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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⑥

(6) 굽이친 길에서 만난 첫 전투

순천을 단숨에 제압해 의기양양한 토벌군 여수 진격
여수군 인민위원회 유목윤 인구부전투서 시민군 이끌고 첫 승리
토벌 군인에 의한 여수에서의 첫 민간인 학살은 미평 굴다리서
광주 5.18에 힌츠펜터가 있었다면 여수항쟁때는 칼 마이던스가

  • 입력 2020.10.31 08:00
  • 수정 2020.10.31 08:32
  • 기자명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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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토벌작전을 위해 도열한 순천에 도착한 장갑차 부대. 이곳은 현재 순천 중앙동 신한은행 앞이다.  자료 주철희 제공 

국군이 여수를 몇 차례 공격 끝에 10월 27일 점령한 것과 달리 순천은 10월 22일 순천 주요 지점을 장악하고, 23일 오후 순천 시내를 완전점령한다. 그리고 대대적인 민간인 협력자 색출에 나선다. 일명 부역자 색출이다. 여수와 순천이 어떤 부분에 차이가 있었기에 여수는 몇 차례 전투를 막아내고, 순천을 한 번의 공격에 점령되었을까?

그 차이는 지리적 위치이다. 순천의 경우 서쪽의 벌교에서, 동쪽의 광양에서, 북쪽의 구례와 주암 등 여러 공격 루트를 통해 진압 작전에 나선다. 반면 여수는 최남단에 위치하여 바다를 제외하면, 오로지 북쪽에서 들어올 수 있는 길 하나밖에 없었다. 여수 지형은 공격은 어렵고, 방어는 그만큼 쉬웠다. 그리고 여수는 초보적이나마 인민위원회의 행정이 실행되었다. 즉 인민위원회가 시민이 원하는 정책을 실현하면서, 시민들의 신뢰와 지지가 높았다. 이는 곧 여수를 지키겠다는 결의로 나타났다.

여순항쟁 72주년 특집 "1948,그때 그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는 10편에 걸쳐 연재됩니다. 
(1) 봉기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진 14연대
(2) 봉기군, 여수역으로 향하다
(3) 북상길에 오른 봉기군
(4) 함성으로 가득한 여수 시내
(5) 바다로 들어오는 토벌부대
(6) 굽이친 길에서 만난 전투
(7) 포격으로 불타는 여수시내
(8) 남녀노소 학교로 모여들다
(9) 손가락총에 피로 물든 여수
(10) 만성리 형제묘의 진실

의기충천한 토벌군 여수 진격 작전

10월 23일 순천을 점령한 반군토벌전투사령부는 의기양양했다. 10월 21일 오후 1시에 광주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하여 곧바로 작전을 지휘했던 송호성 사령관은 여수 점령도 시간문제라며 의기충천했다. 송호성 사령관이 광복군 출신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전투경험이 많았던 군인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의 소장층 장교들에겐 기피 인물이었다. 송호성 사령관보다 일찍 20일 현지에 내려와 있던 백선엽 정보국장, 김점곤 작전정보과장 등 국방부 정보국의 만주군 출신이 사실상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당시 작전회의 사진에는 가운데 인물이 송호성 사령관, 그 왼쪽 박정희, 오른쪽은 풀러 대령. 칼 마이던스의 사진. 자료 주철희 제공

흥미로운 것은 박정희이다. 만주군 출신 박정희 대위는 당시 육사 포병 교관이었으나, 만주군 출신의 차출로 전투사령부의 작전 및 문서처리 등을 맡았다. 

송호성 사령관은 순천을 점령하자 곧바로 여수 점령에 나선다. 10월 24일 송호성 사령관 지휘 아래 전주(이리) 주둔한 제3연대 부연대장 송석하 소령이 이끈 1개 대대가 주축이 되어 여수 토벌작전을 감행된다. 송석하는 만주군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송호성 사령관은 20여 대의 장갑차를 진두지휘하여 여수로 진격했다. 앞서 언급했지만, 순천과 여수는 지리(공간)적으로 사뭇 달랐음에도 전투경험이 일천한 송호성 사령관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인구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람 시민군과 유목윤

인구부 표지판 ⓒ박성태 2020

24일 오후 여수로 진격한 토벌군은 인구부 또는 잉구부로 불린 종고산 산복도로에서 시민군에 기습을 당한다. 인구부(잉구부)에 대한 명칭은 반달 모양으로 왼쪽으로 크게 휘어져 있는 지형에서 유래되었다고 대체로 말한다.

한편 인구부는 목구멍 인(咽)과 입 구(口)란 의미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여수로 들어오는 입구이면서 목구멍과 같이 길게 늘어진 도로라는 의미이다. 인구부는 조선시대에도 북쪽에서 전라좌수영성으로 진입하는 유일한 도로이며, 관문이다. 1948년에도 인구부는 여수 시내로 진입하는 유일한 도로였다.

인구부 전투지인 현 연등동 일대. 가운데 왼쪽으로 굽은 길이 보인다.  ⓒ박성태 2020
당시 '인구부길'은 지금은 연등1길. 좁다.  '여수절도사 안숙 사적비' 팻말과 '태양슈퍼'가 보인다. ⓒ박성태 2020

인구부 종고산 산복도로 밑에는 연등천이라는 여수에서 가장 큰 하천이 있기에 기습하기 가장 적당한 곳이었다. 20여 대의 장갑차를 앞세운 송호성 사령관은 무방비 상태로 인구부에 진입하고, 산 중턱에 매복하고 있던 여수 시민군은 일제히 기습을 감행한다. 송호성의 장갑차에 떨어져 허리를 다치고 고막이 터지는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선두에 있던 미국 종군기자 AP통신의 램버트가 사망한다. 종군기자 AP통신의 램버트 사망은 여수 토벌작전에 새로운 전기가 된다. 즉 10월 26일 여수 토벌작전에 7개 연대라는 병력이 투입되게 된 계기가 된다.

10월 24일은 미군인 기자 4명과 국내 기자들이 현지(순천과 여수)에서 처음 취재를 시작한 시기이다. 23일 아침 서울을 떠나 광주를 거쳐 순천에 들어온 미국 종군기자들은 여순항쟁 발발 당시 동경에 있었다. 5.18민주항쟁 당시 독일인 기자 힌츠펜터와 같은 경우이다. 이들은 AP통신의 램버트, 시카고․데일리 뉴스 겸임의 비취, 뉴욕의 헤럴드․트리뷴 겸임의 레이몬드, 타임스․라이프 겸임의 칼 마이던스 등 4명이다. 칼 마이던스는 여순항쟁의 많은 사진을 남겨,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인구부 전투에서 매복 기습을 당한 송호성 사령관은 다시 순천 방면으로 후퇴한다. 이 후퇴과정에서 미평에서 장갑차 소리에 놀란 시민과 미평지서에 잡혀 있던 시민 등 47명을 미평지서와 미평 굴다리 부근에서 학살한다. 토벌작전 실패 분풀이로 민간인의 학살한 것이다. 여순항쟁 과정에서 여수에서 벌어진 첫 번째 군인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다.

군인에 의해 민간인이 첫 희생된 미평초등학교 옆 미평 굴다리  ⓒ박성태 2020

이날 인구부 전투에서 시민군을 이끈 사람은 여수군 인민위원회 의장 중 한 사람이며, 보안서장이었던 유목윤이다. 유목윤은 1921년생으로 당시 남로당 여수군당 위원장이었다. 그는 해방 이후 건준과 인민위원회 등을 활동했던 인물이다. 유목윤은 이날 전투에 승리하고, 토벌군이 대대적인 전투를 감행한 10월 25일과 26일 새벽 사이의 야음을 틈타 백운산으로 입산한다. 그는 백운산에서 ‘여수부대’를 만들어 빨치산 투쟁을 한다. 백운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전남 빨치산은 ‘여수부대’를 ‘유목윤 부대’로 칭했다. 유목윤은 1951년 1.4후퇴의 지루한 공방이 벌어질 시기에 지리산으로 들어가 후방부대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국군에 사살된다.

 

시민군을 도운 정기덕 인민장례식

인구부 전투에서 시민군에서도 희생자가 나온다. 당시 순천사범학교를 다니던 여학생 정기덕이다. 정기덕은 10월 20일 여수군 인민대회에서 여맹 대표를 대신하여 연설했던 정기순의 동생이다. 정기덕은 시민군의 싸움에 실탄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다가 총격에 사망한다. 여수군 인민위원회는 10월 25일 인민위원회장으로 장례를 치른다. 당시 정기덕의 장례와 관련된 글이다.

여순항쟁 당시 '여수인민위원회'가 설치된 곳. 지금은 여수시 관문로 52 '여수우정교육센터(구,여수우체국)' 다.  ⓒ박성태 2020

 

“25일 하오 1시 보안서(여수 경찰서) 앞에 ‘고정기덕동지인민장의(故鄭基德同志人民葬儀)’가 학생들의 추도가 합창으로 진행되었는데, 온 가족의 인사로 고인의 늙은 어머니가 단에 올라 말하기를 ‘나라와 겨레에 바쳤으니 아깝지도 슬프지도 않으나, 다만 지나간 쓰라린 세월 애가 그 어려운 ‘운동’이라는 것을 한답시고 덤벙될 때 어미로서 밥 한 끼 따뜻하게 못 해먹인 것이 가난하여 별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에게 미안스럽고 애처로울 따름이다’고 하여 사람들을 더러 올리었다는 것이다.”(박찬식, 「칠일간의 여수」, 새한민보 1948년 11월)

정기덕은 학생이면서 ‘운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의 오빠 정기만(당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만성리 형제묘에 처형됨)의 영향으로 언니 정기순과 함께 정기덕도 사회계몽과 사회주의 운동을 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러한 딸에게 가난하다는 이유로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인 것이 애처롭다고 하고 있다.

인구부 전투에서 시민들이 맹렬하게 저항 이유는 10월 20일 여수군 인민대회 이후 인민위원회가 펼친 정책이 크게 역할을 했다. 즉 인민위원회는 6개 항의 정책 사항을 실천했다(4편 참조). 해방 이후 미군정 3년, 이승만 정권 2개월이 되도록 인민은 배고파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었다. 일제에 반민족행위를 했던 친일파는 떵떵거리고 사는데, 해방된 조국은 일제강점기와 다르지 않았다.

여수 태풍 피해. 대한신문 1948년 8월 11일자 기사.   자료 주철희 제공 

1948년 8월 1일 여수군에서는 태풍으로 인한 사망자가 36명에 행방불명이 5명, 부상자가 102명이 발생했다. 그런데도 배급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여수 인민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4연대 군인이 봉기하고, 인민위원회가 재조직되면서 인민을 위한 행정이 펼쳐진다. 해방 이후 그토록 염원했던 일들이 실현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인민들은 그 상황을 지키고 싶었다. 그 결과 제1차 상륙작전, 인구부 전투에서 목숨을 건 저항을 한다.

주철희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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