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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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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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11.14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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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만성리 형제묘, 잔학한 학살의 진실(完)

만성리는 여순항쟁 답사 마지막코스, 위령비와 형제묘가 자리해
마래터널은 개발과 수탈, 중국인 노동자 참여 역사를 간직한 곳
빨갱이로 몰린 야만성에 대항하는 '해원'의 만성리 '여순사건 위령비'
형제묘의 학살지는 너무도 끔찍, 무슨 원한으로 그토록 처참한 만행이?
125명을 한 명씩 총살해 구덩이에 버리고 화형시켰단 사실에 아연실색
법을 무시한 국가권력이 불법적으로 저지른 학살이 드러난 것
해방 직후에도,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우리 역사'가 가져온 만행
일제에 빌붙은 반민족행위자들이 경찰과 국군을 장악한 탓
지면 한계로 미진한 점 많아, 추후 책 발간으로 보완할 예정

편집자 소개글

저희 신문사는 ‘여수뉴스타임즈’와 공동으로 연재해 온 여순항쟁 72주년 특집 "1948,그때 그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이번 10편을 마지막으로 마칩니다. 연재에 참여해 주신분들과 독자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1) 봉기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진 14연대
(2) 봉기군, 여수역으로 향하다
(3) 북상길에 오른 봉기군
(4) 함성으로 가득한 여수 시내
(5) 바다로 들어오는 토벌부대
(6) 굽이친 길에서 만난 전투
(7) 여수시내,초토화 작전 시작되다
(8) 무차별 포격에 폐허가 된 여수
(9) '손가락 총'에 피로 물든 학교 
(10) 만성리 형제묘, 잔악한 학살의 진실

형제묘의 전경  ⓒ박성태 2020
형제묘의 전경 ⓒ박성태 2020

여순항쟁 답사에서 대체로 마무리하는 곳이 만성리이다. 만성리에는 ‘여순사건 위령비’와 ‘형제묘’가 있다. 일명 학살지이다. 전남동부지역은 특정한 곳만 학살지가 아니다. 곳곳에서 학살이 자행됐다. 강산이 일곱 번이 변했던 만큼 학살지도 그 모습이나 형태가 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가장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여수 만성리 ‘형제묘’이다.

만성리 학살지를 답사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 마래터널(현 마래2터널)이다. 마래터널은 1930년에 준공된 광주와 여수를 잇는 총 길이 160km 광려선의 철도굴이다. 마래터널의 준공은 여수와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를 연결하는 정기연락선 취항과 맞물린다. 일제는 쌀과 면화의 수탈에 나섰다. 호남은 곡창지대이면서 면화 70%를 생산하고 있었기에, 호남은 일제 수탈의 표적이 되고, 여수항은 그 중심에 서게 된다.

수탈기지로 여수신항을 개발하다

여수신항 전경 ⓒ박성태 2020
여수신항 전경 ⓒ박성태 2020

일본은 여수항을 부산항과 함께 남조선의 중추적인 항구로 건설할 의도가 있었다. 이는 일본 시모노세키까지의 거리가 부산과 별반 차이가 없으며,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쌀을 비롯한 각종 물산을 일본으로 수탈하기에 안성맞춤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수는 경제 수탈지에 군사기지로 변모한다. 중일전쟁(1937년)과 태평양전쟁(1941년) 등 전황이 확대되면서 군수품과 노동력이 필요했다. 급기야 여수가 군사 요충지로 주목받으면서 일본군의 요새사령부를 설치하고, 해군202부대와 군수품 공장이 가동된다.

여수에서 일본의 시모노세키를 연결하는 정기 관려(關麗)연락선을 띄우기로 계획한 일제는 여수신항 개발에 나선다. 그 항구가 2012여수세계박람회를 개최했던 신항이다. 이와 함께 광주에서 출발하여 송정리, 나주, 화순, 보성, 벌교, 순천, 여수를 잇는 철도를 건설을 시작한다. 철도 건설과정에서 덕충굴(소멸), 마래터널, 오림터널을 뚫는다. 암반터널인 마래터널을 뚫는 과정은 당시 신문에 보도될 만큼 험난했다.

여수신항 개발과 마래터널 건설의 과정에는 일명 꾸리(苦力)라고 불린 만주족 노무자가 강제 동원됐다. 만흥동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아침에는 벌떼처럼 사람들이 일하러 가는데 돌아올 때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말인즉, 당시 마래터널을 뚫는 과정에서 많은 만주족 노무자의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래1터널(좌측)과 마래2터널(우측) ⓒ박성태 2020

 

125명의 형제묘의 학살?

640m 마래터널을 지나 첫 번째 마주한 곳은 ‘여순사건 위령비’가 세워진 만성리 학살지이다. 이곳 학살지는 여수시민의 해원(解冤)이 담겨 있는 곳이다. 수많은 사람이 국가권력에 의해 학살되었지만, 누구도 말할 수 없었다. 입을 벙긋하는 순간 ‘빨갱이’로 몰렸던 야만의 시대였다. 그러면서도 잊지 않으려는 방편을 찾았다. 아이들에게 “작은 돌멩이라도 하나 던져 주어라”는 자조적인 넋두리는 기억으로 전승되어, 여순항쟁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장소가 되었다.

만성리 학살지의 ‘여순사건 위령비’ 전경 ⓒ박성태 2020
만성리 학살지의 ‘여순사건 위령비’ 전경 ⓒ박성태 2020

‘여순사건 위령비’를 지나면 마주하는 곳이 형제묘 학살지이다. 형제묘의 안내문은 어느 학살지의 안내문보다 끔찍하다. 이러한 학살을 자행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무슨 원한이 사무쳤기에 이렇게도 처절한 만행을 저질렀을까?

형제묘의 학살은 1998년 여수지역사회연구소(이하 여사연)에서 발간한 '여순사건실태조사보고서 제1집(이하 '조사보고서')'으로 드러났다. 안내판에는 여순항쟁 당시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였던 최명균의 증언으로 밝혀졌다고 서술되어 있다.

여사연의 '조사보고서'에 검토하면, 형제묘의 125명 총살과 화형에 의한 처참한 학살에 관한 증언자는 네 명이다. 신용식(증언 당시 73세)은 만성리 출신 여순항쟁 당시 좌익활동자, 최명균은 여순항쟁 당시 여수경찰서 사찰계 경찰, 배달막은 만성리의 초입에 해당하는 덕충동에 주민, 여순항쟁 당시 여맹위원으로 활동했고, 1948년 10월 20일 여수군 인민대회에 여맹을 대표해 연설한 정기순 등이다. 증언자 네 사람 중 유일하게 정기순의 혈육이 이곳에서 학살됐다.

만성리 형제묘의 안내문  ⓒ박성태 2020
만성리 형제묘의 안내문

네 사람의 증언을 분석하면, 현장에서 학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최명균이 유일하다. 신용식은 그곳에서 살아난 사람에게 들었다고 증언했다. 배달막은 나무를 옮긴 지게꾼에게 훗날 들었다고 증언했다. 정기순은 오빠 정기만이 그곳에서 학살되었고, 그 사연을 어머니에게 들었다고 증언했다.

 

125명을 처형 후 5묶음의 화형?

여사연의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형제묘의 안내판에 기술된 내용을 증언한 사람은 신용식이다. 즉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 최명균이 아니다. 신용식은 누구에게 형제묘의 학살을 들었던 것일까? 신용식의 증언을 옮겨보면,

“여순사건이 진압된 다음 저쪽 골짜기 무덤이 125명을 총살시킨 곳이야. 그때 숫자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한 명이 살아났거든. 불태운 인부들이 죽은 것으로 해서 굴려버렸기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 있어. 6.25때 올까 했는데 못 봤어. 당시 시내의 인부들이 와서 그 일을 했다. 총을 쏠 때 5명씩 묶어서 죽이고, 사람 쌓고 장작 쌓고 그렇게 했어. 거기서 우리 아까운 친구도 많이 죽었지.”

당시 처형장에서 한 사람이 살았고, 그 사람을 통해 형제묘에서 125명을 총살 후 화형시킨 것을 알았다는 것이 신용식의 증언이다. 총을 쏠 때 다섯 명씩 묶어 총살하고 화형을 시켰던 방법도 그 사람을 통해 듣었다고 증언했다. 다만, 그 이야기를 전해 준 사람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다.

박금만의 만성리 학살지를 형사화 한 그림. 여수 사람들은 그 이후 사람이 죽어나간 그곳을 무서워하며 지나갈 때 마다 돌을 던지며 지나갔다.  ⓒ박금만
박금만의 만성리 학살지를 형사화 한 그림. 여수 사람들은 그 이후 사람이 죽어나간 그곳을 무서워하며 지나갈 때 마다 돌을 던지며 지나갔다. ⓒ박금만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 최명균은 “5~60명을 한꺼번에 세워놓고 한 명씩 총살을 해서 바로 태워버렸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한 명이 살았는데 목에 하얀 것이 둘려져 가지고 바위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 용케도 빠져나갔는데 죽었지”라고 하면서 “그 사람이 죽었는데 눈을 가렸던 하얀 천같은 것에 목이 걸려서 죽었어. 거기에서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말이 안돼”라고 산 사람이 없다고 다시 강조했다.

직접 목격한 사람은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다고 증언했고, 한 사람은 살아 돌아 온 사람에게 증언을 들었다고 했다. 그 간접적 증언에 따라 형제묘의 학살은 사실화됐다.

 

1월 13일 한 차례만 학살이 있었는가?

여순항쟁 당시 순천경찰서에서 희생자 유족들이 가족을 찾아 시진을 수습하는 모습. 자료  주철희 제공
여순항쟁 당시 순천경찰서에서 희생자 유족들이 가족을 찾아 시진을 수습하는 모습. 자료 주철희 제공

만성리에서 학살된 피학살자 유족 14명은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에 피해를 신청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피학살자 14명이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이유로 진실규명을 각하한다. 피학살자 14명은 호남계엄지구사령부(사령관 김백일)의 군법회의 「명령5호」에 의해 10명, 「명령13호」에 의해 4명이 처형됐다. 「명령5호」와 「명령13호」에 의해 처형이 승인된 사람은 113명이었다. 이들 중 14명의 유족이 피해를 신청했으나,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다.

학살날짜에 대해서도 최명균이나 신용식은 특정하지 못했다. 정기순의 증언에서 오빠 정기만이 1949년 1월 13일 이곳에서 학살됐다고 밝히면서 학살날짜가 특정됐다. 그렇다면 만성리에서는 1949년 1월 13일 하루만 있었던 것일까?

피학살자 14명의 사망 일자를 보면 1949년 1월 13일과 1월 16일 양일이다. 1월 13일이 3명이며, 1월 16일 11명이다. 신영길이 밝히는 역사현장에는 1948년 11월 5일에도 89명을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51년 1월 14일에도 화양면 사람들을 이곳에서 집단학살했다. 현재까지 만성리로 지칭된 학살은 총 4차례 밝혀졌다. 향후 더 있을 가능성도 있다. ‘만성리 학살지’와 ‘형제묘’의 학살은 부역혐의로 처형된 것이 아니라, 법의 절차를 무시한 불법적인 군사재판으로 처형됐다. 국가공권력의 불법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학살이다.

 

만성리 학살의 잔인함은 누구의 소행인가?

만성리 학살의 특징이 총살 후 화형을 시켰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전후에 남쪽에서만 백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수많은 민간인 학살에서 총살 후에 화형까지 시킨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제주4.3항쟁의 경우도 여순항쟁 발발 이전에 이와 같은 잔악무도한 학살은 없었다.

이렇게 잔악무도한 학살이 자행되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던 간도특설대와 연관이 있다. 당시 정부는 군법회의의 처형 집행권을 호남계엄지구사령부에 일임했다. 호남계엄지구사령부의 사령관은 김백일이고, 여수지구계엄사령관은 송석하이다. 이 두 사람의 특징이 만주군의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반군토벌사령부의 정보참모였던 백선엽, 제15연대 최남근 중령도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만주에서 독립군에게 자행했던 무도한 짓을 이곳에서 다시 자행한 것이다.

반민특위정사(좌)와 반민특위 발족 기념사진(우).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습격사건’이다.역사를 바로 세울 반민특위는 이승만과 그의 주변 친일세력들의 방해책동으로 업무개시 8개월 만인 1949년 9월 22일에 막을 내리면서 친일파 청산을 못하고 그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만 했다. 지금도 그 여파는 남아 있다.
반민특위청사(좌)와 반민특위 발족 기념사진(우). 그러나 발족후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습격사건’이 일어났다.이로써 역사를 바로 세울 반민특위는 이승만과 그의 주변 친일세력들의 방해 책동으로 업무개시 8개월 만인 1949년 9월 22일에 막을 내리면서 친일파 청산을 못하고 그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만 했다. 지금도 그 여파는 남아 있다.

해방이 되었다. 민중은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염원했다. 하지만, 민중의 염원과 달리 일본군 출신 장교와 만주군 출신 장교가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부를 장악했다. 광복군 출신은 겨우 2명에 불과했다. 경찰도 예외는 아니다.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국의 독립을 방해했던 반민족행위자들이 국군을 장악한 역사.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결과가 형제묘의 학살로 이어졌다.

이번 연재는 ‘1948년 그때 그 자리’란 ‘장소성’을 강조한 연재였다.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글을 썼다. 그런데도 전달하고자 하는 부분에 절반 정도밖에 서술하지 못한 아쉬운 점이 있다. 차후 보강하여 책으로 발간할 것을 약속하면서 연재를 마감한다.

주철희 (역사학자)
* 본기사의 내용과 사진은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인용할 수 없습니다.

여순항쟁 72주년 특집 "1948,그때 그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에 관심과 성원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연재 기념으로 지금까지 연재한 10편을 모아 자료집으로 발간해 배포할 예정입니다. 아울러 독자 여러분을 모시고 취재에 참여하신 분들과 함께 이번 특집과 관련한 뒷 얘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페이스북 생중계도 할 것입니다. 또한 글쓴이 주철희 박사는 글에서 밝힌대로 연재기사를추가하고 보완해 책으로 펴낼 계획입니다. 여수1948년 '그 자리' 장소성을 강조한 기념비적인 저술로 여순항쟁 안내서로 손색없는 여수시민의 자산이 될 것 같습니다. 거듭 감사드리며 많은 성원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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