제묘의 진실

‘국군 반란사건’은 어느덧 ‘전남반란사건’ 또는 ‘여순반란사건’이 된다. 당시 공보처 차장 김형원의 발표는 ‘여순반란사건’으로 인식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번 반란사건의 성격은 여수 14연대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데 민중이 호응한 것 같이 일반은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고 전남 현지에 있는 좌익분자들이 계획적으로 조직적으로 소련의 10월혁명 기념일을 계기로 일대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음모에 일부 군대가 합류한 것이 되는데 그 실증으로는 다음의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김형원은 국군의 ‘반란’을 민간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한 사람을 지목한다. 여수여중학교 교장 송욱이다. 즉 민간인 중에 ‘반란’을 총지휘자가 있어야만, 김형원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기에 송욱을 지목했다. 송욱 교장은 ‘반란’을 총지휘한 반도의 수괴라고 지목되어, 토벌군에 체포된다.

당시 부산신문 정영모 기자는 여수에 상륙하여 취재 중에 정부가 ‘반란’의 수괴로 지목한 송욱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그의 행방을 찾아 나선다. 송욱이 오동도에 체포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정영모 기자는 군의관 복장으로 변복하고 오동도에 들어가 그를 만난다. 송욱이 무고하고 억울하게 체포되었다는 것을 취재로 알았지만, 일반 부역혐의자가 아니라 ‘반란’의 수괴로 지목되었기에 정영모 기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영모 기자는 송욱에게 밥 한 끼 대접하고 무사 안녕을 빌었다.

송욱은 민간인으로서 대전 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됐다. 이후 생사를 알 수 없으나, 대전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된 군인 대다수가 처형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송욱도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송욱 관련해서는 1948년 11월 3일, 5일, 6일 부산신문 기사에 자세하게 실렸다.

송욱 교장의 관련 기사가 실린 1948년 10월 28일 평화일보.  자료 주철희 제공

당시 이승만을 대변하고 대표적인 우익계 신문이었던 평화일보에서도 ‘참으로 의외다’고 제목으로 보도했다. 송욱 교장의 등장은 국군 ‘반란’을 지방 좌익의 ‘반란’으로 둔갑시키면서 ‘전남반란사건’으로 불리다가 ‘여순반란사건’이 된다. 그리고 전라도는 ‘빨갱이’라는 인식이 자리한다. 민간인에게 책임을 전가한 정부의 의도가 잘 통용된 사례이다.

 

학교운동장은 살육의 장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제14연대 군인으로 시작된 항쟁은 토벌군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종말의 길로 접어들었다. 가공할만한 바다의 함포사격, 육지의 81밀리 박격포는 한 도시를 불바다로 만든 이후에야 멈췄다. 그리고 도시는 점령됐다. 도시의 점령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새로운 시작은 학교운동장에서 시작됐다. 학교는 배움의 터가 아니라 살육의 현장이었다.

여수시민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명 부역혐의자로 지목됐다. 서초등학교, 동초등학교, 중앙초등학교, 진남관, 공설운동장(여수역 부근) 등 넓은 장소에는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장갑차의 기관총이 사람들을 주시했다.

칼마이던스가 촬영한 서국민학교에 집결한 시민들을 응시하는 장갑차의 기관총. 자료 주철희 제공

학교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은 손가락질이었다. 일명 ‘손가락총’이다. 1948년 당시 한 학교운동장에서 벌어진 장면을 보도한 신문이 있다. 1948년 10월 29일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상상해 보기 바란다.

“손가락이 한 번 가르쳐진 사람은 사정없이 끌여 나간다. 끌여 내인 사람들은 또다시 그 집단 속에서 자기와 같이 행동하든 사람들을 꺼집어 내도록 명령을 받는다. 주저하다가는 얻어맞고 한끝에 결국 또 하나를 손가락질한다. 새로이 끌려 나오는 사람은 손가락질한 사람에게 한사코 달려 덤빈대 그것도 그럴 것이다. 손가락질 한 번에 끌려 나오면 생명에 위험을 직감하게 되는 것이요. 변명할래야 아무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 자식아 눈깔이 뒤집혔느냐’, ‘내가 언제 폭도에 가담하였느냐’ 고함을 쳐보지만, 소용없는 짓이요. 당장에 경찰관에게 제지당하고 만다.

이리하여 지적을 받은 용의자들은 준열한 취조를 받고 그중 일부는 포박당한다. 이리하고 있는 동안에 학교마당 남쪽 구텡이에 15명의 청년이 포박된 채 끌려 나와 선다. 경관대가 한 사람씩 맡아서 약 10메터 뒤에 선다. ‘카빙’ 총의 발사와 함께 그들은 앞으로 꼬그러졌다. 제2탄, 제3탄이 쓰러진 그들에게로 다시 발사되였다. 운동장 안의 각 집단에서는 약속한 듯이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들을 가린다.”

서국민학교에서 일명 부역자를 분류하고 있는 모습이다. 칼마이던스의 사진 자료 주철희 제공 

일명 부역혐의자를 분류하여 혐의가 없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운동장에 남았다. 위 자료 사진으로 보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대체로 여성과 아이들이며, 학교에 잡혀 있는 사람은 남성들이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시민이 혐의에 따라 분류를 받기 위해 몰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산은 남산동의 예암산이다.

'손가락총'은 사적 감정의 중상모략이 난무했다. 그로 인하여 인간성 말살과 공동체가 붕괴했다. 손가락총 이외에도 일명 부역혐의자를 가려내는 것도 엉터리였다. 즉 ‘반란군’ 협조 여부를 를 선별하는 작업도 마구잡이식이었다. 당시 천일고무공장에서 생산한 ‘찌까다비’(일할 때 신는 신발)를 신었다는 이유, 머리를 짧게 깎았다는 이유, 국방색 러닝셔츠나 팬티를 입었다는 이유, 손에 기름때가 묻었다는 이유 등이 ‘반란군’ 가담자 또는 협력자로 분류 기준이 됐다.

 

 

김종원의 잔학성과 군법회의

종산초등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설치된 안내판 ⓒ박성태 2020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서 자행된 학살과 김종원 대위에 관한 얘기는 아직도 여수지역 사회에서는 회자된다. 특히 나이가 지긋하게 드신 어르신들은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이란 이름에 치를 떤다. 당시 종산국민학교 상황을 보면, 군기대가 설치되었고 수도경찰대와 전남 경찰사령부가 주둔하였다. 특히 종산국민학교 위에 있는 여수여중학교(현 여수여고)에는 부산 제5연대가 주둔했으며, 11월에는 호남계엄지구사령부의 군법회의가 열렸다.

10월 27일 여수를 점령한 토벌군은 일차적으로 각 학교 등 너른 곳에서 즉결처분이 이루어졌다. 혐의가 애매한 사람들은 여수경찰서로 연행했으나, 경찰서는 비좁았고 일부가 불에 탔기에 경찰서와 가까운 종산국민학교에 수용했다.

이번 연재하는 여순항쟁 유적지에는 대체로 안내판(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안내판의 내용은 매우 실망스럽다. 사실 여부에 대한 미흡한 점이 많다는 뜻이다. 현재 중앙초등학교 앞에 세워진 ‘김종원과 중앙초등학교’란 안내판의 설명을 보면, 아래 내용이 적혀있다.

안내판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일부 표기돼 있다. 

위의 안내판에 '국방경비대 군인들', '부산의 5연대장' , '아무런 재판과정도 없이' 등의 표기의 잘못에 대해서 지적해두고자 한다. 

여수 주둔 제14연대가 봉기를 했던 1948년 10월 19일은 국군이란 이름으로 전환된 상태이다.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제헌헌법과 함께 제정된 정부조직법에 따라 ‘국방부’란 정부 부처가 조직됐다. 이에 따라 9월 5일 국방경비대가 육군으로 해안경비대가 해군으로 발족했다.

그런데 국방경비대란 대한민국 국군 탄생 이전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 근거는 국군조직법이 1948년 11월 30일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국군조직법보다 상위인 헌법 제4조에 국군의 사명을 명시했고, 정부조직법에 따라 국방부를 신설하고 초대 국방장관에 이범석이 부임했다. 또한, 국무회의에도 ‘국군’으로 명기했고, 여순항쟁 발발 이후 정부와 국방부 발표는 물론이고 언론 보도에서도 모두 ‘국군’으로 표기했다. 여순항쟁이 발발할 시점에는 ‘국방경비대’가 아니라 ‘국군’으로 명기해야 적확한 표현이다.

‘부산의 5연대장이었던 김종원’이라고 안내판에 설명하고 있다. 당시 부산 주둔 제5연대 연대장은 장도영 중령이다. 장도영은 훗날 박정희가 주도한 1961년 군사쿠데타가 성공하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역임한다. 백두산 호랑이로 널리 알려진 김종원은 당시 제5연대의 1개 대대의 대대장으로 계급은 대위였다. ‘부산 5연대 대장’이 아니라 ‘부산 제5연대 대대장 김종원 대위’라고 표기해야 한다.

‘아무런 재판과정도 없이 학살’되었다고 안내판은 설명하고 있다. 종산국민학교에 구금되었던 사람 중에는 즉결처형된 사람도 있지만,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군사재판을 받기도 한다. 당시 호남계엄지구사령부의 군법회의는 광주, 순천, 여수에서 10여 차례 진행되었다. 여수에서는 제3차(11월 20일~21일)와 제7차(12월 12일~13일) 두 차례 군법회의가 확인된다.

두 차례 군법회의에 회부된 인원 1,142명으로 89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유죄판결 중 사형집행까지 승인된 사람은 113명이다. 무기징역, 20년 형, 5년 형 등의 유죄가 선고된 사람은 목포형무소, 전주형무소 등에 수감됐다가 훗날 6․25전쟁 중 형무소에서 처형된다. 이처럼 호남계엄지구사령부의 군법회의가 형식적이나마 존재했음에도 안내판에서는 그런한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만성리 굴에서 손가락총 형상화 ⓒ박성태 2020

학교운동장에 손가락총이 난무하면서 공동체 파괴가 이루어졌고, 인권이 말살되었다. 그런데도 아무 말 할 수 없었고, ‘반란’이란 멍에를 짊어졌다. ‘빨갱이’이란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통곡조차 죄가 되는 세상이었다. 당시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문제이며, 여수의 역사이다.
주철희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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