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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⑦

(7) 여수시내, 초토화 작전 시작되다

인공기 휘날렸다는 여수.순천... 그런 주장은 사실일까?
게양했단 기록이나 각종 사진에도 인공기 등장 흔적은 없어
연대장으로서 ‘반란’을 민간인에게 책임 전가한 기자회견이 근거가 되고 지금까지 사실로
26일,27일 여수시내 초초화 작전 개시...토벌진압군 다양한 루트로 총 공격
미 임시고문단 초토화 작전 지휘, 무기 등 지원하며 진압에 미군이 역할
육지에선 장갑차 공격, 해상 함대에선 박격포로 공격해 여수중심가 불바다

  • 입력 2020.11.04 13:55
  • 수정 2020.11.07 12:33
  • 기자명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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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모란봉극장에서 연설하는 김구. 자료 주철희 제공

10월 26일과 10월 27일 여수 점령을 위한 초토화 작전을 기술하기 이전에, 인공기에 대한 문제를 약간 언급하고자 한다. 이번 연재는 ‘그때 그 자리’란 장소성의 강조이다. 여순항쟁과 논란이 되거나 왜곡된 것을 바로잡는 연재가 아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인공기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여순항쟁과 관련하여 인민재판, 인공기 등으로 여순항쟁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인공기’란 깃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國旗)를 의미한다. 인공기의 탄생부터 살펴보자. 1948년 4월 19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이하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된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김구는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함께 모란봉극장에서 연설한다. 무대에는 태극기가 양쪽으로 걸려 있었다. 북쪽에서도 이때까지 태극기를 사용했다.

남북연석회의에서 결의사항(외군철수→전 조선인민의 정치회의→임시정부 수립→총선실시 →제헌의회 구성→통일정부수립)이 도출되지만, 끝내 5.10 총선거가 실시됐다. 즉 단독선거로 남쪽에서 단독정부가 수립을 준비하면서, 북쪽도 정부수립 절차에 들어간다. 북쪽에서는 1948년 7월 8일 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사용했던 태극기를 폐지한다. 그리고 1948년 9월 8일 최고인민회의 1차 회의에서 헌법 초안이 채택하고, 인공기를 북쪽의 국기로 정식 채택한다.

여순항쟁 72주년 특집 "1948,그때 그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는 10편에 걸쳐 연재됩니다. 
(1) 봉기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진 14연대
(2) 봉기군, 여수역으로 향하다
(3) 북상길에 오른 봉기군
(4) 함성으로 가득한 여수 시내
(5) 바다로 들어오는 토벌부대
(6) 굽이친 길에서 만난 전투
(7) 여수시내, 초토화 작전 시작되다 
(8) 포격으로 불타는 여수시내 
(9) 손가락총에 피로 물든 여수
(10) 만성리 형제묘의 진실

 

인공기가 휘날렸다는 여수와 순천

여수항쟁이 발발하고 처음으로 여수와 순천에 인공기가 달렸다고 발표한 사람은 채병덕 국방부 참모총장이다. 10월 22일 채병덕은 기자회견에서 “지금 순천 여수에는 인민공화국기가 휘날리고 있으며”라고 하면서 “총공격을 개시하여 반란군을 여수반도로 압박하고 있다. 2, 3일 내로 반란은 진압될 것이다”고 밝혔다. 10월 22일이면 국군 토벌부대가 순천도 점령하지 못했고, 여수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을 때이다. 물론 2, 3일 내에 진압될 것이라는 장담도 허튼소리였다. 국내외 기자가 순천과 여수에서 취재를 시작한 날짜가 10월 24일이다. 현지의 취재나 정확한 정보가 아닌 정부의 입맛에 맞게 재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월 21일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도 인공기가 순천에 경찰서를 비롯하여 여수와 순천 주요 기관에 게양됐다고 했지만, 사실을 확인한 것이 아니라 ‘카더라 통신’이었다. 전날(10월 21일) ‘극좌 극우 공모’라는 성질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인공기가 등장한 것이다.

제14연대 박승훈 연대장의 기자회견. 자료 주철희 제공

여수 시내에 인공기가 달려 있다는 주장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여수 제14연대 연대장이었던 박승훈 중령이다. 박승훈은 10월 19일 저녁 여수신항에서 제주도 출동 준비를 하고 있다가 부대 내에서 ‘반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습에 나섰지만 어떤 조치도 하지 못하고 피신한다. 10월 22일 밤에 민간 복장으로 변복을 하고 목선을 타고 여수를 탈출하여 24일 목포에 도착한다. 이때 동행한 장교가 전용인 소위이다.

박승훈과 전용인은 목포에서 간단한 기자회견을 하고 곧바로 서울 국방부 총사령부로 이동하여, 27일 기자회견을 한다. 박승훈은 기자회견의 중점은 “지방의 적색분자들이 장기적이고 계획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아래 일부 군대가 책동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민공화국의 선전 연설”과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반란’의 총지휘자로 여수여중학교 송욱 교장을 지목했다. 전용인은 “익일 20에는 벌써 전 시민이 인공기를 손에 들고 인민군 만세를 부르짖는 환영시위가 전개되었다”고 했다.

제14연대 연대장으로서 부대의 ‘반란’을 민간인에게 책임 전가한 기자회견은 모두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여순반란사건’으로 전환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김형원 공보처 차장은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제14연대 군인 반란사건’을 ‘전남반란사건’으로 전환한다. 그리고 인공기가 시내에 휘날렸다는 여러 기록이 등장하고, 사실이 되었다.

인공기가 북쪽에 국기로 채택되고 한 달 조금 지난 시점에 여순항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여수군 인민위원회의 사무실과 인민대회장에 인공기가 게양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여순항쟁 당시의 칼 마이던스나 이경모, 경향신문, 국제신문 등의 사진에도 인공기는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여수시내, 초토화작전에 나서다

여순항쟁 발발하면서 미국도 당황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미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20일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대책을 마련한다. 10월 21일 반군토벌전투사령부를 광주에 설치하고, 송호성을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로버츠 준장은 송호성에게 보낸 훈령에서 “정치적․전략적으로 여수와 순천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능한 이른 시일 안에 탈환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이에 10월 26일과 10월 27일 여수 점령을 위한 초토화 작전을 전개한다. 미 임시고문단은 초토화 작전을 지휘하고 무기 등을 지원하며, 실질적인 역할을 한다.

당시 여수 토벌작전중 비행정찰 장면의 칼마이던스 사진. 미군 연락기가 지상군과 신호를 주고 받고 있다. 미평에서 시내 방향으로 촬영한 모습으로 앞에 보인 산이 장군산이다. 자료 주철희 제공

26일 정오 무렵부터 토벌사령부는 여수 초토화 작전 전개를 시작한다. 제2․3․4․6․12․15연대의 지상군 병력과 LST함에 승선한 제5연대 1개 대대, 장갑차 부대, L-4 항공기부대, 경찰지원부대를 비롯한 해군 함정이 투입된다.

순천에서 출발한 토벌사령부는 26일 오후 1시경 여수군 여수읍 미평리까지 진격한다. 토벌군이 미평까지 도착하는 과정에서는 별다른 공격이나 대항이 없었다. 미평은 토벌군에게 여수 점령을 위한 전초기지였다. 이미 한 차례 인구부에서 패전한 경험이 있었던 토벌사령부는 미평에서 여수시내 공격 경로를 여섯 갈래로 나눈다.

① 광주 제4연대는 여수 서쪽방향으로 공격을 시도하여 1개 대대는 제14연대를 점령하고, 1개 대대는 구봉산을 장악한다.
② 제12연대는 북서쪽 방향(장군산)으로 진격한다.
③ 제2연대는 종고산 방향에서 시내로 진입하기 위해 종고산을 점령한다.
④ 제3연대는 마래산을 넘어 덕충동 통해 시내로 진입한다.
⑤ 제6연대는 덕충동을 넘어 시내방향을 진격한다.
⑥ 제15연대는 동쪽 해안을 따라 신항쪽에 시내로 진입한다. 그리고 바다에서는 부산 제5연대 1대대가 김종원 지휘 아래 해군 함정에서 함포사격으로 지상군을 도왔다. 이때 여수 시내 1차 화재가 발생한다.

일명 지게부대가 탄약을 지고 시내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자료 주철희 제공
현 미평삼거리에서 시내 방향으로 촬영. 위 사진과 장군산 능선이 일치한다. 비행정찰 위의 사진과 거의 동일한 촬영 지점이다. ⓒ박성태 2020

비행정찰대의 시내 상황을 알려주는 장면이나 일명 ‘지게부대’라고 부른 민간인이 탄약을 지고 군인들과 함께 시내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 장면은 현재 미평삼거리에서 시내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을 대조해 보면 1948년 당시와 현재가 비교된다.

토벌사령부가 파악한 시민군의 병력은 1,000명~1,200명 정도라고 하지만, 이는 과장하여 부풀린 숫자이다. 대부분 봉기군과 시민군은 24일과 26일 새벽에 지리산과 백운산으로 입산하여 대항 세력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마저도 청년․학생과 시민이었다.

칼 마이던스의 사진. 화재로 인한 짙은 연기가 오르고 진압군이 경계근무를 하고 있다. 이 화재는 여수 중심가를 전소시켰다.  자료 주철희 제공

26일 오후 3시부터 5시경까지 구봉산․장군산․종고산․덕충동․신항 등 외곽지역을 장악한다. 제12연대와 토벌사령부는 서국민학교에 본부를 설치한다. 송석하 소령이 지휘하는 제3연대는 덕충동에 진입하면서 민가에 불을 질렀다. 당시 100여 호가 살던 덕충마을은 4채만 남고 모두 불탔다. 토벌군은 총을 들고 대항했다는 이유로 젊은 사람들을 색출해 동네 밭에서 40여 명을 집단 학살했다.

27일 토벌군은 서국민학교에 주둔한 제12연대는 공격 개시 전에 81밀리 박격포를 산포사격(조준점 지속 변경 사격)으로 10여 발을 발사했다. 이로 인하여 휘발유 탱크에 박격포탄이 떨어져 휘발유통이 공중으로 치솟으며 폭발하여 서시장에 큰 화재가 발생한다. 제12연대는 12량의 장갑차를 선두로 인민사령부(읍사무소, 현 공화동 우체국)와 여수읍 중심지에 공격을 개시한다.

당시 여수읍사무소(현 여수우정교육센터, 구 여수우체국)와 여수경찰서 ⓒ박성태 2020

제5연대는 상륙을 위해 81밀리와 61밀리 박격포 사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갑판의 반동으로 탄착점이 형성되지 않아 여수 읍내가 초토화됐다. 제5연대는 지상군이 여수를 점령이 완료된 이후 무혈상륙하여 여수여중학교에 주둔했다.

(이어지는 8편에서는 김낙원(향토사학자)의 '여수향토사'에 기록된 토벌군의 무차별적인 공격과 여수시내 불바다 모습이 소개된다.) 
주철희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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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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