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서 고개 하나만 넘으면 친정어머니의 고향인 외가가 나온다.어릴 적에는 방학이면 이모와 외삼촌을 만나러 외가에 놀러가곤 했다. 지금도 나이 드신 이모님 혼자 살고 계셔 가끔 방문을 한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대도시에서의 화려하고 멋진 삶을 꿈꾸며,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리듯, 반도의 끝에서 멀리 서울까지 날아갔지만 결국 다시 돌아왔다.정원 바로 맞은 편 산꼭대기에는 외할머니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누구보다도 나를 끔찍이 사랑해주신 외할머니가 항상 나를 지켜보고 계신 셈이다. 이렇게 뭔가 알 수 없는 인연에 끌리듯 이 산
우두리 작은 텃밭에서는 남편의 주먹거리인 고구마와 블루베리이다. 대장암 수술을 받은 적 있는 남편은 종이 상자에 켜이켜이 쌓아 놓고 날마다 고구마를 쪄 먹는다. 그런데 오늘 아침, 상자를 열어보니 고구마에서 싹이 트고 있었다.눈도 코도 없는 것이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어떻게 봄이 오는 것을 알았는지 필사적으로 싹을 틔우고 있었다. 날마다 고구마를 쪄 드시는 남편께서 말씀하신다 ‘쥐 소금 먹듯 1년 내내 고구마를 먹는 우리인데, 그나마도 직접 농사를 지어서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풍부하게 사 먹으려먼 돈이 적지 않게 들거야“라고
지금이야 청정하고 맑은 기운이 가득하지만 원래 이곳은 개나 오리, 닭 등을 키우던 곳으로 매입 당시 견고한 철책에 둘러싸이고 시멘트 가건물이 여기저기 널린 곳이었다.땅을 구입하고 맨 처음 한 일은 시멘트와 철책을 모두 걷어내는 일이었다. 거대한 포크레인으로 인부들과 함께 한 달간 철거 작업을 했다. 동네사람들은 그 좋은 시멘트 길을 왜 걷어내냐고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공사작업이었다.그러나 사실 벅찼다. 공사과정에는 크고 작은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토목과 관련된 문제가 많았는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겨울을 잊게 하는 날씨가 계속되더니, 요 며칠 여수에서도 눈발이 날리고 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흥남부두'는 아니지만 오랫만에 겨울바다의 정취를 맛본다.날씨가 풀리기 전에 어서 생선을 말려야지. 중앙시장으로 나가니 상점마다 궤짝에 가자미를 가득 담아 팔고 있다."가재미가 제철이구나, 곧 3월이면 기일도 다가오니 이왕이면 가장 큰 것으로 사자" 근데 난 '가재미'라야 더 친근감 있고 맛있게 느껴진다. ㅎㅎ 큼직한 가자미와 서대를 넉넉하게 사서, 우두리 농가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난로에 장작을 집어 넣어 불을 지핀다
언젠가 폐교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갤러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갤러리를 운영하는 화가가 도중에 그가 이런 말을 했다.“이 정원에는 천 권의 책보다 넘치는 지혜가 들어 있어요.”과장된 표현에 그저 정원을 가꾸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구나 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정원을 가꾸는 지금, 그가 했던 말의 의미를 온몸으로 절절히 깨닫고 있다.자연을 대상으로 일을 하다보니 책에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삶에 대한 지혜를 배운다. 명상을 할 때와 유사한 직관적 앎을 활성화시키고 내면의 물음에 대한 답이 얻어지기도 한다.잡초에 대한 통찰과
돌이켜보면 불행이라고 여겼던 일이 축복인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종종 있다. 어린 시절 가난도 그 중 하나다. 고통스럽고 힘들던 그 시절 가난으로 인해 인생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은 진보적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무엇보다 현재 삶의 풍요로움에 더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지금도 ‘부자’는 아니지만 이 넘치는 풍요로움이 한없이 고맙다. 약사라는 직업을 망설임 없이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물질적 부’에 대한 내 기준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내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정원에서 최고의 작품은 차밭이다. 이곳은 사시사철 푸르름으로 정원을 싱그럽게 하고, 화사한 꽃밭 못지않은 풍경을 선사한다.해마다 봄이 되면 새싹으로 향기로운 차를 만들어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기쁨까지 누리게 해주니 차밭이야말로 말 그대로 일석삼조의 보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차나무가 잘 자라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습도가 높고 배수가 잘 돼야 하며 적당한 음지여야 한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차밭은 대부분 안개 자욱한 고산지대의 경사지에 자리잡고 있다.우리 정원은 특이하게도 정원 전체가 계곡으로 빙 둘러싸여 있
여수시 돌산읍 우두리. 소의 머리와 같은 형상을 지녔다는 이유로 이름 붙여진 이곳은 300여채의 가구가 살고 있는 바닷가마을이다. 바닷가라 하지만 어업보다 돌산갓으로 익숙한 이곳에 우리의 작은 농터가 있다. 우두리는 도심과 멀지 않은 곳에서 바다를 끼고 자리한 농어촌마을이다.처음 우두리집과 마주한 날, 마당과 이어진 남해 푸른 바다에 매료되어 숨죽여 환호했다. 그때는 오로지 흙과 바다와 교제할 생각 뿐, 매서운 바닷바람의 맛은 짐작하지 못했다. 그저 바다의 로망만 안고 호미와 괭이를 잡았으니 이렇게 순진할 수가 없다.농사를 지으며
사람들은 인생을 여러 가지에 비유한다. 한 편의 연극이나 드라마에 비유하기도 하고 ‘일장춘몽’ 이라고도 한다. 한때 나는 인생은 여행이라고 생각했다.30대 초반 유럽여행을 간 적이 있다. 지금은 사라진 진보 월간지 《말》에서 기획한 유럽여행으로 독일에서 송두율 교수를 만난 후,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쓴 홍세화 씨와 함께 파리를 여행하고, 스위스와 이탈리아까지 둘러보는 15일짜리 여행 프로그램이었다.그 시기 학생 신분이던 남편은 거금을 들여 유럽여행을 간다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고민 끝에 가기로 결정했는데 이 여행에서 나는 생애 최초
정원을 가꾼 지 일 년쯤 지나서였다. 대문에 소박하게 ‘명상의 집’이라는 작은 나무 간판을 달았다. 자인과 나는 이곳을 청정하고 깨끗한 수행공간으로 만들고 싶었고 작은 간판이라도 달아야 사람들이 우리의 뜻을 존중해줄 것만 같았다. 명상을 위한 공간이기에 당연히 술과 고기도 금했다. 자인은 과거 명상센터에서 같이 공부했던 도반으로 얼마 전 나를 찾아왔다.간판까지 달고 인도의 아쉬람 같은 명상센터를 만들겠다는 ‘포부와 이상’도 생겼고, 함께하는 도반도 있고, 모든 것이 갖추어졌으니 이젠 정원을 가꾸면서 열심히 수행만 하면 되었다. 전원
여수 엑스포 힐스테이트 1단지 부녀회는 새해가 되면 하늘공원에서 해돋이행사를 연다.올해는 아파트 주민 뿐 아니라 덕충동민과 관광객까지 합세해 1천여명의 인파가 하늘공원을 가득 메우고, 오동도를 배경으로 떠오르는 장대한 일출을 바라보며 한 해의 소망을 빌었다.힐스테이트 부녀회 임원들은 매년 새해맞이를 계획하고, 이동식 식기를 빌려 어마어마한 양의 떡국과 차를 행사 참가자들에게 대접하며 그 넉넉함을 전달하고 있다.행사를 주관한 부녀회장 김선자 씨는 "힘차게 떠오르는 태양처럼 모두에게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새해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
살아 성장하는 예술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신비한 집’ 계약을 마친 다음 날, 잠을 설친 나는 아침 일찍 집을 보러 갔다. 늦가을, 조금 쌀쌀했지만 아침 햇살에 나의 정원이 오렌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정원은 야생화 되어가고 있었다.산에서 내려온 뿔 달린 야생 염소 가족이 마당에서 동백나무 잎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고, 동네 고양이들도 여기저기 어슬렁거리고 닭도 서너 마리 뛰어다녔다. 칡넝쿨은 마당 한가운데까지 뻗쳐 나왔고 이제 막 떨어지기 시작한 갈색 낙엽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소박한 ‘아쉬람’결혼한 후
가끔 상상해 본다. 내가 만약에 정원을 가꾸지 않았으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특별히 떠오르는 일이 없다. 정원 가꾸기는 내게 ‘운명’과 같다.지난 2000년에 남편 한의원 개원을 위해 오랜 타지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여수로 내려왔다. 역사적으로도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의미 있는 해였지만 내게도 삶의 중요한 변화들이 일어난 해였다.먼저 삶의 터전의 대이동이 있었고, 하나뿐인 아들이 드디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또 내 생애 가장 슬픈 일, 친정엄마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인생은 이렇게 슬픈 일, 기
미워도 다시 한 번,지저분하고, 시끄럽고, 정신없는 전쟁터 같은 곳인데 나는 간다.그곳으로~두 아이의 조기유학터가 된 인도의 벵갈로르는 아이들이 떠나 온 후에도 종종 그 곳을 다시 찾았다.그리워서~떠난 후에 인도가 더 그리워지는 것은 다양함의 혼재 때문이 아닐까? 나는 내가 살던 곳을 남편과 함께 간다. 나의 권유에 큰 맘을 먹고 인도로 가는 남편, 며칠 후면 내가 만났던 인도를 남편도 만난다.약 15일간의 인도 일정 중 남부 벵갈로르에서 10여일과, 나머지 일정은 북부 갠지스강과 타지마할을 즐길 계획으로 떠난다. 물론 남편을 위해
노는 물이 다른 사람들,그들은 작정을 하고 섬으로 가서 논다.혼자 노는 것이 아니라 더블어 논다. 함께 논다~.의미 있는 놀이를 선택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섬에서 노는 사람들은 근심걱정 없이 논다.상상해보라! 드높은 하늘,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섬으로 가는 길, 어떤 고민과 번뇌를 가지고 갈 수 있을까? 그들은 자신으로부터 먼저 힐링모드를 갖게 되어 섬에서의 '놀이판'이 신명 날 수 밖에 없다.노는 물이 다른 사람들은 ‘여수시민복지포럼 봉사단’이다. 그들은 바람을 타고, 파도를 타고 섬으로 간다. 하나님 주신
봄부터 여름까지 정원의 식물은 놀랍도록 빠르게 성장한다. 아침 꽃봉오리가 오후에 활짝 피는 것은 다반사요, 오전에 피었던 꽃이 오후에는 시들어 버리기도 한다.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거짓말 조금 보태면 식물이 자라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다. 특히 칡넝쿨은 마치 ‘반半 동물’처럼 움직이면서 빠른 속도로 주변의 식물을 타고 다닌다.몇 년 전 여름, 여행을 가기 위해 열흘 정도 정원을 비운 적이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잔디도 짧게 깎아 놓고, 정원 여기저기를 며칠에 걸쳐 정리해놓았다.집에 돌아와 보니 정원은 입이 딱 벌어질
“오늘날이라면, 이순신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진급했을 것 같습니까?” 교수는 해군사관생도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장군! 아니다.“중령 정도요!(잘하면 대령)”해군사관학교 생도들 대부분이 그렇게 답변했다. 장군은 못 되었을 것이다. 아 ~임원빈 교수(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의 이순신학교 강의를 들으며 ‘이순신 생태계’라는 새로운 단어를 접한다.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을 당해 가면서 ‘절도사’에 이어 ‘통제사’까지 역임했는데, 이는 오늘날과 굳이 비교한다면 투스타 소장(혹 장군)정도의 계급이었다고 한다.그런데 그런 이순신
이순신햄버거- 이순신을 먹어?이순신포장마차- 이순신을 마셔?여수에 오니 이순신을 팔아 먹고 사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나도 여수지앵이니 이순신을 알고 싶었다.이순신, 그는 뛰어난 수재가 아닌, 사람 냄새 나는 보통사람, 사람다운 사람이었다.‘이순신은 정돈된 인격체’(이은상). 어찌나 적합한 표현인지, 이순신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2019년 11월 9일, 이순신학교 유적지인 한산도 답사 길은 이순신을 알아가는 데 한몫을 더 했다.‘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난중에도 어디서 그런 감성이 나왔는지, 나도 그 수루에 앉아
‘미인’에 관심 없는 여성이 있을까? 또 ‘미인’에 관심 없는 남성이 있을까?이번 전시의 작품 모델은 전부 여성이다. 여성,남성 모두 관심이 많은 ‘미인’.그것도 동서양의 미인들이 우리 동네에 떴다.‘여수엑스포아트갤러리’에서 전시되는 “자인- 동서양의 근현대 미인도”는 코리아나미술관의 소장품 기획전으로 ‘2019년 미술창작 전시공간 활성화 지원사업’의 일환이라고 한다. 근현대 미인상 94점을 한눈에 볼 수 있다.자인(姿人)은 ‘기품 있고 맵시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뜻이다. 과연 화장품 회사다운 주제다.(코리아나 미술관은 코리아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끌리는 이봉상 화백 그림의 모델이 되는 상상을 한다.그 분은 독학으로 자신만의 필법을 구축한,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천재화가다.눈이 확 밝아지는 느낌,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듯함, 시선이 고정되고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음, 미술관에서의 이런 경험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오래전 내 기억 속 서울에서의 국립현대미술관 한 켠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한다.그림 속의 시대이야기. 그림 속 작가이야기. 그림과 마주하는 우리들의 이야기.그림이라서 좋다. 글이 갖는 전달력은 시력과 함께 가야 한