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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⑧

(8) 무차별 포격에 폐허가 된 여수

여수에서 학살 첫 장소는 덕충동... 송석하 소령의 3연대 토벌군이
여순항쟁때 100여가구 덕충동은 4채만 남고 화염속으로 사라져
백인엽부대는 구봉산,장군산, 종고산 위에서 주요기관에 박격포로 공격
여수시민들은 아우성 속에도 속수무책, 주변 학교에 모여 벌벌 떨고만~
진압군의 막무가내 공격은 같은 진압군끼리 인명피해 입힐 정도로 무차별적
'여수 블루스','여수야화' 슬픈 대중가요 등장... 남인수의 '여수야화'는 최초 금지곡
'문인조사반'은 여수에 파견돼 이런 피해가 지방좌익에 의한 것이라고 왜곡 전달
현지조사의 왜곡과 와전이 사실로 받아들여져 여수는 '반란'과 '빨갱이'도시로 인식
여수 진압부대 중 '수도경찰대'의 만행은 극에 달했는데 진화위에서도 사실로 조사돼

  • 입력 2020.11.07 13:00
  • 수정 2020.11.07 22:41
  • 기자명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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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소개글 

저희 신문사는 ‘여수뉴스타임즈’와 공동으로 여순항쟁 72주년 특집 "1948,그때 그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를 10편에 걸쳐 연재합니다. 여순항쟁의 시발지인 여수에서는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주요 장소별로 정리하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8편 '무차별 포격으로 폐허가 된 여수'를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1) 봉기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진 14연대
(2) 봉기군, 여수역으로 향하다
(3) 북상길에 오른 봉기군
(4) 함성으로 가득한 여수 시내
(5) 바다로 들어오는 토벌부대
(6) 굽이친 길에서 만난 전투
(7) 여수시내,초토화 작전 시작되다  
(8) 무차별 포격에 폐허가 된 여수   
(9) '손가락 총', 절망의 운동장 
(10) 만성리 형제묘의 진실

1948년 10월 27일에 촬영된 영상을 갈무리한 사진. 여수시내가 불타고 있다. 자료 주철희 제공

1948년 10월 24일 인구부에서 패퇴한 토벌군은 26일 다시 공격에 나섰고, 27일 새벽 구봉산․장군산․종고산 등의 산 줄기에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자 종고산 등의 일발 총성을 신호로 도시는 '포연 탄우' 속에 쌓였다. 아비규환이었다. 

토벌군이 여수 점령 작전에 돌입하면서 직접 불을 지르고, 잔학한 학살을 가장 먼저 한 곳은 덕충동이다. 송석하 소령이 지휘하는 국군 제3연대는 미평에서 마래산 줄기를 타고 종고산에 접근하여 종고산 고지를 점령한 시간은 10월 26일 오후 3시경이다. 그러나 시민군의 기습을 우려하여 퇴각한다. 27일 새벽 5시경 제3연대 2대대(조재미 대위) 소속 100여 명이 총을 쏘며 마을에 진입했다.

박금만의 그림 미평에서 덕충동으로 들어오는 토벌군과의 전투장면. ⓒ박금만

산 밑에 첫 집에서 19살 된 딸을 겁탈하고 가족 6명을 사살하고 마을로 진입했다. 군인들은 집집마다 수색을 하며 불을 지른 뒤, 주민들을 모두 마을 앞 논으로 모이라고 총을 쏘며 명령했다. 불은 순식간에 마을 전체로 번졌다. 당시 100여 가구가 살았던 덕충동은 이 불로 기와집 몇 채(4채로 증언)를 제외하고 모두 전소됐다. 이 토벌작전에 학살된 마을주민은 유아를 포함하여 40여 명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동국민학교로 모여 다시 ‘반란군’ 가담자와 협력자 여부를 심사받고, 혐의가 있는 사람은 종산국민학교로 옮겨졌다. 덕충동 잔학한 학살의 주범은 제3연대 송석하 부연대장과 2대대 대대장 조재미 대위이다. 송석하와 조재미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었다.

27일 아침을 기해 서국민학교에 본거지를 둔 제12연대(백인엽 부연대장 지휘)는 무지막지하게 81밀리 박격포를 쏜다.  구봉산․장군산․종고산․예암산 등에 주둔한 토벌대는 박격포 발사와 함께 일제히 여수군 읍사무소와 경찰서 등 시내 주요기관에 기관총을 난사하며 공격을 시작한다.

무차별적인 포격에 폐허 된 도시

서정시장에서 장군산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 라이프지의 칼마이던스 사진이다.
이 사진은 당시 여수 시내의 도로망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다. 제14연대 병사위원회가 봉기하고 신월동에서 여수역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길을 통해야만 했다. 당시 서교동 한재사거리에서 충무동 방향으로 촬영한 칼 마이던스의 사진이다. 화염에 휩쌓인 곳은 식량영단창고와 금융기관이 있던 곳이다. 자료 주철희 제공

 

당시와 비교되는 현재의 종고산과 시내모습. 종고산 능선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박성태 2020

육지와 바다에서의 박격포 공격으로 시내는 불 타고, 무차별적인 총격으로 건물은 남아 나지가 않았다. 26일과 27일 토벌군의 공격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한 사람이 김낙원이다. 향토사학자 김낙원은 1952년 '여수향토사'에 여순항쟁에 대해 사건의 개요와 피해 상황을 간략하게 서술한다. 이 책을 대폭 개정한 책이 1962년 여수향토사이다.

김낙원은 자신이 직접 겪은 봉기군의 점령기간과 진압 과정 등을 총 20쪽 분량으로 서술했다. 아랫 글은 김낙원의 1962년 여수향토사에서 서술한 여순항쟁 일부분이다. 띄어쓰기 정도만 현재 맞춤법으로 정리했다.

“때는 26일 오후 3시경이다. 오직 청징하고 명랑하여야 할 가을 날씨어늘 불안과 공포와 더욱이 생명의 위난을 직감케하는 이곳 여수의 공기는 왜 이처럼 둔중하고 탁하기만 한것일까? 미평시가 또는 봉루동(현 봉강동) 한재 길목으로 장사열을 치는 난민의 군상도 애처럽거든 하물며 허허실실의 구송전문마저 죄없는 시민의 가슴을 떨리게 하나? 이때야 말로 8만 시민은 신의 가호를 빌어야 하고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하여 전지능을 발동시켜야만 했다.

올 것은 기어코 오고야 말았다. 구봉산․장군산․종고산 등의 산 줄기에 인영이 움직이자 종고산 등의 일발 총성을 신호로 전시는 문듯 포연 탄우 속에 쌓여 버렸다. 목불인견의 골육상잔! 아니 아비규환을 연상케하는 이 순간을 후세의 사학자는 또한 무어라 할 것인가?

민족애와 정의와 진리가 있고 민족의 역사와 전통이 엄연 존재하는 이 나라의 백성 처놓고 이 무슨 오욕이며 뼈저리는 참변이랴!

여수시내가 화염에 휩싸이자 불을 끄려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당시 식량영단창고가 있었던 부근이다. 현재는 여수시 충무로 58-3 인근이다. 자료 주철희 제공

전시(全市)를 포위한 진압군은 기관총을 난사하며 공격망을 압축하는 동시에 시민을 닥치는 대로 몰아내고 민가를 샅샅이 수색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진압군은 서국민학교를 본진지로 삼고 서정방면에서 몰아낸 시민들도 여기에 모이게 하였다. 밤이 되어 공격도 멈추어졌다.

짙어가는 가을밤의 공기마저 싸늘한데 짓구진 빗방울은 왜 내리는 것일까? 이날 초저녁판에 서정장터에서 난데없이 일어난 화재는 밤하늘 충천하여 죽엄과 파멸의 구렁의 직면한 시민의 가슴을 더욱 두근거리게 하였다.

날이 새니 27일이다. 시내를 완전포위한 육군부대는 시중(市中)을 향하여 총공격의 총불을 터뜨려놓고 앞바다에 정박한 함정으로부터도 원호 포격을 퍼붓는 통에 전시(全市)는 바로 수라장화되었다. 이때의 반군측 군세라는 것은 전기한 바와 같이 진짜는 이미 도피하여 버리고 다만 멍사 모르는 뇌동배만이 우글거리고 있는 판국이라 대전이라 할만한 형태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난발하는 추격포탄 때문에 오히려 진압군 측의 부상자가 속출하는 실정이었다. 이날 오후 8시경이다. 교동 현 시민극장(당시 식량영단창고) 옆에서 화재가 일어나자 때마침 부는 바람에 부쳐 화세는 순식간에 도심지대를 삼켜버렸다.

휘발유통 튀는 소리 아우성 소리! 서교에 모여든 시민들은 이 참경을 바라보고도 속수무책이었다. 이것이 총포격과 화공전쟁의 본연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같은 사념에 사로잡힐 여지조차 없이 시민은 서교 또는 진남관, 중앙교(당시 종산국민학교) 등의 교정에 모여진 채 다만 벌벌 떨고만 있었다.”

 27일에 촬영된 영상을 갈무리한 사진. 식산은행 주변이 불타고 있다. 자료 주철희 제공

 

 조선식산은행(구 제일은행 여수지점) 건물이 불탔다. 근대문화유산 등록하면서 일제강점기 건물이라 했는데 잘못된 정보다. 자료 주철희 제공

1948년 10월 27일에 촬영된 영상을 갈무리한 사진을 보면 여수 시내, 현재 서교동․교동․중앙동 일대가 화염에 휩싸인 모습이 보인다. 이때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극장, 은행 등 주요건물이 모두 불에 탔다. 현재 중앙동에 있는 조선식산은행(구 제일은행 여수지점) 건물도 이때 불에 탄다. 이 건물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면서, 일제강점기 건물이라고 소개한 것은 잘못된 정보이다.

 

최초의 금지곡 「여수야화」

문교부에서는 당대 최고의 문인․평론가․만평(만화가)․사진작가 등으로 구성된 ‘반란실정 문인조사반’을 여수와 순천에 파견한다. 문인조사반 일원으로 여수에 왔던 박종화는 「남행록」이란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연재한다. 그 일부분이다.  

“종고산 밑 진남루 아래 시가지 번화한 일대는 그대로 폐허였다. 타고 남은 철근콘크리트의 네 기둥만 남은 초열에 타고 남은 형해의 집과 집들! 탄흔은 벽과 창과 마루와 처마 끝에 어지럽고 비참하게 박혀있었다. 창고자리엔 소금가마가 새까맣케 쌓인 채로 타고 산 같이 싸인 자전거들은 엿같이 녹아 구부러졌다. 이 황막한 재만 남은 폐허 위에 백성들은 하나 둘씩 돌아오고 있었다.”

김낙원은 여수가 폐허된 이유를 국군의 무차별적인 함포와 박격포 사격이 원인이라고 했다. 반면, 문인조사반은 여수의 폐허를 ‘반란군’과 ‘지방좌익’이 불을 질러 발생했다고 서술했다. 진상을 정확하게 조사해서 알리겠다는 문인조사반, 종교위문단 등 정부기관에 의해 파견된 현지조사반은 이처럼 여순항쟁의 상황을 왜곡해서 서술하고 보도했다. 이름부터 '반란실정 문인조사반'이었다. 이러한 왜곡이 쌓이면서 어느 사이 ‘여순반란사건’이라는 명칭은 전국적으로 회자됐고, 여수와 순천은 ‘빨갱이’ 도시가 되었다.

10월 26일과 27일 토벌군의 공격으로 여수는 폐허가 됐다. 폐허된 여수를 노래한 가요가 「여수블루스」(강석오 작사․작곡)와 남인수의 「여수야화(夜話)」(작사 김건, 작곡 이봉룡)다. 「여수야화」는 정식 음반으로 제작된 대중가요지만, 안타깝게도 1949년 9월 1일 “가사에 있어 불순할 뿐만 아니라 민심에 악영향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레코드를 판매 금지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 금지곡이 되었다.

 

민간인 학살에 경찰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도경찰대(일명 주종일. 朱부대) 주둔지였던 종산국민학교. 지금은 여수중앙초등학교다 ⓒ박성태 2020

 

여수 민간인 협력자 색출에는 경찰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도경찰대, 일명 특경대원  304명이 주종일 경감의 지휘 아래 파견되어 여수 외곽지역인 화양면, 율촌면, 삼일면, 소라면, 오천동 등에서 협력자 색출에 나섰다. 이 부대는 주종일(朱鐘一)의 성씨를 따서 ‘주부대(朱部隊)’라 불렀다. 수도경찰대는 서울역에서 출발할 때부터 ‘聖血(성혈, 숭고한 죽음)’이란 글자가 새겨진 흰수건을 머리에 둘렀다. 이들은 여수종산국민학교에 주둔하며 국군을 도와 민간인 협력자 색출에 나섰다.

오천동에 진입한 수도경찰대는 50여 가구 주민들을 ‘빨갱이 마을’로 간주하고 마을을 철거한다며, 불을 질렀다. 화양면에서 벌어진 학살도 대체로 수도경찰대의 만행이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 화양면에서 벌어진 11명의 학살이며, 1948년 11월에 화양면사무소 인근에서 즉결처분하거나 여수시내로 연행된 후 학살되었다.

아래 사진은 여순항쟁의 참전을 기념하는 메달로 이승만 대통령이 ‘주부대(朱部隊)’에 하사 메달이다. 

여순항쟁 진압에 참전한 주종일 부대(朱部隊)에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메달의 앞뒷면. 주부대 메달이란 표시가 있다.  자료 주철희 제공

또한, 제8관구 경찰청(현, 전남경찰) 응원 경찰과 여수경찰서 경찰 등 130여 명으로 구성된 경찰사령부도 사찰과 수사를 맡았다. 경찰사령부의 지휘는 제8관구 경찰청 부청장인 최천이었다. 최천은 부청장으로 순천지역의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던 악명 높은 인물이다.
주철희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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